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살다 보면 강렬한 느낌이 찾아들 때가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신령한 영감 같은. 2007년 510일 장기파업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해방구가 된 월드컵 홈에버 매장 농성장에서 곤하게 잠든 조합원들을 새벽녘마다 지켜보며 몸이 떨렸다. 동터 오는 여명에 계산대 사이와 그 주변에 박스를 깔고 누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단 취침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박성수 이랜드 회장은 이 고단한 외박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할 거라고 다짐했다. 평범한 여성노동자들의 의롭고 정당한 투쟁이 승리할 거라 믿었다. 강압과 폭력과 거짓을 동반한 자본의 만행을 끝내 이겨 낼 거라 스스로 다독였다. 투쟁이 길어져 수많은 갈등과 우여곡절을 겪고도 파업대오가 마지막까지 공유한 서로에 대한 믿음은 3주 동안의 점거농성 기간에 형성된 것이었다.

농성 조합원 모두의 절박한 진심이 모여 결단한 무기한 점거농성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경계를 허물었다. 가족보다 더 피붙이처럼 살 맞대고 생활하는 동안 사회적 가족으로 진화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원형이 그곳에 있었다. 정부와 국회와 법원이 외면하고 배제한 노동자들의 자치는 훌륭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청소한 매장 바닥은 반질거렸고 껌 한 통 도난당하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규칙을 지켰다. 기득권은 애당초 없었다. 오히려 노조간부들이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다. 긴급 상황에서 지침 외에 위계라고 할 만한 것은 모두 사라졌다. 취재기자들이 농성현장의 일상에 감동받아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답지한 후원물품이 농성장 한쪽에 수북이 쌓였다.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날들은 내 평생의 푯대가 됐다.

2014년 또다시 강렬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서울 도심 광화문 대로변 파이낸스빌딩과 프레스센터 사이 옥외전광판. 2주일째 비정규 노동자 두 명이 하늘에 집을 짓고 깃들어 있다. 서울권역 1위 케이블방송업체인 씨앤앰에서 설치·수리기사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한 사람은 해고자고, 한 사람은 비해고자다. 임정균씨는 해고된 109명의 동료들이 가슴에 사무쳐 아내에게 말도 못한 채 해고자인 강성덕씨와 함께 고공에 올랐다. 희망연대노조 씨앤앰지부(정규직)의 김진규 지부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비정규직 해고 문제가 곧 자신들에게 구조조정 칼날로 되돌아올 것을 알고 파업으로 함께 전선에 섰다. 그 맘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씨앤앰 대주주인 MBK파트너스는 매각단가를 올리자고 노조 탄압에 혈안이 돼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분열돼 있었다면 어떤 사달이 났을지 모른다.

씨앤앰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고공농성 투쟁 승리를 위해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한 11월18일은 노동운동사에 남을 중요한 날이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손을 맞잡아야 이길 수 있다고 누구나 강조한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밥그릇을 앞에 두고 노동자들은 분열하고 적대하기 일쑤였다. 노동운동의 대원칙을 올곧게 실천하는 노동조합은 현실에서 극소수다. 하물며 파업으로 비정규 노동자와 하나가 돼 투쟁하는 노동조합은 거의 없다. 씨앤앰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하나임을 온몸으로 보여 줬다. 노동자 승리의 비결을 실천했다.

투기성이 큰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 맞선 씨앤앰 노동자들의 투쟁이 패배한다면 위기와 침체로 고통을 겪어 온 노동운동에 뼈아픈 직격탄이 될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이렇게 강고하게 한마음으로 단결하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 3권은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다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사회적 여론이 달궈지더라도 당사자가 나서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한 번은 이길 때도 됐다. 그래야 극단화된 양극화와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균형을 되찾고 정상화될 수 있다. 영화 <카트>의 선희와 혜미·동준처럼 하나가 된 노동자들의 인간 선언이 출발이다. 씨앤앰처럼 맑고 아름다운 노동자 투쟁이 온당한 결말로 마무리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전진할 수 있다. 씨앤앰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은 한국 사회 전체 노동자들에게 이정표이자 본보기가 되고 있다. 고공농성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너나없이 임정균이 되자. 주저하지 말고 우리 모두 강성덕이 되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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