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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31] 초청장 빨간 글씨 이유로 돈줄 끊고 노조 간부 해임 압박
▲ 청계피복노조 제3차년도 대의원대회 모습. 청계피복노조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함석헌 선생 초청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기관에서는 청계피복노조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탄압의 고삐를 조여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가 함석헌 선생을 초청했는가를 조사했다. 이소선은 노조 간부들한테 자신이 함 선생을 초청했다고 잘라서 말했다.

기관에서는 이승철 사무장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승철이 그날 함 선생을 모시러 갔었기 때문이다. 기관원들은 이승철한테 초점을 맞추고 탄압을 가해 왔다. 이승철은 경찰서로 연행돼 곤욕을 치른 뒤 몇 시간 만에 풀려 나왔다.

“당신, 빨갱이 아니냐. 왜 하필이면 빨간 글씨로 초청장을 만들어서 그런 반정부적인 인사를 초청했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관에서 거의 억지를 부리면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소선, 함석헌 선생을 만나다

“함 선생은 참 좋은 분이기 때문에 초청했다. 우리한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것을 배우게 될 테니까 내가 불렀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냐?”

이소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데 반정부 인사라니…. 이소선은 지지 않고 강력하게 맞섰다.

이소선이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전태일이 죽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나서부터였다. 1970년 12월 초쯤이었다. 최종인·이승철과 그 친구들 여럿이 창동 이소선의 집에서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어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선은 첫새벽에 누가 찾아왔는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려고 하니까 어떤 남자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소선은 방문을 열려다 들어오는 사람의 등 뒤에 서 있는 노인에게 눈길을 던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희한한 사람이었다. 그 노인은 허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다랗게 늘어뜨리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채 새벽녘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여기가 전태일이네 집이죠?”

남자가 방문 앞에까지 왔다.

‘어따, 예수가 왔는갑다.’

이소선은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에 찾아와서 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신령님 같기도 하고, 예수님 같기도 했다. 이소선은 하도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방안에 있던 전태일의 친구들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새벽에 이게 무슨 일인가.

“어머니 계십니까?”

허연 수염을 앞으로 내밀며 그 노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태일이 엄만데요.”

이소선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그 말만 겨우 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소선이 말을 마쳤는데도 그 노인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새벽안개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말이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 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멀거니 노인의 흰 두루마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 예수 같은 노인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양복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새벽녘에 이렇게 불쑥 찾아와 놀라셨습니까?”

양복 입은 사람은 허리를 약간 숙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요?”

양복 입은 사람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서야 말문을 열고 양복 입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저분은 함석헌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셨다가 전태일이 죽은 소식을 듣고 볼일도 돌보시지 않고 곧장 귀국하셔서 곧바로 여기에 오신 겁니다.”

“그렇습니까? 하여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실례지만, 함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 밖에 계시는데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이소선은 함 선생님이라는 분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새벽에 미국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함 선생이 방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을 보고 미국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서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이리로 왔습니다. 이렇게 애석하고 위대한 죽음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외국에 머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함 선생은 주름진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 이소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노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진정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함 선생은 흰 수염을 손으로 쓸더니 전태일의 친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서 전태일군이 원하는 근로조건 개선을 이뤄야 합니다.”

함 선생은 이소선과 전태일의 친구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선물도 가지고 오셨다.

함 선생은 돌아가면서 무슨 일이든지 갑갑하고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당신을 찾아오라고 당부하셨다. 그때부터 이소선은 함 선생을 알게 됐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원효로 댁으로 찾아갔다.

함 선생은 ‘씨알의 소리’에 전태일 사건에 관한 글을 실었다. 해마다 전태일 추도식을 씨알의 소리 주최로 개최했다. 선생은 전태일을 항상 ‘전태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소선은 손자뻘 되는 태일이를 무슨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듣기가 거북하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리 부르더라도 그에 맞게 알아서 부르니까, 어머니는 누구한테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함 선생이 말했다. 함석헌은 전태일을 인간으로서 할 일, 즉 도리를 다 하고 먼저 죽었으니 당연히 선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연을 했다.

목적 다른 청계피복노조 간부들

73년 6월은 청계피복노조 지부장 임기대회가 있는 달이었다. 6월22일 제3차년도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기관과 사용주측에서는 청계노조를 어용으로 만들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최일호가 노총의 법규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통해 이선두라는 사람이 노조에 왔다. 그에게 청계노조 상임지도위원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정부 정보기관과 사용주측에서는 이선두를 지부장으로 출마시켰다. 이선두를 통해 어용노조를 만들겠다는 계략이었다. 이선두라는 사람은 청계노조 상임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사용주를 족쳐서 굴복시키는 일을 잘했다. 그 사람은 사용주가 일단 근로기준법을 어겼다든지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든지 하면 그 꼬투리를 잡아서 사용주 다루기를 고양이 쥐 잡듯이 다그쳐서 합의서를 받아 냈다.

“당신, 노조에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이선두가 은근한 협박을 곁들여 말하면 사용주는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한 번은 어떤 사용주가 일요일에 강제작업을 시키다가 걸렸다. 노조사무실에 불러다 놓고 닦달을 하고 있는데 그 사용주가 전화를 한 통 쓰겠다고 했다. 수화기를 붙들고 집에 있는 부인한테 뭐라고 말을 건네더니 갑자기 중국말로 바꿔서 지껄이는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전화통화를 듣던 이선두가 갑자기 욕을 터뜨렸다.

“뭐라고? 이 새끼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어, 이 자식 봐라?”

이선두는 흥분해서 죽여 버리겠다고 웃통을 벗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사장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장이 중국말로 그 말을 했는가 보다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사장이 돌아간 다음에 어떤 사람이 이선두에게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 봤다. 이선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전화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뭐라고 지껄이는데 비웃으면서 하는 거야. 그래서 요 새끼가 지금 우리 욕을 하는구나 하고 감을 잡은 거지.”

하여튼 이선두라는 사람은 사용주를 다루는 데 능수능란했다. 사용주를 윽박질러 돈을 긁어내는 데에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정부와 사용주측에서는 지부장으로 당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의를 해서 최종인을 지부장으로 강력하게 추천했다. 당사자인 최종인은 한사코 지부장을 못하겠다고 버텼다. 이소선과 이승철이 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최종인은 지도위원으로 있는 최일호가 지부장을 해야 한다면서 끝내 사양했다. 이소선은 최종인의 그러한 태도가 너무 답답해서 화를 내며 말다툼까지 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소선과 친구들쪽에서는 최일호를 밀기로 했다.

6월22일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최일호가 지부장으로 선출되고 최종인이 상임부지부장으로 선출됐다.

최일호는 나이가 지긋했고 노동법을 잘 알고 있었다.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능력도 뛰어나 당시 조합 간부들한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노총을 통해 청계피복노조에 왔는데, 운동성이나 투쟁의지가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반공포로 출신이어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최일호는 두 달 가량 지부장을 하다가 사임했다. 결국 최종인 상임부지부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됐다. 이어 10월5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최종인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노총과 사용주측에서는 어용화를 기도하는 동시에 전태일의 친구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노동교실 개관식 때 함 선생한테 초청장을 보냈다는 트집을 잡아 정보기관과 사용주측에서는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청장을 빨간 글씨로 인쇄해서 재야인사들한테 보낸 이승철 사무장과 간부 4명 정도를 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 물론 집행부는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전임자임금 미지급, 돈으로 압력 넣는 사용주

기관에서 심어 놓은 사람들이 청계피복노조를 말아먹게 공작을 해도 전태일의 친구들이 하도 단단히 뭉쳐 있어 뜻대로 일이 안 되니까 본격적으로 분열시키자는 의도였다.

사실 전태일 사건의 파장 때문에 여론을 의식해서 노골적으로 공작을 진행시키지는 못했다. 선거도 있어서 까놓고 탄압을 못하고 음성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어 유신까지 한 마당에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노동조합 간부를 기관이나 사용주가 지네들 맘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어디 있느냐!”

이소선은 강력하게 싸워 나가기로 작정했다.

“승철아, 너 절대로 나가지 말아라! 저놈들이 와서 끌어낼 때까지 버티고 있어라!”

이소선은 이승철에게 굽히지 말라고 힘을 주고 전태일 친구들에게 똘똘 뭉쳐서 싸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행히 삼동회 회원들은 이소선의 말을 잘 따라 줬다. 그러나 이선두 등은 예외였다.

이승철이 집행부에서 계속 버티니까 구체적인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용주들은 우선 전임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동시에 조합비를 일괄공제해 주지 않는 것이다. 노조가 가장 골머리를 썩여 왔던 돈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얼마나 굶었던가!

노조결성 초기에는 어려운 재정을 전태일 장례 조의금으로 메워 나가면서 굶다시피 하며 어렵게 견뎠다. 단체협약이 체결되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여 어느 정도 재정자립이 될 만하니까 저들은 야비하게 돈을 가지고 숨통을 조여 왔다.

임금은 동결시키고 조합비 일괄공제를 거부함과 동시에 노조 간부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시장경비들을 동원해서 조합 간부들의 공장출입을 가로막았다. 간부들은 날마다 공장에 나가 경비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저녁때는 진이 빠져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들의 탄압은 끈질겼다. 간부들은 어려운 탄압을 견뎌 내려고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행부 간부들은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여 갈피를 못 잡게 됐다. 갈수록 저들의 방해공작은 치밀해져 갔다. 어느새 조합 간부들 분위기는 이승철이 당분간 물러나야 한다는 분위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어느 날 간부들이 우이동 계곡에서 술자리를 함께하며 이승철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

“너무 힘들다. 이런 때는 숨통을 터서 살아나야 하지 않냐? 쉽게 말하면 솥뚜껑을 완전히 덮어 버리면 터지니까 조그만 구멍을 내서 터지는 것을 방지해야 하지 않겠냐?”

최일호는 이승철이 물러나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모두들 할 말을 잃고 술만 들이켰다.

결국 4개월 가까이 버티다가 9월18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부서장 사표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이승철·양승조·신진철·신정은 등 부서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소선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들 사이를 자본가들이 쪼가리 내는 것 같고, 이제 노동조합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들어 그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승철아, 그놈들이 와서 끌어낼 때까지 버텨라!”

‘그러나 얼어붙은 정국. 아직은 조직력이 허약해 힘으로 저들을 꺾을 수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랴!’

‘태일아, 네 친구들이 쫓겨난다’

이소선은 분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태일이를 앗아 가더니, 이제는 전태일의 친구들마저 내 곁에서 빼앗아가려고 하는구나. 노조를 어떻게 만들었는데…. 태일이의 뜻을 이뤄야 하는데,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태일아, 네 친구들이 쫓겨나는구나!’

이소선은 간부 4명이 기관의 압력에 의해 쫓겨나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승철은 이소선과 함께 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날마다 아들처럼 붙어 다니던 이승철이 노조에서 물러나다니…. 이승철을 바라보는 이소선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이소선은 이승철이 노조에서 쫓겨난 걸 생각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방안을 헤매고 다녔다.

“어머니, 우리가 영영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전상 물러나는 것이니 울지 마세요. 우리 힘이 생기고 상황이 좀 바뀌면 다시 들어올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승철은 이소선의 등을 얼싸안으며 위로해 줬다.

‘그렇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조직된 힘밖에 없다.’

이승철은 노조에서 쫓겨난 뒤 곧장 현장에 취직했다. 열심히 일하면서 현장조직 확장을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일을 하면서도 점심시간이 되면 노조사무실에 들러 조합원들을 만나고, 조합운영에 관해서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이승철이가 나갔는데 점심시간에 조합사무실에는 왜 들르는 거냐?”

어느 날 점심시간에 담당형사가 이소선 앞에서 엉뚱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야, 이 무식한 짭새야. 조합원이 점심시간에 조합사무실에 오는 것도 죄가 되냐? 어서 꺼지지 못해!”

이소선은 분을 참지 못하고 형사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한참 동안이나 억세게 싸웠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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