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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깃발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많은 깃발이 나부꼈다. 노동조합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깃발을 당당히 흔들었다. 그제, 11월9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44주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4 전국노동자대회'가 서울 대학로에서 열렸다. 신승철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44년 전 전태일 열사가 불꽃이 된 후, 27년 전 노동자 대투쟁이 물결이 된 후, 우리는 투쟁을 통해 인간임을 선언해 왔다고 자부해 왔지만 아직 멀었다”며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저출산·청년실업·비정규직·조기퇴직·노후빈곤은 오늘의 현실이고 당신의 미래”라며 “OECD 저임금노동자 비중 1위, 비정규직 비중 1위, 산재사망률 1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자유로운 해고 등 ‘우수한 기업환경’, ‘노동지옥’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신 위원장은 “지난 19년간 투쟁했던 것처럼 다가오는 20년을 준비하고, 더 넓게 연대하고 더 강하게 단결하자”고 제안했다. 전국 각지에서 노동조합이 자신의 깃발을 들고서 참석했던 그제는 깃발만 나부낀 날은 아니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해 투쟁하겠다고 수많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노동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었다. 당당히 나부끼던 깃발 아래서 이 나라 노동조합의 투쟁 결의를 읽어내고자 했다. 노동자에게 민주노총 위원장의 대회사에 공감하면서 나는 전태일 열사의 투쟁정신을 읽어 내고자 했다. 적어도 이 나라 노동자·노동조합에게는 너무도 심각한 오늘의 현실인 비정규직 문제에서 노동의 깃발을 보려고 했다.

2. 현대차 통상임금이 인기 순위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뉴스 홈페이지에서 나는 현대차비정규직 음독자살 뉴스를 읽었다. 산은 굽이굽이 아픔을 모르고 흐르는데 사람이 사는 세상은 오늘도 통곡이다. 산이 무심한 건가, 사람의 아픔에 무심한 세상인 건가. 뉴스와 그 댓글로 보면 오늘은 비정규직은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정규직이 임금 더 받겠다며 제 밥그릇 더 챙기겠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다고 읽게 되는 세상이다. 10여년간 집중적으로 행해진 보수언론과 권력의 선전공세에 이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대기업 정규직과 노조를 ‘노동귀족’, ‘귀족노조’, ‘사회양극화의 주범’ 등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읽게 되는 무서운 세상이다. 사용자 현대차대리인 김앤장도 통상임금사건 참고서면에서 현대차 노동자인 원고들이 연봉을 1억원 넘게 받았다고 근로소득세원천징수영수 자료까지 제출하며 주장했다. 그런데도 몇 천만원을 더 받겠다고 소송하는 것이라고 회사의 경영사정과 기업경쟁력도, 협력업체 사정도, 국민경제도 생각지 않는 정규직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11월3일 현대차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고 현대차 통상임금소송에서 노동자가 이겨야 이 나라 전체 노동자에게도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될 수 있으며 그래서 현대차 판결이 중요하다는 현대차 활동가의 기고가 매일노동뉴스에 게재됐다. 현대차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주장과 근거는 현대차 노동자 대리인으로서 내가 준비서면에서 주장한 거였다. 그랬으니 이 기고에서 이 나라 1천600만 노동자를 위해서라는 부분이 김앤장 참고서면의 주장과 내 머리에서 뒤섞였다. 현대차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줘야 현대차 계열사 협력업체 그리고 중소사업장도 포함시켜 줄 수 있다고 했다. 올해 임단협 단체교섭에서 현대차그룹의 회사들과 그 협력업체의 사용자들은 ‘현대차가…’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현대차가 문제라고 노동조합도 노동자도 여기는 지경이 됐다.

3. 2014년 오늘은, 비정규직 문제를 빼면 노동운동이 아니다. 얼마 전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번 민주노총 위원장 등 임원 직선제선거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를 주되게 내걸어야 한다고 한 인터뷰를 뉴스에서 읽었다. 또 얼마 전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 이번 민주노총 직선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내걸고 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뉴스도 읽었다. 지금 이 나라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노동자권리를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한 말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현대차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정규직 전환에 절망하며 자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민주노총 조합원 다수는 정규직이다. 다수인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에 나설 수 있도록 이번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에서 적극 제기하며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구분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의 문제이다. 제 사업장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고용 형태가 도입돼 있는 것이고 비정규직이라는 차별받는 노동자신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규직이 노동조합으로 담장을 세워서 제 권리를 지키려고 해도 이미 사업장에 불안정하고 차별받는 노동자의 지위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그 담장이 정규직 지위와 권리를 지켜 낼 수 있는 담장이 될 수 없다.

노동자가 개별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노동조합이었다. 자본의 세상에서는 노동은 집단이어야 자본을 상대로 협상해서 노동자권리를 확보해 낼 수 있었다고 노동운동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확보한 노동자권리라면 노동자를 구분 짓는 것으로는 지켜질 수 없다. 비정규직이든 뭐든 구분 없이 노동자는 집단으로 하나여야 제 권리를 확보해서 지켜 낼 수가 있다. 사실 비정규직을 구분 짓고서 지켜질 수 있는 노동자권리는 사용자가 정규직에게 허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많은 임금·성과급이거나 비정규직이 아닌 고용안정이다. 그것이 전부다. 무슨 새로운 노동자권리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다. 사업장권력에 복종하는 숙명이 노동자라고 오늘도 임단협 협정서에 노동조합의 이름을 쓴다. 노동자의 숙명을 넘어설 의지도 없고,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도 없다. 경영권은 신성불가침의 자본의 영토로 남아있다. 노동자·노동조합은 한발자국도 침범할 의지도 인식도 없다. 그러니 문제는 오늘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이 새로운 노동자권리를 제기해서 관철할 의지가 없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것이 노동운동의 과제라는 것조차 잊어 버려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본과 권력이 고용불안과 차별하는 비정규직이라는 낡은 도발에 대해 부질없이 담장이나 쌓으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인 것인지 모른다.

4. “OECD 저임금노동자 비중 1위, 비정규직 비중 1위, 산재사망률 1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자유로운 해고 등”의 ‘노동지옥’은 어제, 그리고 오늘 나부끼는 노동의 깃발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무직과 생산직으로 구분 짓고서 자신의 깃발을 흔들어 온 이 나라 노조운동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노동자대회장에 나부끼는 깃발은 정말 많다. 노조 깃발수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제각각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있으니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노조 깃발이 많이 나부낀다. 그러니 단결의 깃발은 아니다. 깃발의 수만큼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는 데서도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노동자대회장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보여주고 있다. 제 이름 위에 거창하게 산별노조를 새겨 넣었다고 단결의 깃발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는 그 많은 노동의 깃발이 나부끼는가. 새로운 노동자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노동운동이 전개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제각기 자신의 깃발을 들고서도 얼마든지 기왕의 권리를 지켜 갈 수는 있기에 그런 것 아닐까. 이런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든 깃발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깃발은 노동자권리를 위한 투쟁의 크기를 말해 준다. 이 나라에서는 협소한 조합원의 범위로도 확보하고 지켜낼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권리만 노동자의 것이란 걸 말해 준다. 수많은 노동조합이 체결한 단체협약서를 읽어 보라. 수십 년 이 나라 노조운동의 성과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당신은 읽을 수가 있다. “OECD 저임금노동자 비중 1위, 비정규직 비중 1위, 산재사망률 1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자유로운 해고 등”의 ‘노동지옥’은 그런 노조의 깃발 그늘 아래서 이 나라 노동자의 처지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저출산·청년실업·비정규직·조기퇴직·노후빈곤”이라는 암담한 오늘의 현실이고 미래가 노동자들에게 펼쳐지고 있다. 이것은 지난 19년의 민주노조운동에도, 아니 어쩌면 그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이 나라 노동현실이다. 그러니 “지난 19년간 투쟁했던 것처럼 다가오는 20년을 준비”해서는 극복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더 넓게 연대하고 더 강하게 단결”할 수 있는지는 고민할 일이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자본에 맞서 새로운 노동자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이 나라 노조운동이 나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더 크게 단결하기 위해선 더 높은 노동자권리를 노동의 깃발에 새겨 넣어야 할 일이다. 노동의 깃발은 단결의 깃발이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김기덕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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