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모든 부당함을 견디게 해 줬던 정규직 전환의 희망이 사라진 그 순간, 20대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쓰고 아픈 이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청년들의 삶을 이토록 무참하게 파괴하고 있는가.

문득 ‘블랙기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일본에서 건너온 이 표현이 제기하는 문제의 실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일본의 청년노동 NPO(비영리민간단체) 법인인 ‘POSSE’는 1천500건 이상 축적된 노동상담과 조사활동의 결과를 토대로 블랙기업을 고발하면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번역돼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한 책 <블랙기업>의 정의에 따르면, 블랙기업이란 “법령에 어긋나는 조건의 비합리적인 노동을 젊은 직원에게 의도적·자의적으로 강요하는 기업, 즉 노동착취가 일상적·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기업”을 말한다.

한국의 현실은 굳이 블랙기업이라는 별도의 용어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다. 오랜 구직활동 끝에 겨우 입사한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삶을 아주 잠시만 들여다보라.

한국에서는 블랙기업이 아닌 것을 선별해 칭찬하는 일이 더 수월할지 모른다.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시장에서 시장경제의 원리, 기업의 이윤만이 무제한적으로 추구되면 모든 기업은 일순간에 블랙기업이 될 수 있다.

17개월이나 연장된, 끝이 보이지 않는 수습사원을 버텨 온 청년에게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담당검사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가해자의 ‘업무상의 위력’에 대해 무혐의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모순적이게도 이 기업은 ‘네가 아픈 건 젊기 때문이니 잘 참아’라는 자기주문을 만들어 낸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내놓은 출판사 쌤앤파커스다.

수십·수백 장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하고 복잡한 채용전형의 경쟁을 이겨 낸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계약직 일자리다. 한 번의 계약이 끝나면, 다시 취업준비생이 돼서 또 다른 계약직 일자리로의 취직을 준비한다. 이번엔 몇 개월짜리일까. 3개월짜리? 6개월짜리? 12개월짜리? 최대 2년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다.

'열정의 착취'라는 말은 이제 흔해졌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이 착취당하고 있는 건 삶과 존재 그 자체다. 극도의 불안정함과 절박함을 느끼며 자기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증명 요구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청년들의 삶은 기업에 의해 일회용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것을 넘어 철저하게 파괴당한다. 권리로서 노동이 자리해야 할 곳에 자발적 노동 강요가 위치하고, 청년 스스로 그것을 기꺼이 하도록 만든다. ‘정규직 채용’이라는 잠깐의 희망에 대해 우리 사회가 청년에게 되돌려 준 대답은 모욕과 폭력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 와중에 고용노동부는 신임 장관과 청년들의 토크콘서트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일자리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듣고 싶다며 참여상품으로 ‘에너지드링크’를 걸었다.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잠을 줄이는 고통을 아는가. 필자는 이것이 각성제의 기운을 빌려 당장의 잠을 줄여서라도 취업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진다.

청년들의 입장에 서서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를 개발해 블랙기업을 퇴출시키고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한국 노동시장의 특성에 맞게 여러 부문에서 블랙기업을 선정할 것이다. 가장 시급한 사안 중 하나는 계약직·인턴·수습노동의 문제일 것이다. '일점돌파'가 전략이라면 이 지점을 반드시 뚫고 나가야 한다.

계약직 사용사유가 법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편리한’ 환경에서 기업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존의 고용을 계약직으로 대체해 나갈 것이다. 기업은 상시적·계속적 업무에도 계약직을 채용하고,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계속적인 선별과 재선별의 과정, ‘취업 이후의 취업활동’을 청년들에게 강제할 것이다. 해고를 쉽게 만드는 노동유연화 전략의 다른 한편에서는 고용불안에 근거한 노동통제·강요·착취의 강화가 존재한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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