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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26] 사용자의 노조파괴 공작에 희생되는 ‘전태일들’
▲ 후생식당에서 일하는 이소선. 전태삼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노조에서는 점심을 굶는 노동자에 대한 대책을 당국에 요구했다. 이에 서울시는 중구청을 통해 청계천 노동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후생식당을 열었다. 점심을 굶는 청계 노동자들을 위한 급식소 성격을 띠었다.

후생식당에서는 국수 한 그릇을 5원에 팔았다. 하루에 300그릇의 국수를 만들었다.

그러나 무성의하게 만든 국수라 질이 나빴다. 급식시간도 문제였다. 점심시간 1시간 동안만 국수를 파는데 시장의 지게꾼 아저씨들이 먼저 와서 줄을 서 버리면 공장의 청계노동자들은 미처 줄을 서지 못해 국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 먹이러 후생식당에서 일하다

이소선은 안 되겠다 싶어 후생식당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런데 후생식당 사람들은 이소선이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이소선은 들은 척도 안하고 무작정 식당에서 일을 했다. 후생식당에 고용돼 일하는 사람들은 국수를 삶기 위해 불에 앉혀 놓고는 면이 불어 터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소선은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후생식당은 매일 지급되는 국수와 멸치·파·고춧가루·단무지 등도 제대로 다 쓰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됐다. 이소선은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소선은 아침 일찍 식당으로 출근했다. 멸치를 넣어서 육수를 끓이고, 파를 썰었다. 단무지도 썰어서 고춧가루로 양념을 만들었다. 이소선이 앞장서 성심껏 일을 하니 고용돼 일하던 여자들이 구석에서 구시렁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소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책임자한테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하루에 얼마만큼 배당되는가를 따져서 쓰면 되는 것이지 이것 아껴 뒀다가 뭐 하려고 그러느냐?”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못 먹는 노동자한테 최대한 급식을 제공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그저 시간만 지나면 당장 급한 사람이 와도 무정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이소선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배당되는 양만큼은 급식을 해야 한다면서 늦게 오는 노동자들한테도 국수를 팔았다. 고용인들은 그것마저도 못마땅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소선은 잘못된 것을 계속해서 고쳐 나갔다. 점심시간이 지나 작업시간에 허둥거리는 노동자들에게 먼저 급식을 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교적 덜 바쁜 지게꾼 아저씨들한테 국수를 말아 드렸다.

지게꾼 아저씨들한테 배식을 할 때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다.

어떤 지게꾼 아저씨한테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날마다 아버지를 따라서 함께 시장에 나왔다. 이소선이 보기에 엄마가 없는 것 같았다. 매일 시장바닥에서 돌아다니니 아이의 손과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고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날을 잡아 오후에 불을 때서 목욕도 시키고, 중앙시장에 가서 옷을 사 입혔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아이는 이소선만 보면 엄마라고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다. 식당에 서 있다가 자기 아버지가 오면 이소선한테 달려왔다.

“아버지, 엄마가 국수 줬어.”

이소선을 빤히 쳐다보면서 엄마라고 불렀다.

“나한테 엄마라고 하면 안 되니까 할머니라고 해라.”

이소선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할머니라고 부르기 싫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엄마, 엄마” 하며 치마를 붙들고 따라다녔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면 식당 앞에서 이소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일을 하러 갔으니 이소선에게 오는 것이었다. 이소선이 식당 안에서 국수를 삶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떤 때는 한나절이나 시장에서 놀다가 국수 먹을 시간이면 돌아왔다.

“엄마, 내 국수 내놔.”

배가 고픈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이소선을 채근했다.

이소선은 그 모습에 얼마나 웃음이 나오는지, 몇 달 동안 녀석한테 정이 들어서 안 나오기라도 하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꼬박꼬박 국수를 남겨 놓고 녀석을 기다렸다.

조합원들은 이소선한테 일은 하지 말고 양념 같은 거나 챙겨 달라고 성화였다. 이소선은 그네들의 말이 고마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국수 삶는 것도 보람이라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식당에 고용된 사람들이 급기야 자기들의 일까지 이소선한테 떠넘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일을 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매일매일 힘든 일 속에 묻혀 있다 보니 몇 달 후에는 쓰러져서 병이 나 버렸다.

한영섬유분회 조합원 김진수 살해당하다

전태일이 죽은 지 불과 여섯 달도 안 돼 이소선은 또 다른 노동자의 죽음을 봐야 했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영섬유라는 공장에서 노조탈퇴를 거부한 노동자 김진수를 회사측이 고용한 깡패가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러 죽게 한 사건이었다.

한양섬유(대표 한익하)는 종업원이 600여명으로 편직물을 생산했다. 이 회사에서는 1970년 12월28일 조합원 400여명이 모여 섬유노조 서울의류지부 한영섬유분회를 결성하고 분회장에 김용욱을 선출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회사측은 200여명의 조합원을 강제로 퇴사시켰다가 재입사 형식으로 채용했다. 회사측에서는 공장장 유해풍에게 노조파괴 공작의 책임을 맡겼다. 유해풍은 그 전에 폭행사건으로 해고된 적 있는 사람을 매수해 재입사시키고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다. 결국 깡패들을 고용한 셈이다. 깡패들은 노조 탈퇴를 강요하고 71년 1월4일에는 노조 분회장과 간부 4명을 사칙위반으로 해고시켰다.

공장장 유해풍은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매수자들한테 김진수라는 자가 말을 가장 안 들으니 시비를 걸어 싸움을 벌이라고 지시했다. 매수자들은 같은해 3월18일 오후 5시쯤 공장 밖 술집에서 소주 두 병과 포도주 한 병, 막걸리 한 되를 마시고 나와 공장으로 돌아왔다. 매수자 중에서 정진헌이 김진수에게 시비를 걸었다. 김진수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갖고 있던 드라이버로 김진수의 머리를 2.5센티미터나 찔러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이들은 사건이 발생하자 김진수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키고 사실을 숨기기 위해 넘어져서 다쳤다고 말했다. 그래서 의사는 응급조치만 했다. 이후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한영섬유분회장과 영등포 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병원에 급하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병원에서는 재진찰 후 수술을 했으나 너무 늦어 버렸다. 김진수는 줄곧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5월16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영섬유 노동자 150여명은 사건 다음날인 3월19일 오후 1시, 김진수 사건의 진상해명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2시간 가량 농성했다. 사건의 당사자인 노조는 회사측의 소행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상급조직인 섬유노조와 한국노총(위원장 최용수)에서는 해당 사건이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발생한 일까지 회사가 책임을 지고 보상해 줘야 하다니, 기업이 무슨 자선사업 하는 곳이냐?”

상급조직의 발표가 있자 회사측은 김진수의 유가족에 대한 보상마저 못하겠다고 강압적으로 나왔다. 이소선은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로 했다.

이소선은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어머니다.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 김진수의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바로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억울하고 분통한 죽음은 전태일의 죽음으로 끝나야 할 텐데 또 한 삶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소선은 당장 그곳으로 쫓아갔다.

청계피복노조 간부인 최종인·이승철과 함께 김진수가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가서 보니 김진수는 의식을 잃고 방치된 채 누워 있었다. 드라이버로 머리가 찔렸는데 겉의 상처만 치료한 채 며칠 동안 내버려 두고 있었다.

이소선 일행은 보호자를 찾았다. 침대 밑에서 김진수 어머니라는 사람이 넋이 빠진 채 기어 나왔다.

“하루빨리 진상을 밝혀내야 합니다”

“우리는 청계피복노조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나도 작년에 아들을 잃은 사람입니다. 정신이 없으시겠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하루빨리 아드님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진상을 밝혀내야 합니다.”

이소선은 얼이 빠져 있는 김진수의 어머니에게 목을 메이는 것도 참아 가며 차근차근 얘기해 줬다. 이소선은 병원을 조사해서 김진수가 드라이버로 찔린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뇌가 상해 있었고, 쇠에 붙어 있던 녹물이 들어가서 균이 뇌로 퍼진 뒤였다. 수술을 해도 별 소용이 없게 돼 버렸다.

회사측이 고용한 깡패들한테 노조탈퇴를 강요당하면서 일어난 사건임이 명백해졌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서울의류지부나 섬유노조·한국노총에서는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진상이 밝혀졌는데도 왜 무책임하게 있는 거요? 앞장서서 싸워야 할 노총이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섬유노조와 노총을 찾아다니면서 강력하게 따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피하기만 했다. 이소선 등은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다른 수단을 쓰기로 했다. 김진수의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친구들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노총에 가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김진수의 친구들을 설득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줬다. 티셔츠에 ‘김진수를 살려내라!’, ‘노총을 규탄한다!’고 쓰고 김진수의 친구들에게 입혔다. 노총에 가서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까지 상세히 일러 줬다.

노총 위원장실에 들어가 해결될 때까지 눌러앉아 농성을 벌이라고 힘을 북돋아 줬다. 김진수 친구들은 티셔츠를 입고 노총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위원장실을 찾지 못하고 복도에서 시끌벅적하게 소란을 피웠다. 난데없이 사람들이 들이닥치니 노총 직원들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당신들, 여기 어떻게 왔어?”

노총 직원들이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위원장 최용수 만나러 왔다. 위원장은 앞장서서 김진수를 살려내라!”

김진수의 친구들은 흥분해서 마구 소리쳤다.

“이 자식들이, 어디서 함부로 말을 하는 거야.”

노총 직원들은 완력을 쓰며 김진수의 친구들을 몰아내려 했다. 김진수의 친구들은 노총 직원들을 밀어내며 곧장 싸움을 시작해 버렸다. 노총 사무실은 삼면이 유리창이었다. 그 많은 유리창을 다 때려 부수고, 서류는 물에 넣어서 짓이겨 버렸다. 흥분한 김진수의 친구들은 마구 날뛰면서 사무실 집기까지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노총에서는 즉각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을 의심했다. 아마 김진수 친구들이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이 시켜서 찾아왔다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청계피복노조에서 노총을 때려 부수라고 시킬 수가 있소? 우리는 해 준다고 했는데, 정말 섭섭합니다.”

노총 위원장은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을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소선 등도 지지 않고 맘대로 하라고 뻗댔다. 노총은 차마 고발을 할 수는 없었던지 뒷말이 없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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