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6.17 월 08:00
상단여백
HOME 피플ㆍ라이프 인물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39] 전태일 5주기 추모의 밤 … 조합원의 자발적 투쟁의 서막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1975년 노동교실 찾기 농성투쟁 직후 낯선 사람 한 명이 이소선의 집에 찾아왔다. 그 사람은 이소선을 은밀히 보자고 하더니 따로 불러냈다.

"어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로…."

"예, 장기표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해서…."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주의를 돌아보고 나서 편지 한 장을 이소선한테 건넸다. 이소선은 어찌나 반가운지 마치 그 사람이 장기표라도 되는 듯 반가워했다. 그 사람은 편지 한 장만 건네주고 인사를 한 뒤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돌아온 장기표

편지를 뜯어 보니 장기표의 글씨가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편지 말미에 부산 태종대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종대에서 만나자는 내용을 끝으로 편지는 짧고도 아쉬운 끝을 맺었다.

'아, 무사했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부산에 가서 숨어 지냈구나. 잡히기라도 하면 죽든지 장기징역을 살아야 될 텐데 용케도 잘 숨어 있었구나.'

반갑고도 안심이 됐다. 이소선은 약속된 날짜에 맞춰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태종대의 지정된 바위를 찾아갔다. 바닷바람이 쌀쌀했다. 드문드문 놀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이 다 돼도 장기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다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이소선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스님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그의 모습은 안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

"아이고, 어머니!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돌아보니 아까 멀리서 다가오던 스님이었다. 목소리가 분명 장기표의 목소리다. 자세히 보니 그 스님이 다름 아닌 장기표였다. 장기표가 중이 되다니! 이소선은 반가움보다도 그가 중이 됐다는 사실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형, 왜 이렇게 됐어?"

"어머니, 괜찮습니다. 가십시다."

장기표는 이소선을 데리고 태종대를 빠져나와 부산시내로 갔다.

길거리에 있는 어떤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가 밥을 시키는데 이소선한테는 고기국밥을 시켜 주고 자기는 백반을 시켰다. 밥을 먹을 때도 자기는 중이라고 밥에다 나물만 먹지 다른 것은 먹지 않았다.

"이 국물에다 말아서 훌훌 마셔."

이소선은 장기표가 안 됐다 싶어 고깃국을 덜어 줬다.

"중이 고기를 먹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욕을 하니까 어머니 혼자 잡수세요."

이소선의 행동에 그는 눈을 끔벅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식사를 끝내고 노조소식을 비롯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해 줬다. 중이 돼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사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누구보다 훤히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얘기해 주는 것이다.

장기표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갈 테니 거처를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와 헤어져 서울로 올라온 이소선은 은밀히 사람들을 만났다. 장기표가 부탁한 말들을 전해 주고 또 그가 기거할 곳을 마련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장기표는 서울에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에 가발을 쓰고 신사복을 입은 탓에 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작은 아들 전태삼이 다니는 공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보문동에 방을 얻어 놓고 공장에 다녔다.

장기표는 '김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조합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조합이 어떻게 운영돼야 하고, 어떻게 투쟁을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얘기했다.

언젠가는 이소선의 집에 한 무더기 찾아온 조합원들과 밤늦게까지 얘기하다 술판이 벌어져 노래도 하고 춤도 줬다. 그런데 신명이 나서 놀다 보니 장기표의 가발이 홀랑 벗겨져 버렸다. 그가 얼른 가발을 주워 다시 쓰기는 했지만 조합원들은 그가 중머리인 줄을 알아 버렸다.

아침에 어떤 노동자가 이소선에게 다가와 은밀히 소근거렸다.

"어머니, 엊저녁에 그 김사장이라는 사람 좀 이상해요.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어디 갔다 나온 사람 아니에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 머리를 깎을 수도 있지.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다."

이소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장기표는 김혜숙의 소개로 중부시장에 있는 공장에 취직했다. 김혜숙의 언니 밑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먹고 자게 됐다.

김혜숙은 평화시장의 노처녀 미싱사다.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리기 위해 돈벌이를 하다 혼기를 놓친 것인데 마음씨가 참으로 고왔다. 어린 시다들이나 자기보다 처지가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동료들한테는 여간 성실하고 신망이 두터운 게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노조활동을 변함없이 꾸준히 했다. 김혜숙은 장기표와 함께 일을 하면서 수배 중인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11월이 다가오면

11월이 다가온다. 11월이 가까워지면 이소선의 몸은 천근만근이 된다. 해마다 전태일이 죽은 날이 다가오면 온몸이 쑤시고 등허리가 시큰거린다. 골은 뭐라고 형언하기 어렵게 무겁고 아파온다.

전태일의 5주기를 앞두고 조합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조합원들은 이번 추모행사만큼은 의미 있는 행사가 돼야 한다고 단단히 별렀다.

현장 조합원들은 1970년 전태일의 장례식에 이어 다음해 1주기 때만 해도 추도식을 규모 있게 치렀다. 전태일의 뜻을 기리고 이를 투쟁의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유신 이후부터는 형식적으로 치르게 됐다. 평소에 이를 안타까워하던 조합원들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꼈다.

노조 집행부의 추도식이 형식적으로 치러진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추도식 행사에 가장 많이 참석해야 하는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참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평일 낮에 그것도 묘소에 가서 식을 하니까 조합원들이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체교섭을 통해 11월13일을 대체휴일로 정해 많은 조합원들이 추도식에 참석했었는데, 이후 대체휴일이 취소되는 바람에 추도식에 참석하려면 결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또한 추도식이 행사를 위한 행사가 돼 가고 있다는 깨우침도 있었다. 이러한 깨우침은 투쟁이 없는 행사라는 것에서 비롯됐다. 전태일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을 호소하는 속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전태일의 죽음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길은 뭐니 뭐니 해도 당면한 투쟁을 가장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처지를 자각하고 자신을 억압ㆍ착취하는 현실에 과감히 맞서 투쟁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것이 전태일의 뜻이었다. 전태일 추도식은 치열한 투쟁 그 자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라 조합원들은 11월13일 노조 집행부가 주최하는 묘소에서 거행하는 추도식과는 별도로 조합원들이 일을 끝내고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인 저녁 8시에 노동교실에서 추도식을 개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청계피복노조에서는 가을이면 해마다 정기적으로 '지부장컵 쟁탈 등산대회'를 개최했다. 등산대회에는 매년 100여명 참가했다. 조합원들의 단합과 조직강화사업의 일환이었다. 그해에는 11월3일 등산대회를 실시했다. 13일 추모행사를 의미 있게 치르기로 계획했던 몇몇 조합원들은 이날 행사를 뜻을 함께하는 조합원을 규합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등산을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고 이에 동조한 믿을 만한 사람들과 별도의 약속을 정해 만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소선과 조합원들은 창신동 낙산시민아파트 박형만 집에 모였다.

모인 사람들 중 몇 명은 그동안 노조활동을 열심히 했던 중견조합원들이었다. 대강 이름들을 기억해 보면 양승조·김혜숙·민종덕·박형만·전인철·김채진·이숙희·차인애·이순자·김복실·배철수·윤현숙 등이었다.

비좁은 방에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이 앉아 있는 가운데 양승조가 오늘 모이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모두 취지에 적극 찬동하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추진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우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주축이 돼 사람들을 규합해서 '전태일 동지 5주기 추모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할 일을 나눠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모임 대표로 양승조를 뽑았다. 모든 업무를 기획하고 선전하는 일은 민종덕이, 대외적인 섭외활동은 이숙희가 맡기로 했다.

조직활동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 모두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 조직활동에 각별히 신경을 쓰자는 결정을 끝으로 이날 모임은 끝났다.

추모위원회 회장을 맡은 양승조는 전태일 친구들의 친구로서 전태일이 죽고 난 직후부터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지난번 노동교실 개관식을 둘러싼 문제 때문에 조합간부직을 내놓고 활동하고 있었다. 추모위원들 중에 유일하게 상근간부를 지낸 사람이기도 했다.

창신동 낙산 시민아파트에서 모인 이후 추모위원회 회원들은 자주 만나야 할 필요가 생겼다. 회원 중 한 사람인 배철수가 광희동에 방을 얻어 놓고 자취를 하고 있어 그 집을 모임장소 겸 연락처로 쓰기로 했다.

회원들은 날마다 일을 끝내고 광희동 배철수 집으로 모였다. 모여서는 밤새도록 토론하고 실무적인 일을 처리했다.

이들은 아침 8시에 공장에 출근해 하루 종일 일했다. 밤 10시나 11시에 퇴근해서는 광희동 배철수 집에서 밤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해가 뜨면 작업을 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지칠 줄 몰랐다. 이들이 이토록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이소선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들이 눈물겹도록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지칠 줄 모르는 저들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코 나이가 젊어서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이소선은 생각했다.

전태일 5주기 추모행사

11월13일.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산화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소선은 아침 일찍 묘소에 갈 채비를 해 놓고 노조사무실에 갔다. 관광차 1대분의 조합간부와 조합원들이 이른 아침의 거리풍경을 가르며 묘소로 향했다. 추도식은 말 그대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묘소에 갔다 온 이소선은 곧바로 광희동 배철수의 자취방으로 갔다.

몇몇 회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행사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추모의 밤 행사를 개최하면 경찰에서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또 노조집행부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들은 제대로 동원할 수 있을까, 행사진행에 실수는 없을까.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느 하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이소선은 이렇다 저렇다 간섭하지 않았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아들 전태일의 추모행사를 놓고 고민하는 그들이 마냥 고맙고 미더울 뿐이었다. 대신 끼니 때 밥을 해 주고 가끔가다 그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 줬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말에 커다란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녁 7시가 됐다. 모두 결연한 자세로 광희동 자취방을 나섰다. 광희동에서 을지로 6가에 있는 노동교실까지는 불과 10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이소선 등 이들이 노동교실에 당도해 강당이 있는 3층 문을 열어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사무실이 있는 4층에 올라가 실장을 만났다. 이들은 강당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노동교실실장은 절차를 문제 삼고 나왔다. 집행부와 한참을 옥신각신하고 나서야 강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회원들은 대회장 정비를 서둘렀다. 강당은 곧 '추모의 밤' 행사장으로 변했다. 정면에는 대회 이름이 적혀 있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 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부로 내걸 수 없는 전태일의 사진이 놓였다. 뿐만 아니라 벽에는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구호들이 여기저기 나붙었다.

저녁 8시를 지나 9시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봐 조바심을 내던 추모위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 행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출입구 쪽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이소선은 잽싸게 출입구 쪽으로 나갔다. 소란이 이는 곳에 가 보니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 박원식이 있었다. 그 뒤에 여러 명의 형사들이 중견조합원들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불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불법이야! 추모행사도 불법집회라면 도대체 불법 아닌 게 아무것도 없겠네."

"아 글쎄, 이렇게 불순한 목적으로 사람이 모이면 불법인 거야!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선동하는 것이 집단행동 아니고 뭐란 말이야?"

이소선은 화가 치밀었다. 부아가 치민 그는 한 형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야, 이 썩을 놈의 새끼야! 너네 집은 애미 애비 제사도 안 지내냐? 죽은 사람 제사 지낸다고 사람들 모인 것이 뭐가 잘못됐다고 시비냐 시비가. 그리고 이 유인물이나 저 구호가 어떻다고 지랄이야? 이 유인물이 박정희를 잡아먹는다고 하든? 저 사람들이 너네 들어엎겠다고 하드냐? 빨리 꺼지지 못해!"

이소선 담당으로 평소에 안면이 있는 박원식이 나섰다.

"아, 이 여사 왜 이러십니까? 흥분하지 말고 얘기를 들어 보세요."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해. 꼭 이 판국에 해야겠어? 빨리 이 자리에서 나가!"

이소선은 삿대질을 해 가며 언성을 높였다. 모여 있던 노동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우우 소리를 내질렀다.

"경찰은 물러가가! 경찰은 물러가라!"

형사들은 할 수 없다는 듯 문 밖으로 물러났다.

경찰들은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건물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명 가까이 모였다.

식이 시작됐다. 양승조가 개회사를 간단히 한 뒤 국민의례와 묵념, 그리고 이소선이 모시고 온 목사님의 추모예배가 이어졌다. 전태일의 수기 일부분이 낭독됐다. 추도사와 추모시가 낭독되면서부터 투쟁적인 분위기가 고조됐다. 결의문을 채택할 때는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노동자들의 투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들은 계속해서 도발을 시도했다. 경찰은 추모위원장·아카시아회장·이소선을 끌어내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그들의 위협에도 행사는 착착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 결의한 사항은 △노동시간단축 △주휴제 이행 △작업환경 개선 △다락방 철폐 △인간적인 대접 △부정축재 일소 등이었다. 특히 "우리 근로자도 사람이다. 근로시간 단축하라"와 "다락을 철폐하라"는 요구는 청계천 노동자들의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요구였다.

공식적인 순서가 끝나자 조합원들은 농성에 돌입할 태세를 갖췄다. 경찰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행사장 밖에서 지켜보던 노조간부들이 "지금 시기는 농성투쟁이 적절하지 않다"며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이소선과 조합원들은 추모식을 하고 투쟁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노조 집행부는 이를 지켜보는 기이한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