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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25] 한 달 3천원에 매일 14시간 노동, 체불 항의하면 손찌검까지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감격시대


이소선은 밤새도록 울면서 기도했다. 날이 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하나님이 고기 준다고 그럽디까?”

전태일 친구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주겠지. 그렇게 울면서 달라고 했는데 왜 안 주시겠냐.”

이소선은 이들을 달래서 사무실로 출근시켰다. 그날 낮에도 여느 때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노조사무실로 갔다.

“어머니, 어떤 곱게 생긴 아주머니들이 어머니를 만나러 집으로 갔다가 안 계셔서 이리로 왔었어요. 조금 있다가 오실지 모른다고 했더니 저 밑에 대명다방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오시면 다방으로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주고 갔어요.”

이소선은 무슨 일인가 하고 전화를 했다.

“우리가 올라갈까요?”

이어지는 지식인들의 연대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선은 생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올라오라고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조금 있으니까 여자 5명이 들어왔다. 인텔리처럼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아이고 태일이 엄마,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젊은이들, 당신들은 태일이가 죽고 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들을 하는데, 우리는 지식인입네 하면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니. 진짜 미안하구려.”

그들은 이소선을 붙들고 백년지기처럼 악수를 하고 간부들 손목을 잡았다.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노조 간부들은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태일이 어머니, 잠깐 나가서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그들은 인사치레가 끝나자 이소선의 소매를 붙들었다. 이소선은 영문을 몰랐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따라 나섰다. 여자들은 이소선을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차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나 혼자서만 먹을 수가 없습니다. 쟤네들도 밥을 안 먹고 있는데 차라리 나도 안 먹겠어요.”

이소선은 간부들을 생각하고 여자들한테 미안하지만 그냥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분들도 이내 이소선의 뒤를 따라오더니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아홉 명은 될 겁니다.” 이소선이 대답했다.

“그러면 어머니까지 열 명이구먼. 우리가 내려가서 준비를 해 놓고 있을 테니까 전화하면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금방 오셔야 합니다.”

그들은 다시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안 가도 되니까 어머니는 저녁 드시고 오세요.”

노조 간부들이 이소선을 밀어내면서 한사코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너희들이 안 가면 나도 안 간다.”

이소선은 딱 부러지게 말하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도 곧 내려갈 테니 먼저 내려가세요.”

이소선은 간부들의 그 말을 듣고서야 계단을 내려왔다.

노동조합 사무실 아래에는 불고기 집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가까운 불고기집으로 들어갔다. 장정들이 자리에 앉으니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여자들은 고기를 주문하고 방석까지 집어 줬다.

쇠판에 얹은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 갔다. 방안 가득히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벌렁거리게 만들었다. 간부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쟁반에 있던 고기가 금세 바닥이 났다.

여자 손님들은 고기가 없어지기가 무섭게 계속해서 주문을 했다. 모두들 별말 없이 고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6인분이나 되는 고기를 한 사람씩 먹어 치웠다.

그때서야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여자 손님들은 간부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고기 6인분을 먹다

여자 손님들은 이우정·윤종호·이효재 같은 분들로서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교수들이었다. 고기를 먹게 된 인연으로 그들을 만나게 됐다.

“청년, 한번 일어서 보게.”

윤종호 교수가 밥을 다 먹은 신진철한테 손짓을 했다.

“왜요? 내 밑에 뭐가 있어요?”

신진철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니야. 갑자기 먹으면 위가 나빠질까 봐 그러는 거야.”

윤종호 교수는 맘씨 좋은 아줌마처럼 신진철을 대했다.

“거뜬합니다.”

신진철이 헤벌쭉 웃었다.

“그래? 소주도 한잔 할 텐가?”

윤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선생님, 얘들한테 소주는 안 됩니다. 아직 근무 중이라서.”

이소선은 실례를 무릅쓰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모처럼 고기를 먹었는데 소주 딱 한 잔만 먹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게요.”

간부들이 이소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사정을 했다. 근무 중에는 절대로 술을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절실한 간부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소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성한 저녁자리가 무르익자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부들이 굶게 됐다는 말을 하게 됐다.

“아유, 그래요? 다른 것은 사지 말고 꼭 쌀을 사서 밥을 해 먹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세요.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들 하세요. 정말 부끄럽군요. 이런 실정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들은 쌀 한 가마 살 돈을 주고 가면서 간부들 손을 일일이 잡으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젊은 장정 한 사람당 6인분씩의 고기를 먹었고,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갔으니 가지고 온 돈을 몽땅 주고 간 셈이었다. 이소선은 참으로 그들이 고마웠다.

이소선은 진정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참, 하나님도 귀가 밝구먼.”

간부 하나가 엉뚱한 말을 그에게 던졌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머니가 어젯밤에 눈이 퉁퉁 붓도록 기도하고 오시더니만 저 사람들한테 고기 사 주라고 명령을 했던 모양이죠?”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사람이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어.”

“어머니 우리 다시 열심히 할게요.”

전태일 친구들이 이소선을 둘러싸고 힘차게 말했다. 그 일로 간부들은 용기를 얻게 됐다.

이소선은 이효재·이우정·윤종호 선생 같은 분들을 평생 잊지 못했다. 노동조합 못하겠다고 고기나 먹고 죽자는 판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때를 잘 맞춰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서 그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이들의 뜻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은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두고두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간부들도 그때 일이 생각날 때면 “아! 그때 고기 사 주신 선생님들” 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기에 밥까지 먹고, 거기다가 쌀을 한 가마 사다 놓으니 그런 부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청계피복노조에 쏟아지는 임금체불 진정

1970년은 이소선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해다. 전태일 사건뿐만 아니라 그해에는 사회적으로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다. 정인숙 피살사건,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로 33명이 죽고 19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 용두동 판자촌 532채와 마장동 판자촌 168채가 불에 타 버린 사건, 제주-부산 간 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해 326명이 익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사건과 사고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라기보다는 대부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과 무능에서 비롯됐다.

1971년이 됐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민중들의 투쟁이 고조됐으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세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계피복노조는 끊임없는 탄압을 이겨 내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나갔다.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임금을 못 받는 근로자들의 진정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용주가 근로자에게 임금을 주지 않고 상습적으로 떼어먹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이 같은 현상은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노조에 진정이 들어온 내용을 살펴보자. 아동복을 만드는 공장의 미싱사인 이아무개(19세)양은 월 1만3천원을 받기로 하고 1970년 1월 초부터 평화시장의 ㄷ사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12월 중순 갑자기 사업주가 일감이 없다면서 해고시켰다. 그동안 밀린 임금 중에서 8천300원을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8천500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업주는 “내년 4월에 주겠다”며 거절했다. 여러 차례 사업주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지쳐 노동조합에 진정을 하게 됐다.

다음은 김아무개(20세·성동구 마장동)군의 경우다. 평화시장 ㅅ상회에 재단보조로 월 1만5천원을 받기로 하고 1969년 10월에 취업했다. 작업 중 분실된 재단기를 물어주지 않는다고 1970년 1월 초에 해고됐다. 김군은 업주의 주장에 따라 불법으로 집수색까지 받았다. 결백을 증명한 김군은 밀린 임금 1개월분을 달라고 업주에게 요구했으나 해가 바뀌도록 주지 않자 노동조합을 찾아왔다.

사업주들은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근로자들의 임금을 주지 않았다. 근로자들이 날마다 임금만 받으러 다닐 수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다른 공장에 취직을 해야 했다. 사업주들은 이 같은 근로자들의 약점을 최대한 악용했다.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가면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면서 내쫓는 사업주들이 적지 않았다. 근로자들이 노동청이나 경찰서에 가서 호소하더라도 망신만 당하기 일쑤였다. 앉아서 당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근로자들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노조가 체불임금 처리와 더불어 중점을 둔 활동은 주휴일제 실시였다. 평화시장 사업주들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돼 있는 주휴일제를 외면하고 한 달에 첫째·셋째 일요일만 쉬게 했다. 매일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해서 밤 10시·11시까지 일하고 일요일도 쉬지 못하니 기계가 아니고서야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추석이나 설 대목(옷이 잘 팔리는 성수기) 때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공장 안 앉은 자리에서 먹고 일하고, 잠이라고는 하루에 잠깐씩 두어 시간 눈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철야작업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유급휴일을 실시해야 했다. 조합 간부들은 일요일마다 출근해서 주휴일제를 실시하지 않는 공장을 찾아가 계몽하고 설득했다. 그리고 작업을 중단시켰다. 간부들의 활동을 무시하고 악질적으로 작업을 강행한 사업주는 조직적으로 응징하거나 고발 조치했다.

71년 노조의 첫 사업계획 '시범공장 만들기'

노동조합은 새해 들어 시범공장·건강진료소·합숙소·급식소 설치 등을 목표로 뛰었다. 정부의 협조를 받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시범공장을 세움으로써 전반적인 근로조건을 개선해 보자는 취지였다. 또 경한 환자에 대해서는 무료로 치료해 주고, 직업병 환자에 대해서는 값싸게 치료해 주기 위해 복지의원을 설립하는 내용도 사업계획에 포함됐다.

평화시장에서는 막차를 타는 시간이 퇴근시간이나 다름없었다. 막차가 끊겨 공장으로 돌아오던 여성근로자가 불량배들에게 고초를 당한 일도 있었다. 공장 셔터가 내려져 있는 데다, 여관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셋방을 얻을 돈이 없어 공장에서 자취를 하는 남녀 근로자들이 작업장 위·아래층에서 기거하다 일어난 풍기문란도 더러 있었다. 노조는 유사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합숙소를 세울 요량이었다.

끼니를 굶는 근로자들이 싼값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급식소도 필요했다. 당시에는 끼니를 굶는 근로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월 3천원 받는 시다의 생활을 살펴보자. 서울시내에 집이 있거나 기식할 곳이 있는 시다를 제외한 시골 출신 시다는 세를 얻어 자취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인의 양해하에 작업장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많았다. 집세는 몇 명이 어울려 집에서 가져온 것으로 낸다 치고 이들의 식생활만 보자.

공장이나 그 부근에서 거처하는 경우 교통비가 한 푼도 안 든다 치더라도 한 달에 연탄값으로 900원(사실은 더 든다), 한 달에 쌀 세 말을 먹는다면 100원씩 잡고 2천100원이 들어간다. 따라서 월급이 3천원이면 부식 값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써 버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니 변변찮은 도시락을 차마 동료들 앞에서 먹을 수가 없어 도시락을 들고 인적이 없는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 몰래 먹는다.

이것도 안 되면 아예 도시락을 싸 오지 않고 공장 앞 어두운 복도 여기저기에 있는 떡장수로부터 20원에서 30원어치의 떡을 사서 허기를 달랜다. 신발값·옷값 등은 아예 무시했을 때의 얘기다. 진료소 설치계획은 ‘아프리’의 의료기자재 지원과 ‘메리놀회’의 의약품 지원으로 동화상가 옥상에 ‘시장상가 근로자 복지의원’을 그해 2월21일 문을 여는 것으로 성사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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