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독일 대학은 무상교육이 기본입니다. 학생증 하나로 지역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요. 24시간 일하는 한국과 달리 다들 저녁 8시면 가게 문을 닫습니다. 사회복지 수준이 높고 소비자보다는 노동자가 중심이라는 것을 체감했어요. 중요한 것은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동력이 강력한 노동운동이라는 겁니다."

지난해 10월 독일로 떠난 이주호(50·사진)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이 돌아왔다. 이 단장은 1년 동안 국제노동기구(ILO)와 한스뵈클러 재단(FES)·독일노총의 후원으로 독일 카셀대학(Kassel)·베를린 경제법학대학(Berlin School of Economics and Law)에서 '노동정책과 세계화'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넘게 보건의료노조에서 활약하며 노동계 정책통으로 불리던 그가 독일에서 보고 고민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매일노동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이 단장은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급한 일은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한 노동운동의 재구성"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복지중심 사회, 노조가 토대

그는 독일의 수준 높은 복지시스템의 동력으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통한 노동자와 진보정당의 정치참여를 들었다. 높은 세금과 사회보험료, 노동운동도 핵심 요소로 지목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국가예요. 월급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내죠. 건강보험 부담률은 15%, 국민연금 부담률은 19%나 됩니다. 한국은 독일의 절반에도 못 미쳐요. 재정이 뒷받침되니 사회공공서비스가 튼튼하게 유지되는 거죠. 그런데요, 그 뒤에는 위력적인 산별노조의 투쟁이 있어요. 이런 점들은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독일 노동운동은 산별노조와 종업원평의회라는 이원화된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산별노조는 공장 밖에서 대정부교섭과 산별교섭을 맡는다. 독일 통합서비스노조 베르디(Ver.di)는 조합원 200만명을 포괄하는 거대 산별노조로 정부정책과 노동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학생이나 비정규직·퇴직자들도 가입할 수 있는데, 그들의 비중이 전체 조합원의 20~30%에 이른다. 경찰과 소방관이 노조를 결성하는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도 노조활동을 보장받는다.

공장 안 질서는 종업원평의회가 주도한다. 노동자의 임금·복지뿐 아니라 노사공동결정제도를 통해 기업의 경영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종업원평의회가 투명한 기업경영을 견인하고 이것이 노동자 복지로 연결되도록 합니다. 산별노조는 산업정책에서, 독일노총 같은 총연맹은 국가시스템 전반에서 복지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죠.

노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나쁘지 않아요. 한번은 버스가 1시간 동안 오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노조가 파업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시민들이 단 한 명도 불평을 하지 않아 놀랐습니다. 언론을 봐도 파업을 하니까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정도의 안내만 하더군요.”

독일 산별노조의 정치참여·현장활동 주목해야

이 단장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쇳말은 네 가지였다. 이른바 독일 산별노조를 통해 본 한국의 노동운동이다. 그가 첫 번째로 꼽은 것은 한국식 산별노조 활성화다.

"한국은 과거 독일식으로 무조건 거대 산별노조를 추구했지만, 이제는 우리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산별로 묶이는 단위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면서, 무조건 산별 총파업만 고집할 게 아니라 다양한 교섭방법과 투쟁전술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요."

노조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로 이 단장이 제시한 두 번째 열쇳말은 정치제도 혁신이다. 그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간단히 얘기하면 정당 득표율로 지역구 의석을 결정하는 방식의 선거제도다. 정당이 득표수대로 의석을 차지할 수 있어 우리나라 진보정치세력이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 제도다.

이 단장은 “독일은 2000년대 초반 국회의원의 70%가 노조 출신이었을 정도로 노동자 정치참여가 활발하고 그로 인해 노동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높아졌는데 우리는 이런 창구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종 노동재단의 활동에 주목했다. 노동재단은 그가 제시한 세 번째 열쇳말이다. 노동재단이 노동운동의 사회적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이를테면 독일노총이 출자한 한스 뵈클러 재단은 노동시장과 거시경제 정책을 연구하며, 각 노조들의 단체협약을 모아 분석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한다. 노동재단은 학생들을 지원하는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다.

이 단장은 “노동재단·노동대학원·노동언론 등 노동운동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조직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독일 산별노조의 '현장강화 운동'을 강조했다. 예로 든 것은 베르디의 '찬스(Chance) 2011'이다. 2001년 독일의 5개 산별노조 조직이 통합하는 과정에서 조합원이 300만명에서 2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노조 재활성화 전략이 논의됐다. 노조와 현장의 거리를 좁히는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조합원을 늘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베르디의 보건의료분과의 경우 사업을 시행한 뒤 조직률이 1~2% 상승했다. 베르디는 현재 2단계 전략으로 '찬스 2015'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 단장은 “한국에서 현장강화는 구호에 그칠 뿐 기승전결을 가진 구체적 사업계획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며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노조 조직강화, 대내외적 연대전략 필요

그가 제시한 현장강화 전략은 노조 조직률 높이기로 이어진다. '노조 조직률 30%' 달성이 그것이다. 이 단장은 "조직률은 노동운동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이라고 강조했다.

"세월호 정국에서도 노조의 힘은 약했고, 국민은 노조에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노조 조직률이 너무 낮아 한국 사회에서 순기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조직률을 30%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노조뿐만 아니라 각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선 국회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노조를 쉽게 만들고, 누구나 노동 3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 한국이 노동존중 복지국가로 가는 경로가 될 겁니다. 경제민주화와 사회공공성 강화도 조직률을 높이는 것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단장은 "민주노총 대기업노조들이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공장노조가 사회공공성을 높이는 싸움과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의 싸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독일 폭스바겐 공장의 경우 본사 종업원평의회가 세계 각국 폭스바겐 공장 노동자들과 국제 노동기본협약을 준수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었어요. 대기업들이 더 싼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추세입니다. 우리도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략적으로 대응할 때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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