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블룸버그 통신은 스페인 동북부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 시의 대표적인 축구팀이자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역의 상징적인 구단 FC 바르셀로나도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한다고 전했다. 만약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면, FC 바르셀로나 구단은 스페인 리그를 떠나야 한다. 이렇게 되면 연간 7천억원이 넘는 막대한 수익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팀들로 구성된 카탈루냐 리그에서 뛰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세계 최강이라는 명성과 전력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FC 바르셀로나의 구단과 선수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FC 바르셀로나 선수들 중에는 카탈루냐 출신 혹은 스페인 출신이 아닌 선수들, 예컨대 리오넬 메시 같은 선수들도 있는데 그들 또한 카탈루냐의 독립에 지지의사를 밝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구단과 선수들은 왜 독립을 지지할까

왜 이 구단이, 그리고 꽤 많은 선수들이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이 점이 중요하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페인의 근대사와 FC 바르셀로나의 현대사를 살펴봐야 한다.

스페인의 동북부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의 중심 도시 바르셀로나는 내륙의 마드리드와 달리 스페인 바깥에서 수많은 정치가, 급진 사상가, 사업가, 도박꾼, 잡범, 예술가, 히피들 그리고 축구 감독과 선수들이 수세기에 걸쳐 돈과 명예와 안식을 찾아 기항한 항구도시다. 그 대표적인 구단이 FC 바르셀로나이고 영원한 숙적이 마드리드를 연고로 하는 레알 마드리드다. 두 팀의 라이벌 혈전을 ‘엘 클라시코’라고 부른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빅 매치에는 짧게는 70여년의 현대사가, 길게는 300여년의 근대사가 농축돼 있다.

14세기 후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여왕의 정략결혼으로 성립된 스페인은 곧장 영토 확장(또는 회복)에 나선다.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저 멀리 아메리카로 식민지 독점에 나선 스페인의 중심도시가 오늘의 수도인 마드리드다.

동부의 카탈루냐는 1137년에 아라곤 왕령이 됐으나 17세기와 18세기 두 차례에 걸쳐 격렬한 분리 독립운동을 벌였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일찌감치 발달한 철강·운수·항만 산업을 기반으로 왕정에 반대하는 민주공화정을 추구해 왔다. 그 중심도시가 바르셀로나다.

그러니까 산업 항구도시의 노동자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FC 바르셀로나의 축구는 세상의 모든 산업도시·항구도시·노동자 도시들이 갖는 공통점, 즉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이라는 든든한 정신을 축으로 발전해 왔다.

두 도시, 곧 왕정세력의 마드리드와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바르셀로나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은 1930년대였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일시적으로 공화정이 수립되고 그에 따라 카탈루냐가 잠시나마 자치를 누리고 카탈루냐어를 공식 사용할 수 있게 됐으나, 왕당파와 토지 귀족세력의 연대와 이를 무력으로 뒷받침하는 프랑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1925년 6월14일 FC 바르셀로나 팬들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이에 독재자는 경기장을 폐쇄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창단 이후 어렵게 구단을 이끌어 온 호안 감페르는 회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1930년 7월30일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자살했다. 충격의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은 1936년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7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민주주의 사상과 그 운동을 대표하던 FC 바르셀로나의 회장 호셉 수뇰이 프랑코의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북중미 투어 중이던 선수단의 절반 가량은 현지에서 곧장 멕시코나 프랑스로 망명을 시도했다. 프랑코를 지지하는 파시스트들은 1938년 3월16일 FC 바르셀로나의 구단 사무실에 폭탄을 던지는가 하면 주요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협박전화를 걸기도 했다.

독재자 프랑코는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국기 사용을 금지했고, 이에 따라 스페인어가 아닌 축구클럽의 이름을 강제로 개명했으며 엠블럼도 모조리 바꾸도록 했다. 이에 FC 바르셀로나의 이름은 ‘CF 바르셀로나’로 바뀌었다. 이는 영어식으로 썼던 ‘FC’, 즉 ‘풋볼 클럽’을 스페인식으로 통일하라는 프랑코의 국가주의 때문이었다. ‘클럽 데 풋볼 바르셀로나(Club de Futbol Barcelona)’가 한때 그들의 이름이 됐다. 1943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는 11대 1로 대패한 적도 있다.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전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가 3대 0으로 이기자 독재자 프랑코가 노골적으로 협박을 가했고, 그 바람에 2차전의 결과가 11대 1이 된 것이다. 그렇게 FC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독재정권에 의해 와해 직전까지 갔다.

프랑코, 바르셀로나 와해 직전까지 몰아

1970년대 중반 이후 FC 바르셀로나는 ‘오늘날의 바르셀로나’가 됐다. 1974년 전설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를 영입하면서 1973~74년 시즌 우승을 이뤘다. 1960년 이후 13년 만의 리그 우승이었으며, 더욱이 레알 마드리드의 성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5대 0의 쾌승까지 거뒀다.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베른트 슈스터·게리 리네커 같은 선수들이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썼다.

1988년에는 선수로 맹활약했던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돌아왔다. 그는 감독으로 90년대 스페인 축구를 평정했다. 훗날 FC 바르셀로나를 감독으로 이끌게 되는 주제프 과르디올라를 비롯해 호세 마리 바케로·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게오르게 하지·미샤엘 라우드럽 같은 스타들이 91년부터 94년까지 리그 우승, 89년 UEFA 위너스컵 우승, 92년 유러피언컵 우승 등 무려 11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바르셀로나는 창립 때부터 2010년까지 유니폼에 스폰서 회사의 로고를 붙이는 것을 거부해 왔다. 특히 2006년 7월14일 클럽은 천문학적 비용을 댈 용의가 있는 세기의 기업들 대신에 유니세프와 5년 협약을 맺으면서 움직이는 광고판인 유니폼 상의에 유니세프의 로고를 새겼다. 그렇게 새기는 조건으로 바르셀로나는 오히려 클럽의 연간 수입의 0.7%(연간 평균 1천900만달러)를 유니세프에 기부해 왔다. 유럽의 경제위기와 스페인의 불황 때문에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에도 이제는 글로벌 기업의 로고가 박혀 있지만, 그래도 이 팀의 이러한 정신은 위엄 있는 축구문화의 정점이다.

올해 한국 축구계는 ‘이승우’라는 천재 소년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AFC U-16 챔피언십 대회에서 이승우는 5경기 5골 5도움으로 최우수선수상과 득점상을 받았다. 그의 현재 소속이 FC 바르셀로나 유소년 아카데미다. 요한 크루이프가 주도해 창설한 바르셀로나 유스 시스템을 ‘라 마시아’(La Masia·스페인어로 ‘농장’)라고 부른다. 메시·사비·이니에스타 등이 이 ‘농장’에서 자랐다. 이 ‘농장’에서는 축구뿐만 아니라 반드시 학업을 병행해야 한다.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 성장기 유망주들은 특히 열심히 한다. 유급하면 한 학년을 더 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프로 진출이 늦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공부한다.

축구 잘하는 어린 소년들을 기술만 가르쳐서 팀 자원으로 쓰거나 다른 팀에 비싼 값으로 파는, 그런 ‘상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양한 공부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연습도 주 4회로 제한하며 하루 훈련시간은 1시간30분을 넘지 않는다. 이런 문화에서 활달하고 창의적인 축구가 피어난다. 민주주의 정신으로 발전해 온 FC 바르셀로나이기에 가능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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