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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1]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1975년 12월23일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 당시 조합원이 쓴 혈서. 민종덕


▲ 신순애가 노동자로서 스스로의 역사를 다룬 자신의 석사논문을 최근 출판했다. 민종덕

지난번 전태일 추모행사를 주도했던 '전태일 동지 5주기 추모위원회' 회원들은 '지금 기쁨에 도취돼 있을 때는 아니다'고 인식했다. 저들이 비록 지금은 저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노동시간단축이 백지화될 때를 대비해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투쟁을 통해 확실하게 쟁취해 내지 않으면 노동시간단축은 허망한 꿈으로 돌아가 버릴 게 틀림없다.

추모위원들은 광희동 배철수의 방에 은밀히 모였다. 방안에 빙 둘러앉아 대책을 논의했다. 모두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확실하게 싸워서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 1975년과 같은 폭압적인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인 투쟁을 통해 최소한의 노동조건이라도 개선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대단한 결단을 요구했다. 대학교에는 경찰·정보원들이 상주해 있고 언론은 침묵하는 데다, 자주적인 노동운동은 물론 농민운동마저 미약한 상태였다. 뜻있는 지식인·학생들이 유인물만 뿌려도, 말 한마디만 비판적으로 해도 서슬 퍼런 긴급조치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가는 시대였다.

추모위원들은 추모위원회가 추모행사를 치르기 위한 일회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추모위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사람을 규합해서 투쟁조직체를 만들기로 했다. 핵심 추모위원들은 각 모임, 이를테면 아카시아회·산울림회·리본침회·삼진회 회원들을 만나 조직을 확대·강화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12월16일의 노동시간단축 조치는 설마했던 기대가 역시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6일부터 실시되던 노동시간단축이 꼭 닷새 동안만 시행되고는 백지화돼 버렸다.

추모위, 노동시간단축 투쟁조직체 구성

저녁 8시만 되면 각 상가마다 전기를 내리고 감독관들이 감독을 강화하니까 노동시간단축이 지켜졌는데, 날이 갈수록 시들해졌다. 사용주들은 전기를 내렸다가 감독관이 사라지면 다시 전기를 올리고 일을 시켰다. 닷새가 지난 뒤부터는 아예 전기도 내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 이 공장 저 공장에서 8시 이후에 작업을 함으로써 노동시간단축이 백지화돼 버렸다.

이소선은 그 무렵 오전에 노조사무실에 잠깐 들러 조합을 둘러보고 간부들을 격려한 뒤 낮에는 중앙시장에 가서 헌 옷가지를 사다가 파는 일을 했다. 저녁때는 광희동 배철수의 자취방으로 가는 것이 일과였다. 광희동에서는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매일 저녁마다 모여 각자 활동했던 내용을 취합했다. 그들은 대책을 세우느라 날마다 밤을 새웠다. 광희동 자취방은 자연히 투쟁의 사령탑으로 자리 잡게 됐다.

광희동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짧은 점심시간이나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사람들을 만났다. 밤에는 또다시 자취방에 모여 동이 틀 때까지 토론을 했다.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아침에 부랴부랴 일어나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출근했다. 자연히 몸이 배겨 내질 못했다. 모두들 얼굴이 붓고 입술이 부르텄다.

이소선은 헌 옷 장사를 해서 몇 푼 번 돈으로 이들을 거둬 먹이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돈이 떨어져 빈털터리가 되는 날은 광희동 집으로 향하는 언덕배기가 어찌 그리도 높은지, 손에 든 보따리는 왜 그리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노동시간단축을 위해 싸워야 할 시기가 임박했다. 투쟁 준비로 할 일이 많아지자 공장에 출근하는 일과 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병행할 수 없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양승조와 민종덕이 아예 장기간 결근할 셈 잡고 며칠간 이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은 잠깐 시행되던 노동시간단축이 백지화되자 체념하는 분위기에 빠졌다.

"청계천 제품공장에서는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없다. 한두 개 공장도 아니고 600여개에 달하는 공장을 어떻게 똑같이 저녁 8시에 끝나게 할 수 있어? 일찍 끝나면 좋기야 좋지만 노동시간단축은 희망일 뿐이야!"

"그래 맞아. 제품쟁이들을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몽땅 서울운동장 같은 곳에다 몰아넣어 버리고 우리 이제 절대로 저녁 8시 이후에는 일을 못한다고 버티지 않는 한 어려울 거야."

조합원들은 서로 체념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무너진 희망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투쟁을 통해 노동시간단축을 쟁취하고자 하는 활동을 끈질기게 준비해 나갔다. 그 결과 추모위가 중심이 돼 재단보조 모임인 산울림회와 리본침사(바늘이 두 개인 미싱을 다루는 기술자. 주로 남성이다)들의 모임인 리본침회, 그리고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진회를 연합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는 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싱사와 시다 중심의 여성모임인 아카시아회는 여러 가지 내부 사정상 들어오지 못했다. 아카시아회는 소모임 중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어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대신 아카시아 회원 중에 투쟁에 찬성하는 조합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당시 아카시아회 임원들은 노조 집행부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무기한 단식농성을 결의하다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는 투쟁위원회'는 12월23일 저녁 8시에 노동시간단축을 요구하며 노동교실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12월23일. 모두들 결연한 각오로 농성할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떠한 집단행동도 허용되지 않는 시국에 대부분 처음 해 보는 단식농성을 앞두고 바짝 긴장했다.

농성장소인 노동교실은 집행부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산울림회에서 회원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미리 빌려 놓았다. 투쟁위원들은 처음에는 조합원 교육을 하는 것처럼 위장해서 시간을 끌다가, 어느 정도 사람이 모여들면 출입구 셔터를 내리고 농성에 돌입하기로 했다.

농성이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고 수도물이 끊길 수도 있기 때문에 농성과 동시에 물통에 물을 가득 받아 놓았고, 소금도 준비했다. '농성 중에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농성장을 빠져나가지 않는다',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기 전에는 절대 흩어지지 않는다'는 의지를 다졌다.

드디어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교육에 조합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투쟁위원들은 저마다 구역으로 흩어져 사람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교육이 끝날 무렵에는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교육이 끝나자 투쟁위원이 교단에 올라가 선동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도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쉬는 날도 없이 하루 14시간씩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을 해야 하니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놀러도 다니고 극장구경도 다니는데 우리는 죽어라고 일만 해도 언제 한번 마음 놓고 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잘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청춘, 우리의 인생을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최소한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16일부터 시장에 전깃불이 나가고 8시에 일이 끝나니까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일주일도 못 가서 말짱 도루묵이 돼 버렸습니다. 이제 저들의 사탕발림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우리가 싸워서 일하는 시간을 줄입시다. 그래서 우리도 좀 사람 사는 것같이 살아 봅시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시장상가 1만2천여명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자리에 남아 함께 밤을 새웁시다."

"옳소! 이 자리에서 끝장을 냅시다!"

투쟁위원의 선동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대단한 열기였다. 강당 안에 있던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가 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아~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아~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청계피복 노동자다."


열띤 분위기는 밤 11시를 넘어서면서 식기 시작했다. 미리 철야농성을 할 계획으로 모인 사람보다도, 투쟁위원들이 작업하는 공장에 들이닥쳐 선동을 해서 온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이소선은 안 되겠다 싶어서 앞에 나섰다.

"여러분, 늦게까지 일하고 밤이 늦었는데 또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우리도 다 알아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멸시받고 천대받으면서 살아야 하겠어요?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서는 안 돼요. 특히 여러분들은 여자로서 앞으로 시집가서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여러분이 건강해야 여러분의 후세들도 건강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심한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어요. 온몸이 시들어 가는 처지 아닙니까? 우리들도 다 같은 사람인데, 적당히 일하고 자신의 건강도 돌보면서 또 여유가 있으면 최소한의 문화생활이라도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도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느 누구가 우리의 권리를 대신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 고생된다 해도 이 순간만 고생을 하면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것입니다. 노동시간이 단축돼 건강을 해치지 않고, 약간은 여유 있는 생활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해 주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가 이 생활에서 영원히 헤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자로서 갑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공장에서 며칠씩 철야작업을 할 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도 여러분의 진실을 알면 이해하실 겁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 중에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들만 집에 가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곳으로 오세요."

피로 쓴 혈서 … "계속 투쟁합시다"

이소선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차분하고 조리 있게 호소를 했다. 이소선의 호소가 끝나자 박수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 박수소리는 초저녁 때만큼의 열띤 박수는 아니었다.

입구 문쪽에서 14~15세 정도의 어린 시다들이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이소선은 하루 종일 공장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린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밤늦게까지 붙잡고 농성을 시킨다는 것이 측은하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지금 저들이 측은하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어쩌면 오늘의 처지를 자신의 타고난 팔자소관이라면서 체념하고 언제까지나 노예 같은 삶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남자 조합원 하나가 연단 위로 올라오더니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시뻘건 피가 흘렀다. 그는 피로 글씨를 썼다.

"계속 투쟁합시다."

이 광경을 본 조합원들로부터 박수가 터져나왔다. 열기가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혈서를 쓴 조합원은 재단보조이자 산울림회원 김기철이었다.

자정 가까이 되자 집에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이 100명도 못 됐다. 밤을 새울 준비를 제대로 하기 위해 자리를 정돈했다.

교실 전체에 석유난로가 하나밖에 없었다. 시멘트 맨바닥에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즉석연설을 듣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새벽 2시쯤부터 신문지만 깔린 바닥에서 덮을 것도 없이 모두들 새우잠을 잤다.

농성자 대부분은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자다 보니 추워서 잠을 더 잘 수가 없었다. 온몸이 퉁퉁 부어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입 안이 깔깔하고 뒷골이 쑤셨다. 이렇게 농성 첫날밤이 지나갔다.

그런데 날이 환하게 밝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뜨고 일어나더니 훌훌 털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더니 아침 7시가 넘으니까 남은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 다들 공장으로 출근한 것이다.

이소선은 낭패라고 생각했다. 밤새도록 고생해 놓고 출근시간이 되자 상당한 숫자가 출근해 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싶었다. 조금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 텐데 이렇게 적은 숫자가 초라하게 앉아 있으면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같잖게 보겠는가! 이소선은 애가 탔다. 그렇다고 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이소선의 심정은 돈이 있어 사람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고라도 사람을 사서 앉혀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투쟁위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일단은 조금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 테고 그때를 대비해 사람 숫자가 많아야 하니 투쟁위원들이 농성장 밖으로 나가 집에서 출근하는 조합원들을 최대한 설득해서 농성장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투쟁위원들이 흩어져 각 상가 입구로 나갔다. 한참 있으니까 투쟁위원들이 몇 명씩 무리지어 출근하는 조합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 모습을 본 이소선은 농성장에 합류한 조합원들이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마웠다. 정말 사람 하나하나가 억만금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사람 귀한 것을 그때만큼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고 이소선은 늘 말했다.

조금 전 데리고 온 사람 중에 검정 바바리코트를 입은 미싱사 하나가 "잠깐만 공장에 갔다 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이소선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렵게 데려왔는데 갔다 오겠다고 해 놓고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몇 명은 그렇게 해서 갔다가 다시 오지 않았다.

이소선이 보기에 검은 바바리코트를 입은 미싱사는 말하는 것도 상당히 생각이 있어 보이고 나이에 비해 등이 구부정한 것을 보니 공장에서 일한 경력이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간다고 하니 너무나 속상했다. 이소선은 농성투쟁을 하는 저간의 사정을 간곡히 얘기했다. 그러자 미싱사는 공장에다 얘기하고 곧바로 틀림없이 오겠다는 것이다. 이소선은 그래 어쩔 수 없이 또 한 사람 가는가보다 하고 보냈다. 그런데 다시 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그 미싱사가 자기 친구들까지 데리고 농성할 준비까지 단단히 하고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이소선은 정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서 그 미싱사를 얼싸안고 춤을 췄다.

그 미싱사는 동화시장에 있는 '다림사'라는 와이셔츠를 만드는 공장의 오야(우두머리) 미싱사였다. 이름은 신순애라고 한다. 그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아주 어려서부터 공장생활을 했다. 생활력이 누구보다 강한 그는 시다 때부터 10년 가까이 정말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하고 싶은 것 안 하고 지독하게 저축을 했다. 그런데 그 돈을 뼈 빠지게 일하느라고 얻은 폐결핵 때문에 몽땅 날려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꼭 먹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보면 제과점 유리문 너머에 진열돼 있는 제과점 빵이었다. 그 빵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그것을 나이 20세가 지난 아직까지도 먹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침 8시30분이 지나니까 이번에는 공장 사장·공장장들이 찾아와서 온갖 공갈협박을 하면서 농성자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공장장 협박에도, 사장의 공갈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농성자들은 안 되겠다 싶어 출입문의 셔터를 내려 버렸다. 그랬더니 리본침회 회장인 박종화가 다니는 공장의 공장장이 셔터문을 발로 찼다.

“우리 공장 문제만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종화야! 너 당장에 안 나와? 너 지금 안 나오면 해고다!"

박종화는 어금니를 힘 있게 깨물며 말했다.

"공장장님, 나는 이 자리에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오했어요. 작업시간이 단축될 때까지 우리는 물러서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노동시간단축이 되기 전에는 나를 데리러 올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야 인마, 니가 그럴 수가 있냐? 내가 섭섭하게 해 준 게 있다면 직접 얘기할 것이지, 이런 데 와서 이렇게 할 수가 있어? 일단 공장에 가서 나하고 얘기하자!"

"우리 공장의 문제만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시장 전체가 노동시간단축이 안 되면 우리 공장도 말짱 헛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공장만 일찍 끝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니까 돌아가세요."

"너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못 나와!"

셔터를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막무가내 고압적인 언사요, 한 사람은 이해를 구하는, 그러나 단호한 언사다.

"공장장님, 자세한 얘기는 농성이 끝난 다음에 합시다. 나 들어갈 겁니다."

안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지니까 공장장은 셔터를 발로 차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종화야! 종화야!"

농성 조합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외쳤다.

"공장장은 물러가라!"

간혹 욕설이 나왔다.

"야 이 개새끼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야? 너 죽고 싶냐? 빨리 꺼지지 못해!"

공장장은 혼자 열을 내다가 할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1시쯤 돼서 경찰이 건물 밖을 에워쌌다. 조금 있으니까 국방색 전투복을 입고 허리에 권총을 찬 중부경찰서 정보과 장아무개 계장이 몇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노동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육중한 몸매를 움직이면서 장 계장은 고압적으로 말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겁도 없이 집단행동이야! 불법인지 모르고 하나? 모두 다 긴급조치로 구속돼 볼 테야?"

이소선은 '긴급조치가 어떻고' 하는 말을 들으니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까딱하면 긴급조치가 어떻고, 뻥끗하면 긴급조치로 잡아넣고 하는 게 지긋지긋했다.

"그래, 긴급조치로 잡아넣어 볼 테면 넣어 봐!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서 단축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긴급조치가 어떻다고 협박이야? 잡아넣을 테면 나부터 잡아넣어 봐!"

장 계장은 권총을 짤그락거리면서 이소선을 쳐다봤다.

"저 여자는 무슨 자격으로 노동운동을 하는 거야? 근로자도 아니면서 선동이나 하고!"

"나보고 무슨 자격으로 노동운동을 하느냐고 묻기 전에, 본인은 무슨 자격으로 노동문제에 간여하는지 생각해 봐! 근로자들이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근거도 없이 협박하는 것은 무슨 자격으로 하는 거야! 근로자들을 짓밟으라는 자격을 누가 줬나?"

"저 여자 당장 끌어내 차에 실어!"

경찰도 흩트리지 못한 농성자들의 각오

경찰들이 움직이자 조합원들은 일제히 이소선을 붙들고 에워쌌다.

"경찰은 물러가라!"

"우리 어머니는 절대 못 데려간다."

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행동에 경찰들은 물러섰다. 장 계장은 자신의 공갈이 통하지 않았는지 한마디 했다.

"지금부터 30분 이내에 해산하지 않으면 전원 차에 싣겠다. 30분 이내에 해산해!"

마치 군대에서 상관이 졸병한테 명령하듯 했다. 조합원들은 분노에 찬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30분의 최후통첩 시한을 넘기자 경찰은 또다시 10분간의 여유를 준다며 해산을 명령했다. 농성 노동자들은 경찰의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경찰은 그냥 철수했다.

경찰의 공갈협박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조금 있으니까 노동청 감독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노동청 중부지방사무소장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서 단속을 강화할 테니 농성을 해산하라고 했다. 이에 농성 조합원들은 "말로만은 믿을 수가 없다. 무조건 저녁 8시에 시장상가에 전깃불을 내린다는 서면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소장은 전깃불을 내리는 것은 노동청의 권한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한전의 소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한전에 적극적으로 건의는 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노동청 직원과 한참을 싸웠다. 시간은 정오를 넘겨 오후 1시에 가까워졌다. 오후 1시면 조합원들의 점심시간이기 때문에 노동청 직원들은 1시에 현장 조합원들이 농성장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12시50분이 지나자 소장은 "나 자신의 모든 명예와 관의 명예를 공개적으로 걸로 여러분의 요구를 해결하겠습니다"라고 간곡하게 통사정을 해 왔다. 농성자들은 소장의 발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날 구체적으로 합의된 사항은 △오늘부터 당장 저녁 8시에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작업을 할 수 없게 할 것 △다락은 지금 당장 일률적으로 철거할 수 없으니 내년 3월까지 전부 철거토록 할 것 △기타 근로조건도 즉각 개선토록 한다 등이었다.

이날 투쟁의 결과로 노동시간단축이 실질적으로 실시되고 그 악명 높던 다락도 철거되게 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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