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13일 전태일 열사 44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같은날 상업영화로는 최초로 대형마트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영화 <카트>가 개봉했다. 같은날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불법해고 무효소송을 파기 환송함으로써 ‘정당한 정리해고’를 인정해 자본의 손을 들어줬다.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의 외침은 44년이나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가 지키고 싶어 했던 어린 시다들이 오늘에는 인턴·수습·계약직 청년노동자들이 됐다는 점이다.

애초에 정규직 전환계획이 없었음에도 중소기업중앙회는 절박한 상태의 청년들을 기만하며 쪼개기 계약을 강요했다. 통신 대기업 LG유플러스는 악성민원인을 상대하며 매번 진땀을 뺐을 청년에게 판매영업을 요구하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하지 못하게 하는 등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직무스트레스에 시달리도록 했다. 결국 30세의 청년노동자는 "노동청에 알려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 간다. 청년들이 스러져 간다. 도대체 누가 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통해서만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가.

최근 연이은 사건은 몇몇의 ‘불행한’ 사람들이 겪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비극적인 사회의 결과물이다.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더 큰 절망의 징후들이다. 극단의 이윤을 좇는 시장경제의 전횡을 통제하지 못한 운동의 실패, 정치의 실패, 사회의 실패다.

바꿀 수 없으니 참을 것인가, 참을 수 없으니 바꿀 것인가. 청년들에게는 더 이상 포기할 것도 양보할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마음대로 쓰다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우리는 판매실적을 올리는 기계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 전태일들은 이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기업집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동시장 구조에 맞서 싸움을 시작한다.

44주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지난 9일 청년유니온은 민주노총과 함께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당사자들이 블랙기업의 부당함을 직접 제보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blackcorp.kr)를 열었다.

며칠 사이에 30건이 넘는 제보가 들어왔다. 일주일에 하루만 야근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체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습사원 생활, 업무부적응이란 명목의 부당해고, 반복적인 임금체불, 강압적인 조직문화 등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가 모이고 있다. "이런 회사도 블랙기업이 맞나요?"라고 묻는 상담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밤 11시나 돼야 퇴근하는 아들이 쓰려져 죽을까 봐, 도저히 옆에서 지켜볼 수 없는 안쓰러움에 전화기를 든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블랙기업이라는 표현을 듣게 된 순간 이거다 싶었다며 문제를 꼭 해결해 달라고 당부했다.

블랙기업 운동은 개별 문제기업들을 고발하고 마는 일회성 캠페인이 아니다. 블랙기업을 양산하는 노동시장을 규제하고 사회구조를 바꾸는 운동이다. 자기 탓만 하며 스스로를 괴롭혀 온 청년들이 ‘블랙기업’이라는 언어로 기업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견디지 말자. 의심하고 질문하자.

“당신이 다니는 회사는 블랙기업입니까?”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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