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칼럼니스트 겸 작가

‘2014년 9월30일 초판 1쇄 발행’이라고 적혀 있는, 그러니까 아직 발행되지도 않은 책을 보고 있다. <헤밍웨이 위조사건>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사에 근무하는 후배가 아직 시중에 깔리지도 않은 책을 보내 준 것이다.

오, 근데 이거 완전 재밌다. 헤밍웨이에 대해 도통한 학자와 사기꾼 기질이 충만한 악당이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는 첫 장면부터 매력이 철철 넘친다. 헤밍웨이가 세상에 알려지기 직전에 쓴 원고 뭉치를 어떤 멍청한 도둑놈이 훔쳐 간 일화를 듣던 중 사기꾼이 학자를 꾄다. 지난 74년 동안 찾아내지 못한 헤밍웨이의 잃어버린 원고를 치밀하게 위조해서 거금을 벌자는 것.

그리하여 헤밍웨이를 중심으로 한 문학사적 담론과 흥미진진한 위조사건이 결합한 경쾌한 스릴러물이구나 단정하려는 찰나, 갑자기 죽은 헤밍웨이가 나타나면서부터 시공을 초월한 SF물이 된다. 주인공 영문학자 존 베어드가 정신이상 살인자로 전락한 사기꾼 캐슬이 쏜 산탄을 입안에 정통으로 맞자(실제로 우울증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1961년 산탄총 총구를 물고 자살한 헤밍웨이의 사인과 일치하는 대목) 이번에는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의 영혼과 일체화돼 자살 순간부터 원고 분실 소식을 듣고 방황하던 젊은 날의 헤밍웨이의 인생을 더듬는다. 아직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한마디로 헤밍웨이를 좋아하고 SF와 스릴러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끝내주게 재밌게 읽을 만한 소설이라는 점.

그나저나 남자들이 왜 그렇게 헤밍웨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층이든 노동자층이든 소설 꽤나 읽는다는 남자들은 모두 헤밍웨이를 좋아한다. 혹시 무려 네 번씩이나 결혼한 전력 때문인가. 설마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하드보일드’라고 불리는 간결하고 드라이한 특유의 문체 때문일까. 그런 문체를 구사하는 대문호가 사냥과 낚시와 복싱과 전쟁과 여자와 알코올로 점철된 매우 거칠고 화려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그렇다. 그는 신화적 남성성의 원형 같은 사람이니까. 시시하게 오래 사느니 남자답게 거칠 것 없이 한바탕 신나게 산 다음, 어느 날 문득 자기 목구멍에 산탄총을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피카소처럼 살아생전 가장 잘나간 작가였지만 책상머리에 앉아서 글이나 끄적인 샌님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칠고 더러운 부두와 무허가 술집에서 진탕 마시고 말썽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내였다. 남자다움이라는 신화를 녹슬지 않게 유지하느라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남자 말이다.

생각해 보니 영화 <고령화 가족>에서 영화감독 동생도, 그가 경멸해 마지않던 그의 형 오함모도 헤밍웨이를 읽고 있었다. 영화감독은 그렇다 치고 전과 5범의 인간 말종, 조카딸의 팬티를 훔쳐 수음이나 하는 더럽게 한심하고 변태스러운 ‘중년 양아치’ 오함모에게 헤밍웨이라니….

박해일과 윤제문이 연기하는 동명의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지만 그 원작 소설에서는 헤밍웨이가 너무도 중요한 코드였다. ‘자신이 진짜 남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헤밍웨이적 허영심’이 모든 남성의 가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까.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는 것만이 참다운 실존이라고 생각했던 헤밍웨이’에 대한 작가의 존경심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건달도 좋아하고 엘리트도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헤밍웨이라는 사실.

뭐 아무렴 어떤가. 헤밍웨이든 <헤밍웨이 위조사건>이든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 듣자하니 오십대가 넘어 소설이나 시집을 읽는 중년 남자들이 많아졌다고 하던데, 이참에 버스나 지하철 혹은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책을 읽는 멜랑콜리한 문학 중년들이 아예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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