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 레닌동상 앞에서. 김성열
▲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김성열
▲ 모스크바 마르크스동상 앞에서. 김성열
▲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연윤정

“러시아혁명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니 책에서만 보던 글들이 마치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회장 김정근)가 지난달 14일부터 21일까지 7박8일간 진행한 러시아혁명 유적지 답사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이 단장을 맡고 노동·사회운동 원로와 노조활동가 등 24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에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나라, 러시아 답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러시아 노동자의 여유와 안전, 혁명의 결과물”

“91년 소련이 붕괴했는데 그 이후가 궁금했습니다. 90년대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 많은 혼란을 겪었잖아요. 그런 러시아의 현재를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답사에 참가한 공군자 서울노동광장 집행위원장의 참가 동기다. 이런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답사단 상당수는 80~90년대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다.

“철도역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보수공사·거리청소를 하는 노동자들을 유심히 봤어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 있게 일하더군요. 이것 역시 혁명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러시아는 주 5일제·하루 8시간 노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답사단이 방문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두 평일 교통체증이 심각했다. 그런데 토요일이면 거리가 한산해졌다. 답사단은 답사 마지막날이던 지난달 20일 토요일 그런 광경을 지켜봤다.

“모스크바에서 공사현장을 주로 봤는데요. 안전을 부쩍 강조하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김숙희 '카페 봄봄' 매니저의 감상이다. 900년 역사의 도시인 모스크바에서는 크렘린 내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보수공사가 진행됐다. 대부분 건물의 실물에 가까운 실사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미관을 고려하면서도 행인들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구조였다. 김 매니저는 “노동자들이 안전모와 작업복을 걸치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다닌다”며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스크바를 안내한 정소영 가이드는 “러시아인 친구들이 세월호 참사 당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며 “한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전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존의 선택'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답사 참가자들은 러시아 공공재에 관심을 보였다. 김재길 철도노조 정책실장은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사회주의 제도의 장점이 많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사회의 질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러시아인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적극적인 정당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고 했다. 김 실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정당에 가입해 활발히 토론한다고 한다”며 “사회변혁을 위해 대중이 준비하고 경험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러시아인의 의식과 제도의 수준이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명식 철도노조 조합원은 “개인적으로 지하철역이 궁금했다”며 “1935년 도입된 지하철이 아직도 깨끗하고 편리하게 관리되고 있는 데다 샹들리에와 예술작품으로 장식된 지하철역사는 하나의 궁전이자 예술공간 같았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흔적이 지워지고 자본주의가 더욱 몰아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성열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조합원은 “모스크바에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혁명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며 “코민테른 본부에 가서 조선공산당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것 역시 쉽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아쉬워했다.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

답사단은 여행 짬짬이 평가회의를 했다. 지난달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김금수 단장의 숙소에 24명의 단원이 술 한잔 곁들이면서 답사 중간평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과거는 미래의 어머니”라며 “60~70년대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고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정도의 목표를 잡고 한국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2002년 217일간 파업을 하다 해고된 김영숙 전 보건의료노조 여의도성모병원지부장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만든 대선배들과 이번 여행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며 “현실에 충실하려면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밝혔다.

답사단은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포진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색함은 잠깐, 금세 친해지고 배려하며 여행을 함께했다. 나순자 답사단 집행위원장은 "원로들께서 끝까지 건강히 임해 줬고 참가자들끼리 사이가 정말 좋았다"며 "내년에 연구회가 스페인 내전 답사를 추진한다는데, 꼭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60대 후반인 정길상 전 진보사랑 감사는 “소련이 무너졌을 때 우리 민족에게 닥칠 후폭풍을 걱정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여행의 의미가 남달랐다”며 “여행을 함께하면서 후배들에게 기대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답사단에서 유일한 20대였던 김상협씨는 “학생운동 시절에 바라보던 사회·노동운동은 표면적 모습이었던 것 같다”며 “답사를 하면서 선배들의 과거와 현재를 들었는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러시아혁명 답사가 던진 숙제

답사는 끝났다. 여행 내내 고민했던 ‘위기의 노동운동’이라는 현실로 되돌아온 지금, 그들은 답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이성재 전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장은 “답사가 우리 노동운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은 과도하다고 생각한다”며 “실패한 사회주의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분명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자본주의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음이 확인됐다는 사실”이라며 “대안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규 전 한국진보연대 민생위원장은 “자본주의 유입 뒤에도 사회주의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라는 이분법적인 틀을 깨고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진보운동 역시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양성과 복합성을 고민해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답사기간에 가진 고민을 실천하겠다는 참가자도 있었다. 이현숙 인천시 구월지역아동센터장은 “러시아 답사 내내 사람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인천시 지역아동센터장들과 함께 답사의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겠다”고 약속했다.

공군자 집행위원장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말을 못하게 됐다”며 “서울노동광장 내부에서 러시아혁명 답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체제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해 보려고 한다”고 소개했다.

김정근 연구회 회장은 “연구회가 답사를 다녀온 뒤 주변에서 ‘사회주의’와 ‘혁명’ 같은, 그동안 잊힌 단어를 언급하더라”며 “이것이 하나의 키워드가 돼 노동운동에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금수 단장은 “직접 경험했다는 것 자체로 중요하다”며 “러시아 답사를 바탕으로 충실히 준비한다면 내년 스페인 내전 답사는 더욱 의미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농노제의 가혹함과 영주의 화려함, 아르한겔스코예

이번 러시아혁명 답사에서 애초 답사지로 예정했다가 가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톨스토이박물관·고리키박물관·코민테른 본부·아르한겔스코예(영주의 집),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크론시타트를 방문하지 못했다.

톨스토이박물관은 레닌이 건립을 지시한 건물이다. 소련 정부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모아 1939년 문을 열었다. 톨스토이 친필 편지·원고·그가 찍은 영화 필름과 육성이 녹음된 레코드판 등이 전시돼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작가인 막심 고리키를 기념한 고리키박물관도 입구에서 되돌아서야 했다. 휴관이었다. 고리키는 1905년 1차 혁명 당시 투옥돼 외국으로 망명했다. 1907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 참석했다가 레닌과 처음 만났다. 그는 1913년 귀국한 뒤 볼셰비키와 대립했으나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지지자로 돌아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수로 기억된다.

답사단이 아르한겔스코예를 가려고 했던 이유는 농노제에서 혹독했던 러시아 민중의 현실과 그에 상반되는 귀족이나 영주의 삶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농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를 영주가 합법적으로 사고팔 수 있었던 농노제는 그만큼 공고하고 가혹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 들어서야 폐지됐다. 반면 아르한겔스코예는 모스크바의 베르사유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하다고 한다.

핀란드만 깊숙이 위치한 코틀린섬에 위치한 크론시타트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기지였다. 이곳 수병들은 1905년 1차 혁명과 1917년 10월 혁명에 모두 가담했다. 1921년 소비에트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란은 신경제정책(NEP) 수립의 계기가 됐다.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앞에 서다

답사단은 모스크바에서 예기치 않게 ‘빅토르 최’ 추모의 벽<사진>을 방문하게 됐다. 지난달 16일로 예정됐던 답사 일정이 잇따라 취소되면서 남은 시간 동안 ‘러시아의 인사동’ 아르바트 거리를 찾았는데, 이곳 한편에 빅토르 최 추모의 벽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려인 2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 록가수 빅토르 최는 소련 말기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90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하지만 답사단이 찾은 그날도 꽃을 든 러시아인들의 추모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죽은 지 24년이나 지났지만 러시아인들은 그를 가슴으로 기억했다.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앞에 서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고려인이 러시아로 이주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를 당한 지 77년이 되는 해다. 최근 KBS가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아픈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다뤄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답사단이 러시아를 다니는 동안 고려인의 역사를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추모의 벽 앞에 서자 자연스럽게 고려인을 떠올리게 됐다.

또 하나, 빅토르 안이다. 안현수. 그가 빅토르란 이름을 선택한 것은 “빅토르 최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소치올림픽에서 빅토르 안이 금메달을 따는 순간 “빅토르 최의 혼을 안고 달린 빅토르 안이 승리를 거뒀다”고 축전을 보냈다.

오늘도 러시아인의 가슴을 울리는 빅토르 최의 정신은 저항과 자유다. 당시 그 정신은 옛 소련의 혼란과 억압을 향했다. 그의 사후 24년이 지난 지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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