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촛불집회 슬로건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미친 소 너나 먹어!”

광장에 나온 여중생들의 외침이었다. 때묻지 않은 청춘들이 만든 슬로건이라 간결하고 직설적이었다. 광우병으로 불안한 국민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연령제한 없이 미국 소고기 수입을 결정한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에 죽비를 내리치는 격이었다. 이처럼 주의와 주장 그리고 비전과 목표까지 압축한 슬로건이 대중에게 미치는 힘은 막대하다. 되돌아보면 시대정신을 반영하거나 국민들에게 영향을 준 슬로건은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등장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못살겠다. 갈아엎자!”라는 슬로건이 그 예다. “미친 소 너나 먹어”에 비견되는 슬로건들이다.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직설적인 구어체로 표현된 것이 공통점이다. 이런 슬로건은 주로 ‘선거 시기’에 나타난다.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선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다. 손학규 후보의 깃발이었다.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향상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을 표현했다. 세상을 꽃 피우는 힘인 ‘노동’을 선거 슬로건의 핵심으로 내세운 셈이다. 노동계가 띄운 “돈보다 생명을”, “비정규직 없는 세상”도 같은 급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슬로건이 노동단체 임원선거에서 제시됐다면 어땠을까. 조합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 최초로 조합원이 직접 선출하는 민주노총 임원선거의 슬로건은 어떨까. 다음달 3일부터 일주일간 치러지는 민주노총 임원직선제에는 4개 후보조가 출마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정파 패권 없는 민주노총(기호 1번)”

“절박하다, 단 한 번의 승리가! 2015년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기호 2번)”

“옳은 길을 간다, 그래야 민주노총(기호 3번)”

“힘 있는 민주노총, 준비된 통합지도부(기호 4번)”

슬로건을 보면 4개 후보조의 문제의식이 담긴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합원이 직접 뽑는 임원선거임에도 슬로건은 대의원 간선제에서 제기된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4개 후보조 모두 대의원 간선제와 조합원 직선제가 ‘선거’라는 형식에선 같다고 생각해서일까. 선거 프레임이나 언어 구사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정파 결정에 따라 특정 후보를 밀었던 대의원 간선제 시절의 선거 슬로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보조의 정책공약 끝말은 모두 ‘투쟁’으로 끝난다. 노동기본권 쟁취투쟁, 연금개악 저지투쟁, 비정규직 철폐투쟁 그리고 조합비 정률제와 사무총국 혁신 공약을 공통적으로 내걸었다. 물론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조의 존재 이유이자 숙명이다. 투쟁하지 않는 노조 지도부는 리더십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투쟁은 목표를 이뤄내는 수단일 뿐 투쟁이 목표일 수는 없다. 하물며 노조지도부를 세워내는 선거가 아닌가. 무릇 선거공약은 후보조의 가치와 목표 그리고 이것을 이뤄낼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녹인 것이어야 한다. 3년 임기 내에 이뤄 낼 정책공약을 우선 순위에 따라 제시하고, 구체적인 방략을 알기 쉽게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조합원 직선제에 나선 4개 후보조의 공약은 이런 기준에선 미흡하다. 대의원 간선제 시절의 관성이 여전하다는 인상이다.

민주노총 임원선거는 앞으로 20여일 남았다. 비록 후보조들이 선거관리위원회에 포스터와 공약집을 제출했다 하더라도 조합원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슬로건과 공약을 다듬어 줄 것을 요청한다. 후보조들의 공약인 ‘사회연대전략,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 민주노총 5대 혁신과제, 민주노총 미래전략 20-20’을 쉽고 간결한 슬로건으로 정리해달라는 얘기다. 적어도 합동토론회와 연설회에 나서는 후보조들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슬로건은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하게 표현해 달라는 것이다. 아울러 정책공약은 백화점식 나열보다 선택과 집중을 해 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후보조마다 내세우는 핵심 공약이 있다면 이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쟁점화하자는 것이다. 인물검증보다 정책공약을 중심으로 후보 간 토론을 조직하자는 것이다.

네달란드 노총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치러지는 민주노총 임원직선제는 조합원들의 열띤 토론과 축제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후보조들은 선거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혁신한다는 자세로 임해 줬으면 한다. 대의원 간선제가 아니라 조합원 직선제답게 치러 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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