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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 20] 화재로 멀어 버린 눈, 기독교와 쌍문동을 만나다
▲ 이소선의 가족이 살던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일대 판자촌. 전태삼
▲ 쌍문동 시절 이소선의 집. 전태일이 직접 지었다. 전태삼

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남편은 얼마 동안 집안에서 일을 하는가 싶더니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에서 벗어나기는 진작 틀린 사람인가 보다. 술을 마시면 슬금슬금 집안을 불안에 빠뜨렸다.

이소선은 주인집에 여러 가지로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없다고 했는데 한꺼번에 네 명이나 생겼으니 주인이 뭐로 볼 것인가. 이소선은 아이들한테 단단히 주의를 줬다. 태삼이·순옥이·순덕이 등 어린애만 셋이었다.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서 놀거나 화장실에도 가지 말고 방안에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볼일이 있거나 화장실에 갈 때면 한 명씩 조용히 나갔다가 들어왔다.

어느 날 집주인 아주머니가 이소선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애들이 몇이나 되요?”

어렵게 모은 재산 화재로 날려

이소선은 주인에게 숨긴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던 터여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아주머니. 방을 구할 수 없을까 봐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린애가 셋이 있어요. 애들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애들이 많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애들을 그렇게 방안에 가둬 놓고 키워서야 되겠습니까. 보통 애들처럼 까불거나 장난도 치지 않고 참으로 착한 애들이군요.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밖에서 놀게 하세요.”

아주머니는 상당히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전태일은 구두닦이·신문팔이·껌팔이, 때로는 우산 장사 등 뭐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1965년 봄께,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남산동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갈 무렵인 1966년 이소선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에 큰 화재가 났다. 그 화재로 그동안 힘겹게 장만한 세간살이며 재산이 몽땅 타 버렸다. 이소선의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소선은 그때 충격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그동안 시력이 좋지 않았는데 화재가 나자 완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재를 당한 이재민들은 남산국민학교에 수용돼 적십자사에서 마련해 준 천막 하나에 두 가구가 생활해야 했다. 맨몸뚱이만 남아 있는 처지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을 형편도 아니었다.

“태일이 어머니, 나 따라서 교회에 나가 보자고.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눈이 떠질 거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쌀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교회는 무슨 교회예요. 나는 내가 모시는 신장님이 계시는데 신장님이 노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소선은 이전부터 친정어머니가 가르쳐 준 신을 집안에 모셔 놓고 섬기고 있었다.

“태일이 엄마, 그래도 내 말 한번 들어봐.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은혜를 베푸실 거야. 지금 상황에서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눈을 뜰 수 있을 거야.”

쌀집 아주머니는 이소선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설득했다. 이소선은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쌀집 아주머니가 저렇게나 간곡하게 말씀하시니 그 아주머니의 정성을 봐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쌀집 아주머니를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나가던 교회를 여러 번 다니면서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게 됐다.

쌍문동 208번지 판잣집으로 이주

“하나님, 저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넷이나 있습니다. 저 어린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데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으면 저 어린 자식을 누가 돌보고 키우겠습니까. 부디 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어린 자식들을 돌보게 해 주십시오.”

이소선의 기도는 차츰차츰 이뤄지기 시작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던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소선은 더욱 열심히 기도를 했다. 이소선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눈을 뜨게 됐다. 이때부터 이소선은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소선뿐만 아니라 식구 전체가 기독교 신자가 됐다.

남산동 화재민들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돼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됐다. 이소선의 가족은 미아리로 갔다가 거기에서도 살 수가 없어 도봉산 기슭의 공동묘지 근처에 판잣집을 지어 그곳으로 옮겼다. 그 당시에는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 미아리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 내려 한 시간 남짓 걸어가야 공동묘지 근처가 나왔다.

도봉산 공동묘지 근처에 전태일이 직접 판자로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화재민들이 한 집 두 집 모여들어서 자연히 마을을 이루게 된 곳, 여기가 바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다.

도봉산 기슭으로 옮긴 이후 거처는 어느 정도 안정됐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친구들을 이 집으로 많이 데려왔다. 좁은 집에서 많은 친구들과 모임을 하다 보니 방이 좁아서 태일이는 무허가 집의 방을 점점 넓혀 갔다. 이소선의 남편 전상수는 지병을 앓다가 1969년 6월 사망했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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