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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37]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피맺힌 한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문정현 신부(2007년 10월). 민종덕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 관련 상고자 39명의 형량을 원심대로 확정했다. 이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8명(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여정남)이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사형이 확정된 이튿날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은 목요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소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요기도회에 참석했다. 어제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뜻에서 모두가 검은 리본을 달았다.

사형 확정 이튿날 집행, 시체마저 빼앗겨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전창일씨 부인이 사건 경위를 발표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석방운동을 해 주셨는데, 인혁당 사건 8명의 목에 기어이 밧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우홍선씨는 가족면회도 하지 못했습니다. 육영수를 죽인 문세광도 가족면회를 시키고 죽였다는데,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사형당하기 전날까지 쫓아다녔는데 우리도 그때까지 죽인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어떻게 생사람을 잡아다가 그렇게 전격적으로 죽일 수가 있습니까. 형이 확정된 다음날 집행할 수밖에 없는 저들, 그들은 스스로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증명한 셈입니다.

어제 교도소로부터 통보가 와서 가족들이 구치소로 갔습니다. 서울구치소로 갔더니 구치소 넓은 홀이 텅텅 비어 있고 정보부 요원들만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놈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놀면서 돈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우홍선씨의 부인, 김용원씨의 부인은 개인적으로 시체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집이 대구인 다섯 분의 시체는 대구까지 모시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세웅 신부님과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가족들이 의논한 끝에 함세웅 신부님이 계시는 응암동성당에서 합동장례식을 하고 명동성당 공동묘지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합동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시체를 탈취해서 가족들을 따돌리고 대구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시체들은 다 빼앗기고 송상준씨 부인만이 시체를 빼앗기지 않고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응암동성당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응암동 삼거리에서 경찰들이 앞뒤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가 말을 합니까. 저들은 죽여 놓고도 합동장례식마저 못하게 시체를 빼돌렸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하나 남은 시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가 주세요!”

그녀의 호소는 애절했다. 피눈물을 토해 가며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은 기도회에 자리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호소가 끝나자마자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응암동으로 향했다.

전창일씨의 부인이 얘기한 대로 응암동 삼거리에는 사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고, 한 어린 여학생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학생은 경찰들을 향해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소선은 그만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때 마이크로버스 한 대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버스에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소선과 몇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가서 마이크로버스를 가로막았다. 버스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나중에 알고 봤더니 시체를 태운 버스를 경찰이 빼앗아 화장터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소선이 멈춰 선 차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땅바닥에서 돌을 주워 들어 유리창을 깨 버리려고 덤벼드니까 차 안에 타고 있던 놈이 왜 그러느냐면서 문을 열었다.

몸으로 막는 문정현 신부 위로 달린 버스

이때를 놓칠세라 얼른 차 문을 열어젖히고 올라가니까 검정칠을 한 관이 놓여 있었다. 무슨 노끈 같은 것으로 두어 번 엉성하게 묶여 있었다. 이소선은 손에 들고 있던 돌로 관을 마구 내리쳤다. 날치기로 만든 관이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다. 관을 열어젖히니 죄수복을 입은 채로 죽은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버지 여기 있다!”

“○○○ 아버지가 맞다!”

이소선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서 관을 차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는데 뒤에 있던 경찰이 차 밖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소선은 죽을힘을 다해 버티면서 연신 “○○○ 아버지가 여기 있다”고 소리 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이크로버스를 에워쌌다. 그러자 기동경찰들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경찰들은 그들을 밀어내고 차를 뺏으려 들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한동안 실랑이가 계속됐다.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경찰은 사람들을 밀어내고 차를 움직였다.

“이 자리가 내가 죽을 자리다.”

문정현 신부가 시동이 걸린 버스 앞으로 달려가 큰 대자로 누웠다. 경찰은 버스 앞에 누워 있는 문정현 신부를 무시하고 버스를 움직였다. 버스 바퀴가 문정현 신부의 다리 위로 달려들었다.

이소선은 눈을 가렸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자 시뻘건 피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들 경악했다. 어떻게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버스를 달리게 한단 말인가. 그들은 앞을 가로막은 경찰을 밀었다. 그러나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 탓에 경찰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집게차가 나타났다. 집게차는 버스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발을 구를 새도 없이 화장터로 사라져 갔다. 이소선은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직접 목격하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놈들은 사람 알기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희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문정현 신부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리를 크게 다치긴 했으나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그 피맺힌 한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이소선은 인혁당 사건 가족들을 보면 너무도 가슴이 아파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지만 능력의 한계 때문에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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