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9월8일 청계피복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장기표씨. 민종덕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공포에 숨죽이던 어느 날 밤이었다. 동네 전체가 깊은 잠에 떨어진 시간에 낯선 손님이 소리 없이 이소선네 방으로 찾아들었다. 인기척에 전깃불을 켠 이소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국에 수배가 떨어지고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장기표가 이소선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이소선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잡히는 즉시 사형을 당할 사람이다. 사형이 아니라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평생을 지옥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사형이든 무기징역이든 그가 경찰에 잡히는 순간부터 이소선은 영원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배된 장기표, 이소선을 찾아오다

장기표는 전태일 사건이 났을 때 그 사건을 학생운동과 결합시키는 투쟁을 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전태일 사건 이후로도 그는 학생운동과 관련해서 늘 쫓겨 다니거나 구류를 살았다. 1972년 5월에는 소위 ‘국가내란음모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사건에 관계돼 구속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었던 탓에 재판이 흐지부지돼 그는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나왔다. 이처럼 구속·구류·수배의 연속에서도 그는 청계피복노조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밖에서 이소선과 조합 간부들을 만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로 가르쳐 주고 문제가 생기면 토론을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갔다. 사용주들 세금투쟁 때 노동조합끼리 똘똘 뭉쳐 투쟁에 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거나, 한영섬유의 김진수 사건이 났을 때 이소선한테 그 사건의 내막을 알려 주면서 김진수 어머니와 함께 싸워야 한다고 부추긴 사람도 장기표였다.

처음에 이소선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이 뭔가 옳기는 옳은 듯싶었으나 우리같이 못 배운 사람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정치색을 띤 수준 높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이 차원이 다른 내용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나 서민들의 문제를 가지고도 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기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우수한 두뇌로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나와서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지만 일찌감치 그런 것 다 때려치우고, 불의와 맞서 투쟁하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고난의 길을 택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전태일이 죽었을 때 명동의 삼일다방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가끔 만난 사이였고 수배를 당했을 때는 지금처럼 경찰의 눈을 피해 이소선의 집에 찾아오기도 해서 이소선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소선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가 입을 뗐다.

“어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일이라도 좋으니 빨리 얻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종인이·승철이·승조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나직했다.

“갑자기 방을 어떻게 얻어?”

“어머니가 어디 아는 데 가서 얻을 수 없겠소?”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보고 얻어 볼게.”

장기표는 안도가 되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당부하듯 말문을 이었다.

“어머니, 저 방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도록 하고 어머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았어.”

방학동 동료 집사집에 은신처를 마련하다

장기표는 이소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창문을 넘어 공동묘지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말도 듣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소선은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적셨다. 이소선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지금 어둠을 가르고 사라지는 그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고 언젠가는 이 짙은 어둠을 이기는 빛이 되리라는 믿음을 되새겨 봤다

이소선은 이리저리 궁리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을 당장 어디 가서 어떻게 얻어야 할까. 고민 끝에 방학동에 살고 있는 집사님의 방을 생각해 냈다. 자신도 집사니까 같은 교회의 집사로서 사정을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튿날 일찌감치 집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집사님, 대구에 사는 우리 조카가 공무원시험을 봐야 한다면서 고모인 나한테 방 하나만 얻어 달라고 해서 왔는데, 방이 있으면 하나 빌려 줄 수 없겠소? 시험만 끝나면 내려간다고 하니까 집사님네 학생이 쓰는 방을 좀 빌려 주면 좋겠는데요.”

집사님은 보증금을 안 주는 대신 월세를 꽤 많이 주겠다고 하니까 솔깃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의 남편이 공사판에 다니는 탓으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소선이 돈을 갖다 주면서 한 달을 살든 두 달을 살든 하여튼 공무원시험만 보면 방을 비워 주겠다는 조건으로 장기표는 그 집에 이사해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하기는 했는데 사방이 경찰과 방법대원으로 완전히 포위되다시피 해서 위험천만이었다. 하루는 수배전단 하나가 그 집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전단에는 장기표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똑똑히 적혀 있고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이소선은 불안해서 장기표에게 말했다.

“이 집 담벼락에 형 잡는다는 종이가 붙어 있어!”

이소선은 장기표를 ‘형’이라고 불렀다. 최종인이나 이승철 등 전태일의 친구들이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땅한 호칭이 없어 그대로 따라 부른 것이다.

“나도 알아요.”

“어떻게, 도망가야 하잖아?”

이소선은 숨을 죽여 말했다.

“지금은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해?”

“나도 그 종이를 봤는데, 아는 사람이 똑똑히 들여다보면 누구라고 알아볼지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거요.”

그는 별로 초조해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 조카라고 했기 때문에 전씨인 줄 알겠지요.”

여전히 문밖에서는 경찰과 방법대원들이 길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나가지 마시고 이따가 어두워지면 나가세요.”

이소선은 장기표가 시키는 대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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