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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27] 두 달 만에 숨진 김진수, 끌려가 고문당한 이소선
▲ 모란공원에 자리 잡은 김진수의 묘. 민종덕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이소선은 김진수의 어머니를 날마다 만났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궁리를 하다 공장장 유해풍을 생각했다.

이소선은 김진수의 어머니를 앉혀 놓고 공장장을 찾아가서 싸워야 한다고 설득했다. 밤새도록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연습까지 했다.

“네 놈이 우리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우리 아들을 살려 내라!”

김진수의 어머니는 이소선이 하는 대로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김진수 어머니는 밤새워 연습을 마치고 공장장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갈 때마다 집에 안 들어왔다고 했다. 이소선은 김진수 어머니 혼자만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김진수의 친구들과 함께 공장장 집에 쳐들어갔다.

“공장장 이 새끼, 사람을 죽게 만들어 놓고 어디 갔단 말이야!”

이들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공장장 안 찾아내면 올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살 거니까 알아서 하시오. 어서 가서 공장장 유해풍이 찾아와요!”

공장장 유해풍의 집을 뒤집다

이들은 방 안에 진을 치고 구호를 외쳤다. 이소선은 김진수의 어머니에게 나를 따라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소선은 고함 지르는 법과 손 놀리는 것을 가르쳐 줬다.

“공장장이 시켜서 내 아들이 죽었으니 살려 내라!”

김진수의 어머니는 그 말만 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른 말도 하고 설쳐대야 할 텐데 김진수의 어머니는 가르쳐 준 한마디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답답했다. 당사자인 김진수의 어머니가 앞장서서 싸워야 지원하는 이들이 보조를 맞출 텐데, 어머니가 그 모양이니 다른 이들이 나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공장장 집에서 새벽까지 난리를 치고 싸우니까 경찰이 들이닥쳐 모두를 연행했다. 경찰은 김진수의 어머니는 내보내고 이소선만 붙잡아 뒀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선동했다고 해서 선동죄, 주거에 침입했다고 해서 주거침입죄, 공장장 부인을 감금했다고 해서 불법감금죄 등 별별 죄목을 붙이더니 즉결 9일을 선고했다. 재판에서 이소선이 잘못했다고 말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잘못한 것 없다. 공장장이 깡패를 사서 사람을 죽게 만들어 놓고 저렇게 방치해 버렸지 않았는가. 그 공장장은 처벌하지 않고 놔두면서 왜 우리만 가지고 처벌을 하는 거야!”

이소선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결국 구류 9일을 살았다. 구류를 사는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 목사들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재야인사들이 이소선을 면회왔다.

구류를 살고 나왔는데, 김진수는 끝내 죽어 버렸다. 식물인간으로 두 달간 링거만 맞다 숨을 거둔 것이다. 김진수가 죽고 난 뒤에도 회사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시체를 병원에 놓고 책임 문제와 보상 문제 때문에 무려 한 달을 싸웠다.

이소선은 김진수의 어머니에게 싸우는 방법을 알려 줬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함께 노총·회사·경찰서·교회 등을 쫓아다니며 악착같이 싸웠다.

지프차에 실려 끌려가다

어느 날이었다. 이소선은 최종인과 공장장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난데없이 체격이 우람한 사내들이 이소선을 둘러싸더니 네모반듯한 지프차에 실어 넣어 버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갔다.

이소선은 지하실 같은 곳에 갇혔다. 함께 있던 최종인도 모르게 이소선만 붙잡히고 말았다.

“왜 김진수 사건에 개입해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모로 시끄럽게 하는 겁니까? 당신도 김진수처럼 죽어 보려고 그래요?”

그들은 이소선에게 협박을 가했다.

“너희들이 나를 잡아온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 한번 죽이고 싶으면 어디 죽여 봐라. 이놈들아!”

이소선은 화가 치밀어 머리로 들이받으면서 싸웠다. 그들은 이소선한테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 온갖 모욕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이놈들, 나는 죽어도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달라붙어서 싸울 테다.”

이소선은 죽기 살기로 대들었다. 그들도 하는 수 없었는지 저녁때쯤 돼서 이소선을 내보내 줬다. 불과 7~8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는데, 그 치욕스러운 순간이 7~8년쯤 되는 것 같았다. 이소선은 나오자마자 또다시 김진수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결국 이 사건은 6월19일에야 회사측으로부터 위자료와 장례비를 받는 선에서 일단락 짓기로 했다.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장례 문제를 논의했다. 김진수의 묘를 전태일의 묘 옆에 쓰기로 결정했다. 이것마저도 압력이 들어와 싸움을 한 끝에야 모란공원에 안치는 하되 전태일의 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3월18일 사고가 나서 5월16일 숨을 거두고, 6월25일에야 가까스로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

노동자의 죽음이 왜 이렇듯 억울하게 외면당한 채 이름 없이 묻혀야 하는가! 이소선은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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