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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36] 기도회와 재판정에서 만난 사람들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가족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해 당국의 사건조작을 폭로하고, 구속자 석방운동과 민주회복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민청학련에 관련된 학생들은 법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을 수사기관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전남대 김정길은 수사기관에서 ‘김일성 만세’라고 자꾸 쓰게 해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나중에 그것이 조서에 들어 있더라고 말했고, 김지하·나병식 등 관련 인사와 학생들은 수사 과정에서 받았던 살인적인 고문행위를 전부 폭로해 국내외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74년 9월7일 오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급 48명과 두 일본인 등 50명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로 선고공판을 열었다. 군법회의는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 징역 12년 이상 20명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74년 4·3 사건 발생일로부터 10개월12일 만인 75년 2월15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과 학원관계자 4명을 제외한 148명이 출옥했다.

유신독재를 유지하려 사건을 조작한 탓에 국내외 여론에 밀려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목요기도회에서 배운 ‘양심·정의’

이소선은 이 무렵부터 목요기도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목요기도회는 유신정권 시절에 재야 민주인사들이 모여 '기도회'라는 형식을 빌려 인권문제를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강력한 반정부 집회 중 하나였다.

유신 때는 반정부적인 집회를 합법적으로 개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됐든 구교가 됐든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앞장서 기도회 형식으로 반정부 집회를 가졌다. 목요기도회는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정기적인 기도회였고, 그 밖에는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당면한 사안에 따라 기도회가 열렸다.

이소선이 목요기도회를 비롯해 각종 기도회에 빠짐없이 나가게 된 이유는 전태일 사건 이후 학생들과 종교인·지식인들이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싸워 준 것이 고마워서였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실제로 기도회와 민주인사 재판정에 방청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소선은 기도회에 가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례를 생생하게 들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도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투쟁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속된 민주인사들의 재판정에 방청을 가서 그들이 당당하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묶이고 갇힌 자가 죄인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이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한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김지하가 재판을 받는 것을 보니까 ‘말뚝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김지하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 조목조목 맞는지 그날 이소선은 양반집 하인인 말뚝이를 통해 분배의 정의를 알게 됐다.

함석헌 선생이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을 때의 일이다. 함 선생은 스스로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삼베옷을 곱게 입은 채로 재판장 앞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재판장, 내 말 들으시오. 지금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당신이 재판하지만, 역사는 당신들이 죄인 되는 날이 올 것인데 두렵지 않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올바로 말하는 사람들을 죄수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할 것 같으면 당신네가 죄인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앉아서 재판을 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오.”

서슬 퍼런 유신정권을 향해 함 선생은 준엄하게 심판을 내렸다. 이소선은 기도회나 재판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가지고 밤에는 노동조합에 와서 조합원들한테 열심히 얘기를 해 줬다. 귀중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한테 전달해 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조합원들을 항상 데리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들은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들은 다음 그들에게 전해 줘야 했다.

정권 분리조치에 고립무원 된 인혁당 사건

목요기도회에 다니면서 보고 들은 안타까운 사례 중 하나가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애초 64년 8월 "북한괴뢰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소위 인민혁명당의 정체를 전 국민 앞에 밝히는 바"라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발표에 의해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검사가 공소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거나 공소가 취하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고 몇몇 사람만 비교적 무겁지 않은 실형을 받았다.

그런데 10년 후인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과거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또다시 연루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고,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기도했다는 이유로 2·15 석방 때 제외됐다.

이소선은 인혁당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가 일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분리해서 조치하고, 언론이나 사회여론도 이러한 정부의 의도에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석방운동도 따로따로 하게 됐다. 심지어 재야 민주인사들마저도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별종으로 치부하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호소문을 써 들고 기도회에 나와서 읽겠다고 사정하면 사회를 보는 사람이 순서에 넣어 줄 수 없다고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기도회나 집회에 나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물론 정식순서로 참가하는 게 아니라 폐회한 뒤 마이크를 잡고 호소하는 식이었다. 어떤 때는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나타나 호소하려고 하면 신부나 목사들이 그들을 피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얘기 좀 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게 됐는데, 말도 못하게 합니까?”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외면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인혁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남편들 재판정에서 어느 날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우리한테 붙었는데, 우리 남편은 그냥 순수한 모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난 모의라고 해서 조작해 낸 것입니다.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며, 사회에서 뚜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누가 석방운동을 해 주지도 않을 그런 사람들만 끌어모아다가 없는 죄를 덮어씌운 겁니다.”

그들의 처절한 호소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소선 역시 이러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은 그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싸우는 곳에 가서 함께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훌륭하신 목사님과 신부님 몇 분, 그리고 민주인사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고, 고통 당하는 가족들한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하면서 그들에게 힘이 돼 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의 억울한 사정을 구구절절이 적은 호소문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었다. 호소문을 읽어 나가면서 이소선은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굳건히 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호소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고, 석방운동이 활발해지자 중앙정보부가 가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씨의 부인 임인영씨의 얘기다.

수사관들 호통친 임인영씨

나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이 재판정에서 그렇게 억울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래도 이 사람이 뭔가에 연루돼 있으니까 정보부에서 묶지 않았겠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기징역을 살 정도면, 저들이 남편에 대해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항상 들었다. 나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서 애 아빠를 취조한 수사관을 붙들고 남편에 대한 것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차차 굳혀 갔다.

그래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호소문을 더욱 과감하게 써서 배포하고, 고문에 대한 것도 폭로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잡으러 오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청량리경찰서 담당직원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는 남편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형사들이 난처한 듯 머뭇거리다가 “저 아줌마, 중앙정보부에서 좀 모시고 오래요”라고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 데리고 오래요?”라고 물었다. 형사들이 그렇다고 대답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고 가야지. 얘들아, 나 빨리 갔다 올 거다” 하고는 형사들을 따라나섰다. 나의 그런 태도에 오히려 형사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중앙정보부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당황해하거나 ‘왜 데려가려 드느냐’고 버티며 몸싸움이라도 한바탕 해야 하는데, 되레 반가워하면서 따라나서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갔다. 처음에는 혼자만 잡혀 들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같은 시간에 인혁당 사건 관련 가족 10여명이 동시에 연행됐다. 대구에서도 잡아오고 서울에서도 잡아들이고 해서 여자 10여명을 데려온 것이다. 연행돼 와서는 각자 다른 방에 있었으니까 서로 그런 줄을 몰랐다.

잠시 기다리니까 과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까맣게 생긴 사람이었다.

“흥, 빤빤하게 생겨가지고….”

그 사람은 대뜸 반말지거리를 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점잖은 태도로 학교를 어디 나왔냐고 물었다. 내가 몇 마디 대꾸를 해 주자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이어 취조관이 들어왔다. 취조관이 나를 취조하려고 들기에 나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내 남편 취조한 취조관을 데려오시오.”

“아이구 아줌마, 아저씨 취조한 사람은 데려다 뭐하게요? 우리하고 얘기합시다.”

나는 공책 3페이지 정도 되는 공소장을 달달 외우고 있던 터에 취조관에게 항의하듯 따지고 들었다.

“우리 아저씨가 재판정에서 한 얘기도 있고, 공소사실을 보면 3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무기징역이 뭐야!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자, 봐라. 무슨 책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중에서 파는 책이야. 다방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 다방에 가 봤다. 가 보니까 의자가 요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거기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해? 정신이 빠진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서 국가를 변란하기 위한 모의를 할 수 있겠어? 거기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이 오면 차 마시고 식사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래 당신들은 그런 데서 국가변란 모의를 하냐?”

내가 얘기하는 동안 취조관은 내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전창일에 대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봐. 그러면 나는 석방운동 안 해. 너희들이 당장에 증거를 대고 전창일이 의심스러웠던 것만 대면 석방운동 안 해. 그러니까 빨리 데려오라고.”

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니까 밖으로 나갔던 과장이라는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과장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떠들어? 저거 맛 좀 봐야겠네?”

과장이라는 사람이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내가 그들의 협박에 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왜 고문을 해서 조작했냐? 누가 너희들에게 고문을 해서 빨갱이 만들라는 권한을 줬어?”

과장은 싸늘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저것 진짜 혼 좀 내야겠네. 저년 당장 고문실로 데려가!”

“그래, 내 남편이 받았다는 고문, 나도 받아 보는 게 소원이다. 가자 가.”

과장이라는 사람하고 취조관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나의 태도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고문실로 데려가지 않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비교적 공손한 태도로 취조를 했다.

“아주머니, 자꾸 남편이 억울하다고 하는데 남편 공판기록을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가져와 보세요. 한번 봅시다.”

취조관이 캐비닛에서 공판기록을 꺼내 전창일 부분을 펴서 보여 줬다. 그것을 보니까, 판사가 "국가변란을 모의했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네, 했습니다"로 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질문들도 재판정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전부 "네, 했습니다"로 뒤집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수병씨를 맡은 조순갑 변호사가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전해들을 때는 설마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눈이 확 뒤집혔다.

“아니,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변호사님이 말하더니 이것 좀 봐! 법정에서 ‘우리는 국가변란 모의가 뭔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것을 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이게 뭐야! 다 했다고 돼 있잖아. 당신들, 이런 짓까지 해도 되는 거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

내가 펄펄 뛰며 몰아붙이자 취조관은 얼른 공판기록을 덮어 버리고, 그 얘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같은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공판기록을 조작한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 취조관은 조작사실을 모르고, 그 기록을 보여 주면서 나를 설득해 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3일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그런 식으로 싸워 나갔다. 내가 워낙에 강력하게 싸운 탓인지 조사 기간 내내 비교적 예우를 받았다.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린 가족들


임인영씨와는 달리 다른 가족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고 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씨의 부인은 치 떨리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

그는 정보부에 끌려가자마자 온갖 더러운 욕설을 들어야 했다. 특히 미국인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한국의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두고 그들은 “그 미국놈들을 왜 쫓아다니냐?” 며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욕을 했다.

○○○씨 부인은 그때 오버코트를 입은 채 연행됐는데, 멱살을 잡고 얼마나 세게 흔들었는지 나중에 석방돼서 나온 뒤에도 목 언저리에 멱살 잡힌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런 폭행을 처음 당해 봤기에 그녀는 너무도 놀라 기절까지 했다. 취조 과정에서 너무도 숨이 차고 목이 타서 그녀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하얀색의 물을 가져다주더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물인 줄만 알고 반쯤 마셨는데, 물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성욕이 솟구치는데 못 견딜 정도였다고 했다. 물에다가 흥분제를 탄 것이다. 견딜 수가 없어 바닥에서 막 데굴데굴 구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보부 요원들은 자기네끼리 짐승처럼 웃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자, 네 남편은 간첩이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네 남편은 간첩이라고 써라"고 강요했고, 그녀는 강요에 못 이겨 남편이 간첩이라고 진술서를 쓰고 말았다.

○○○씨 부인은 그런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거짓진술서를 쓴 것이 가책이 돼 석방된 뒤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하며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자기가 남편을 간첩이라고 진술서를 써 줬기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남편의 사진을 다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고통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했겠는가. 그녀의 진술을 마저 살펴보면 한 가정이 얼마나 잔인하게 부서졌는지를 알 수 있다.

“남편의 사진을 불태우고 나서 나는 애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쥐약을 사 왔다. 쥐약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몰래 먹인 뒤 나도 먹고 죽으려고 했다. 방안에 애들 셋을 앉혀 놓고 약뚜껑을 열었다. 쥐약을 먹이려고 하니까 애들이 눈치를 채 버렸다. 내 태도가 이상했던 것이다. 큰아이가 ‘엄마, 그게 뭔데’하고 물었다. 그런 와중에 쥐약이라는 걸 눈치챈 애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안 먹어, 안 먹어! 우리는 안 먹을 거야. 왜 쥐약을 먹이려고 해.’

나는 막 울면서 애들에게 얘기했다.

‘먹어야 돼. 이리 와, 이것 먹고 우리는 다 같이 죽어야 돼.’

그러면서 나는 애들한테 강제로 약을 먹이려고 했다. 애들하고 서로 울면서 실랑이를 벌이는데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내게서 약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전부 다 끌어안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씨 부인은 그 뒤 임인영씨 등 인혁당 가족과 양심 있는 성직자, 그리고 재야인사들의 위로와 관심으로 용기를 얻어 자신이 당했던 사실들 폭로하고 목요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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