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울산에서 만난 여창호 카프로노조 위원장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회사측이 곤혹스런 제안을 할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 위원장이 한참 뜸 들이다 꺼낸 말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의 얘기는 이랬다. 카프로는 잘나가는 기업이었다. 전신인 한국카프로락탐은 196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빌려 온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포스코가 산업의 쌀인 철을 만들었다면 카프로는 섬유봉제업의 밀인 나일론 원료를 생산했다. 카프로락탐은 옷·타이어·플라스틱을 만드는 원료로 쓰였다. 96년 효성과 코오롱이 인수경쟁을 벌인 끝에 효성이 최대주주가 됐다.

카프로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2014년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9천566억원이던 매출액은 2013년 7천718억원으로 급락했다. 192억원(2012년)이던 당기순손실은 892억원(2013년)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11년 1조원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가 급격히 꺾여 버린 것이다. 카프로는 국내 소비보다 수출(80%) 비중이 컸는데 최대 수요처인 중국이 수출국으로 돌아선 탓이다. 현재 카프로락탐 공장 평균가동률은 61.2%에 불과하다. 카프로 공장 3곳 중 2곳이 가동중단 상태다.

카프로측이 노조에 요청한 것은 바로 희망퇴직과 상여금·임금 삭감이었다. 노조는 회사측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내년 1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차입금이 400억원가량인데 채권단에 연장 요청을 하려면 자구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프로 노사는 23일 이 안에 잠정합의했다.

“최대 주주가 꿈쩍도 안 합니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해야 중국을 앞설 수 있다고 하면서 기술개발투자는 인색합니다. 그러면서 직원에게 희생만 요구하니….”

여창호 위원장은 한숨을 길게 쉬고 난 뒤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년간 카프로는 심상치 않았다. 2012년 카프로 매출액이 급락했음에도 효성·오너일가 중심으로 배당을 요구했다. 그해 카프로는 400억원의 배당을 실시했다. 2년째 실적이 악화되자 올해 들어 조석래 효성 회장과 아들인 조현준(장남)·조현상(삼남) 오너일가는 카프로 보유지분을 내다 팔았다.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제들이 효성 지분을 사기 위해 카프로 지분을 처분한 것이다. 오너일가 중에 차남인 조현문 변호사만 지분 2.13%를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효성·오너일가의 카프로 보유지분율은 25.71%에서 23.17%로 줄었다.

최대 주주인 효성이 경영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보니 위기가 닥친 카프로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0.05%(5억4천500만원)였는데 이마저도 2013년에는 0.01%(9천900만원)로 줄었다. 2011년 매출액이 1조원을 넘었고, 2012년 주주에게 준 배당금만 400억원에 달했는데도 연구개발비는 기껏해야 5억5천만원에 불과했다. 추격자 중국이 맹렬히 쫓아온다고 했건만 카프로 최대 주주와 경영진은 달아날 방법을 찾지 않은 채 그저 공장만 돌렸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카프로의 위기를 중국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오히려 경영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최대 주주 효성 오너일가가 카프로의 위기를 방치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결국 직원들만 고통을 전담한 셈이다.

이쯤 되니 “길을 잃은 것은 한국 제조업이 아니라 오너일가”라는 확신이 든다. 언제까지 위태로운 효성 오너일가 손에 카프로를 맡겨야 하나. 정부는 국내 유일의 카프로락탐을 생산하는 공장이 고사되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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