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공인노무사
(금속노조 법률원)

삼성반도체, 재생불량성빈혈과 뇌종양 업무상재해 인정

2014년 8월21일 삼성반도체 생산공장에서 백혈병이 발병한 근로자에 대해 업무상재해를 인정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이어 11월7일 서울행정법원도 같은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하다 재생불량성빈혈과 뇌종양 진단을 받은 노동자 2명에 대해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했다.

삼성전자는 하나쯤 제품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국내 최고 기업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6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최근 연달아 법원으로부터 업무상재해라는 판단이 이어지고, 이건희 회장의 병고가 깊어지면서 반올림과의 협상에 나섰지만 전자산업의 밑바닥에서 수많은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제조공정뿐 아니라 수리공정서도 중증질환 발병

지금까지 반도체와 LCD부문에서 직업병 신고가 접수된 것은 160여건이다. 그중 사망자만 70여명에 이른다. 그런데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 근무하는 수리기사들이 2013년 노조를 설립하면서 사업장 내부에 곪아 있던 산업재해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그 제품을 분해·세척·수리하는 AS공정의 노동자들 역시 유사한 중증질환을 앓아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외관상 하청구조에서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겪는 AS 노동자들은 일을 하다 화상이나 골절·추락사고를 당해도 산재신청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각종 유기용제에 노출돼 수십 년간 일했으면서도 중증질환에 걸리면 업무상재해로 보상을 받기는커녕 곧바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2014년 10월 산재신청을 하게 된 이현종씨도 삼성전자서비스 동대전센터에서 20여년 가까이 환기장치도 없는 비좁은 작업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삼성전자 제품을 수리하기 위해 납땜작업을 하고 시너 등 유기용제를 사용하다 루게릭병이라는 희소질환을 얻었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이라는 다소 긴 병명을 가진 루게릭병은 감각신경은 건드리지 않고 대뇌 및 척수의 운동신경원만 선택적으로 파괴되는 진행성 질환이다. 흔히 <내사랑 내곁에>라는 영화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루게릭병은 일단 발병되면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없다. 운동신경원의 퇴행이 지속적으로 진행돼 환자의 50%가 발병 시점에서 3~4년 내에 호흡부전으로 숨지는 무서운 질병이다. 이씨는 2012년 2월 다리에 힘이 빠져 자주 넘어지고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지자 요추 이상으로 생각하고 병원 진료를 받다가 루게릭병 확진을 받았다.

루게릭병 발병의 직업적 요인은 납·수은 등의 중금속과 농약·유기용제·전자기장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환기장치가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은 작업장에서 납땜작업과 유기용제를 사용한 세척작업을 했다. 과거 삼성전자는 납성품으로 제품을 생산했고, AS 노동자 역시 수리를 위해 제품을 분해하고 세척 및 납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납성품에 노출됐다. 또 세척용 유기용제 역시 발암성 시너를 사용했다.

특히 AS 노동자들은 제품분해와 성능확인 과정에서 잔류전기로 인한 감전, 케이블이 벗겨진 전선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상시적으로 전자파에 노출되고 감전과 전기쇼크 사고를 빈번하게 겪었다.

또 하나의 가족을 위해 삼성이 해야 할 일

삼성전자서비스는 올해 서비스품질평가에서 가전 AS부문 4년 연속 1위, 휴대전화 AS부문 3년 연속 1위 기업에 선정됐다. 이씨를 비롯한 AS 노동자들의 장시간·고강도 노동에 기반한 성과다.

전국의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은 삼성전자의 유니폼을 입고 일한다. 이윤추구에 눈이 먼 삼성전자가 제품서비스를 외주화하고 AS노동자들의 안전관리를 나 몰라라 한 결과가 고스란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가 산재신청을 하고, 삼성전자서비스센터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알리자 곧이어 직업병 제보가 이어졌다. 삼성전자서비스 동대전센터에서는 올해만 2명의 노동자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른 센터에서도 백혈병이 발병하고 루프스라는 희소질환과 백반증, 혹은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혈관성질환에 시달려 왔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감각과 의식은 너무도 또렷하지만 운동세포만 서서히 죽어 가는 병. 이씨는 3년의 투병을 거치면서 이제는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됐다.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씨가 산재신청을 하게 된 것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될수록 오히려 또렷해지는 정신으로 세상에 알려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간접고용이라는 불안 속에서, 당일 당일의 미결률에 따른 실적관리의 그늘 속에서, 20여년의 직장생활 동안 제대로 된 연차휴가를 써 보지 못하고 일했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 달라고,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를 동료들에게 이제는 용기를 내라고. 삼성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라고. 그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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