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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40] 간절한 소망
▲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장 모습. 영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한 장면. 기획시대
▲ 평화시장 작업장 모습. 영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한 장면. 기획시대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추모의 밤 행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추모위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고 보다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로 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정부당국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1970년 전태일이 죽고 난 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상당히 개선됐다고 호들갑을 떨며 선전해 댔다. 그러나 전태일의 장례를 계기로 달아올랐던 여론이 차차 가라앉자 옛날로 되돌아갔다. 여기에서 당시 청계피복 노동자들한테 강요됐던 노동조건을 알아보자.

다락방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노동자들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저 악명 높은 다락은 거의 모든 공장에 설치돼 있었다. 다락이라는 것은 평소에 쓰지 않는 물건이나 버리기 아깝고 놔두자니 귀찮은 물건을 두는 곳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청계천 피복공장은 전 지역에 걸쳐 다락이 설치돼 있다. 그 윗간과 아랫간에 기계와 작업대를 갖다 놓고 사람이 일을 한다. 다락이 설치돼 있으니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려면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미싱 기계에다 원단더미, 제품에 묻혀서 일을 하면 도대체 비좁아서 마음 놓고 움직일 수가 없다.

미싱에서, 원단더미에서, 기레빠시(천 쪼가리)에서 나오는 먼지 역시 심각하다. 작업장에는 먼지가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없다. 환풍기도 없다. 멀쩡한 건물에 다락을 쳐 놓았으니 설사 창문이 있다 해도 바람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다. 겨울에는 털 종류의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먼지 크기가 눈송이만 하다. 이러한 먼지들은 작업장을 가득 메우고 떠돌아다니면서 노동자들의 폐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하루 종일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일하다 보면 콧구멍에 새까만 코딱지가 닥지닥지 엉겨 붙게 마련이다. 밤늦게 버스에서 코딱지를 파는 아가씨는 영락없이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통행금지에 임박해 일을 끝내면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공장을 나서야 하는 탓으로 언제 씻고 정리할 틈이 없어 더욱 그렇다.

평화시장의 작업환경은 한마디로 비좁은 다락방 먼지 구덩이라고 할 수 있다. 비좁은 다락방 먼지 구덩이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몸에는 각종 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상당수가 폐결핵을 앓고 있고, 동상·생리불순·관절염·두통 따위의 병이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쫓아다닌다. 몇 가지의 병을 달고 다니는 노동자들도 상당히 많다. 2년 정도의 경력을 지닌 노동자들은 대개 ‘뇌신’ 몇 알에다 박카스를 매일같이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다.

"평화시장 아가씨들은 시집가서 3년만 고생하면 고물이 된다"는 자학적인 말이 증거하듯 노동자들은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하루하루 몸이 망가져 가도 노동자들은 몸을 돌보지 못한다. 청계천 노동자들은 "아프려야 아플 시간이 없다"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한다.

매일 노동시간은 보통 12~14시간이며 그 이상도 많다. 출근시간은 아침 8시나 8시30분이며 점심시간은 어떤 공장이건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다. 퇴근은 밤 10시를 넘겨야 한다. 즉 통행금지시간(밤 12시)에 맞춰 집에 갈 수 있는 시간이 퇴근시간이다. 공장 문을 나서면 집으로 향하는 막차가 이들의 지친 몸뚱이를 기다린다. 별 보고 나와서 별 보고 귀가하는 경우도 있다.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들은 점심도 굶고 일을 한다. 일이 바쁜 대목(추석이나 설을 앞둔 성수기) 때는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간에 퇴근이 없다. 하루에 열두어 시간 정도 일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자고, 그 자리에서 밥 먹고, 그 자리에서 일을 하는 이른바 밤일(철야)을 연속적으로 한다. 이때 잠을 쫓기 위해 사장들이 타이밍을 복용하게 한다. 장시간에 걸쳐 연속적인 작업을 하다 보면 정신이 멍해지고 바느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약한 사람은 쓰러져 버린다.

쉬는 날도 없이 14시간 일, 아플 시간이 없다

당시에는 평화시장이 전국의 기성복 수요의 80~90%를 공급한 탓에 쉬는 날이라고는 한 달에 겨우 이틀뿐이었다.

74년 11월 노조가 노동조건 개선문제에 대해 380명을 표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절실한 요망사항으로는 휴일제 실시가 27.3%, 노동시간단축이 39.1%로 조사됐다. 작업시간 단축과 일주일에 하루 쉬고픈 바람이 전체의 66.4%를 차지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직접적인 이유도 작업시간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어린 동심들한테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하라"고 외쳤겠는가.

청계천 노동자들은 햇볕을 거의 보지 못한다. 비록 점심시간에 잠깐 쉬고 한 달에 이틀 쉬는 날이 있지만, 그 짧고 황금 같은 시간에 잠을 자야지 언제 밖으로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연유로 인해 청계천 피복공장의 노동자들은 밝은 날 밖에 나가면 눈이 부셔 똑바로 뜨지 못한다.

이런 작업환경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장시간 노동의 결과로 받는 임금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청계천 피복업체의 임금제도는 주먹구구식이다. 작업시간이나 경력 또는 부양가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사용주가 알아서 지급한다. 객공(임시직) 미싱사의 경우 옷 한 벌당 공전을 정해 만들어 낸 숫자에 따라 임금을 지급한다. 공전을 정하는 것도 미싱사 당사자와 미리 합의를 해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팔고 난 연후에 사용주가 알아서 정한다. 그중 좀 낫다고 하는 사용주 역시 재단사한테 의견을 물어 결정하는 것이 고작이다.

74년 11월 노조가 조사한 임금실태 현황을 보면 재단사가 1일 8시간으로 환산해서 계산한 임금이 월 1만1천400원, 시다는 월 5천568원이다. 그마도 제때 지급되지도 않는다. 체불되기 일쑤고 뼈 빠지게 일해 놓고도 월급 한 푼 받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74년 한 해 동안 임금을 제때 못 받아서 임금을 받아 달라고 노조에 진정해 온 사람이 122명에, 체불금액은 229만7천328원이고 75년에는 150명이 진정해 해결한 금액이 284만4천177원이었다.

이렇듯 가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생활은커녕 날마다 시들어 가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지금까지 평화시장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직적인 투쟁이 없었던 탓에 일시적으로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듯하다가도 결국은 눈가림식으로 끝나 버리곤 했다.

노동자들은 현실을 직시해 나가면서 조직적인 투쟁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노조는 결성 당시부터 여러 가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해 왔다. 그중에서도 주휴제를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합간부들이 둘째 주와 넷째 주 일요일마다 출근해서 작업을 시키는 공장을 감시하러 다녔다. 조합간부들이 공장마다 순회하면서 작업을 하는 공장이 있으면 일하는 조합원들한테 일차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은 법에도 명시돼 있다. 일요일에도 일을 시키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며 단체협약 위반이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 자신의 권리는 싸워서 찾는 것이지 어느 누가 저절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사용주들의 부당한 처우를 거부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노조로 와서 함께 해결하자."

이럴 때 노동자들은 얼른 일어나서 퇴근을 했다. 간혹 사용주의 위압에 눌려 퇴근하고 싶어도 눈치만 보고 일어나지를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런 공장은 조합간부들이 전기스위치를 내려 일을 못하게 했다.

75년 12월14일, 이날은 둘째 주 일요일이었다. 조합간부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휴일 작업 단속에 나섰다. 특히 이날은 을지상가(전체 공장 67개 업체)에서 많은 공장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조합간부들은 을지상가에서 집중적인 단속을 폈다.

조사를 해 보니 주휴제를 위반한 업체가 30곳을 웃돌았다. 조합간부들은 각 공장마다 다니면서 전기스위치를 내리고 조합원 교육을 실시했다. 상당한 숫자의 공장들이 작업을 중단하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조합간부들은 다른 지역으로 단속을 나갔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조합 사무실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을지상가에서 많은 공장들이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꼭 일요일마다 쉬라는 것은 아니다”는 노동청

조금 전에 작업을 중단시켰는데 그사이에 다시 일을 시키다니, 조합간부들은 씩씩거리며 다시 을지상가로 달려갔다. 진상을 알아보니 조합간부들이 다녀간 뒤 노동청 서울중부지방사무소에서 근로감독과장과 근로감독관들이 각 사업장에 와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주휴제는 일주일에 아무 때나 하루만 쉬어도 되는 것이지, 꼭 일요일마다 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노조에서 나와 단전을 하는 것은 억지를 쓴 것입니다. 작업을 해도 좋으니 어서 작업을 하세요."

근로감독관들의 응원에 사용주들은 얼씨구나 좋다며 다시 일을 시켰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간부들은 분개했다. 단체협약에도 일요일은 휴일로 정해져 있다. 현실적으로도 일요일에 작업을 시키고 다른 날 유급휴일을 주려는 공장은 전무하다. 그런데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근로감독과장과 감독관들의 처사는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았다.

"감독관놈의 새끼들, 돈을 을매나 처먹었간디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고 댕기는 거여."

성질 급한 간부들이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후 사정을 곰곰이 따질 것도 없이 노동청에서 나와 그런 발언을 했다면 분명 노동조합을 깔보는 저의가 분명했다.

간부들은 즉시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 지부장을 비롯한 간부 전원이 일요일 소모임 활동을 하기 위해 노동교실에 나와 있는 조합원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래저래 모인 인원이 40여명쯤 됐다. 40여명은 즉시 종로2가에 있는 노동청 중부지방사무소로 쳐들어갔다. 이소선도 조합원들과 함께 중부지방사무소로 달려갔다. 이들은 들어가자마자 소장실부터 찾았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노동청 직원들은 놀랬다. 일요일이라서 소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근무하러 나온 직원 대여섯명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이 소장실에서 죽치고 앉아 농성을 하려는데 감독과장이 다가왔다.

"근로감독과장은 오늘 을지상가에서 노사합의 사항을 무시한 휴일작업에 대한 발언의 진상을 밝히시오!"

지부장이 단호한 어조로 감독과장을 향해 소리쳤다. 조합원들이 일제히 "해명하라! 해명하라!"고 외쳤다. 감독과장은 노조원들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어요. 우리가 오늘 얘기한 것은 근로기준법상의 휴일근무에 대해 말해 준 것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단체협약상에 명시돼 있는 사항을 무시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까 그것을 빙자해서 사용주들이 일을 시키잖소. 그리고 청계천 현실을 볼 때 일요일에 쉬지 않으면 대신 다른 날을 쉬게 해 줄 사용주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 같은 무책임한 발언을 한 저의가 대체 무엇이오?"

작은 키에 몸집마저 왜소한 이순자가 또록또록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이소선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저렇게 똑똑할 수가 있나. 학교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근로감독과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일요일이 아닌 날의 휴일 실시는 사용자가 잘못 받아들인 것으로 이를 즉각 시정조치해서 일요일이 주휴일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주휴일은 그러면 과장의 명예를 걸고 지키도록 하십시오. 우리들이 지켜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근로기준법에 어긋난 작업시간을 비롯해 다락 문제, 건강진단 문제 등은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지부장은 이번 기회에 주휴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까지 거론해 뿌리를 뽑을 작정을 한 듯 몰아붙였다.

"그 문제도 다 해결하겠습니다."

"아, 그렇게 어물쩍하게 대답하지 마시고 확실하게 대답하시오. 맨날 시정하겠다, 검토하겠다, 연구하겠다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하지 말고 언제까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것을 밝히시오!"

이번에는 남자 조합원이 말을 받았다. 다른 조합원들이 일제히 "옳소"를 연발하며 응원했다.

"12월16일까지 힘닿는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과장 옆에서 감독관 하나가 열심히 적었다.

"지금까지 너무 속아 와서 믿을 수가 없소. 문서로 약속하시오."

"그래요, 맞아요. 각서를 쓰시오."

조합원들은 틈을 주지 않고 감독과장을 다그쳤다.

"각서는 쓸 수 없고 여러분이 나를 믿어 주세요. 내가 감독과장의 자리와 명예를 걸고 여러분한테 약속하는 것이니 믿으세요. 여러분의 요구가 없어도 이러한 문제를 진작부터 시정하려고 계획해 왔습니다."

서면 약속 문제로 한동안 옥신각신하던 끝에 지부장이 감독과장을 한번 믿어 보자고 해서, 이날 노동청 중부지방사무소 항의방문은 일단락됐다.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이들은 노동교실로 돌아갔다. 이들은 오늘의 통쾌한 승리에 한동안 도취돼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시간이 많이 늦어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왔다.

노동자들 항의로 천지개벽 이루다

75년 12월16일 저녁 8시.

서울의 청계천변에 소재한 평화·동화·통일·을지·연쇄·동문·부관·동신 등 각 상가에 있는 580여개 공장의 1만여 의류제조 노동자들한테 실로 천지개벽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저녁 8시가 되자마자 전체 시장상가에 전깃불이 나갔다. 각 공장의 사장들과 경비들이 노동자들에게 퇴근하라고 설치고 다녔다.

"작업이 끝났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노동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청계천에 제품공장이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어쩌다 비수기인 때 일감이 없어서 일찍 끝난 적은 있어도 요즘같이 바쁜 철에, 그것도 사장들이 앞장서서 일을 끝내라고 설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날의 감격을 일기형식으로 쓴 어느 조합원의 글을 보자.

간절한 소망

- 잊을 수 없는 어느 날의 일을 회상하며

1. 내가 평화시장 제품업소에서 일해 온 지도 어언 십이삼 년. 그동안 직접 간접으로 우리 살림을 돕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고 가끔 생각해 봤다. 그러나 이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거의 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도 가난하기만 한 집안에 태어나 잘살아 보겠다는 책임을 안으로 지고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허구한 날 불리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해 와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려니 하고 뼈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 얼굴빛이 누렇게 떠도 또 참고 참다 보니 이젠 몸에 배어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나 한 사람 희생해서 우리네 가정들이 잘산다면 모르지만 아직도 끝없는 가난이 뒤따르고 있다. 이토록 몸 바쳐 참고 희생해 봐도 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바엔 근로조건이라는 한 귀퉁이를 터놓아서라도 고된 일에서 다소나마 해방을 시켜줘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빌어 왔다.

2. 지난 14일은 둘째 일요일이어서 노동교실에서는 여러 팀의 모임과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예정된 시간이 넘어도 과반수이상이 모이질 않았다. 웬일일까 해서 알아보니 작업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노조측에서 가서 제지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노동청에 보고해 근로감독관들이 왔다. 그러나 사업장에 나간 근로감독관들은 오히려 이제까지 지켜 온 우리의 질서를 뒤엎어 놓고 마는 식의 지시를 하고 갔기 때문에 우리 조합원들은 흥분한 나머지 지부장님을 찾아 40여명이 중부지방사무소에 가서 무책임한 행정지시에 항의하고 앞으로 우리의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고 감독하지 않으면 우리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우선적으로 시간단축에 주력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돌아왔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오늘을 마음 조이며 기다렸다.

3. 저녁 8시,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제각기 어리둥절하며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웅성거린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웬일일까"라는 둥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이유를. 아!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누구 나하고 춤 출 사람 없니?"

"아니, 언니 왜 그래?"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일찍 끝났다는 해방감에서 좋아하는 저들에게 무어라 이 기쁜 설명을 한마디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사장들은 빨리 옷 주워 입고 나가라고 설쳐 댄다. 겁먹은 소리로 건물 밖에 나오니 무리를 지어 우리 동료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지난 14일 우리의 요구가 실효를 봤다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좋다. 아니 며칠, 몇 달만이라도….

아! 이 기쁨을 누구 통할 수 있는 사람과 나누며 기념하고 싶다. 생각나는 대로 친구가 사는 집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갔다. 마침 동생이 일찍 들어와 있었다. 나는 급히 방으로 뛰어들었다.

"순자야, 나하고 춤추자!"

나는 그녀를 얼싸안았다.

"언니, 웬일이야?"

영문을 모르는 순자는 정신이상이라도 되지 않았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소망인 시간단축이 된 거야, 이것아!"

"언니, 정말?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 이날을 맞기 위해 이미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쳤고 앞에서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던가.

부디 눈속임수를 쓰기 위한 방지책이 되지 말고 제멋대로인 시장상가에 질서와 규칙을 가져 올 수 있는 동기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법질서 위에 떳떳이 앉아 굶주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일터들이 될 때가 하루속히 와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1975년 12월15일

과연 이 간절한 소망이 이뤄질 것인가.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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