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닌이 1917년 2월 혁명 뒤 망명지에서 귀국하는 봉인열차를 타고 4월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핀란드역 광장에는 레닌동상이 서 있다. 연윤정 기자
▲ 핀란드역에 전시돼 있는 레닌의 봉인열차. 연윤정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제정러시아 200년 수도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을 빼닮았다. 러시아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면서 제정러시아의 모순을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러시아혁명 유적지 답사단(단장 김금수)은 지난 17일 모스크바에서 국내선을 타고 1시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은 300년이 지나도록 여전한 자태를 뽐낸다. 도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핀란드만으로 흐르는 네바강은 도시 한가운데를 휘감는다. 수많은 운하와 다리들이 도시를 한껏 치켜세웠다. ‘북방의 베니스’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잦은 도시명 변경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부침이 컸다. 표트르대제가 독일식 이름으로 지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식 페테르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4년 레닌 사후에는 스탈린이 ‘레닌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의 레닌그라드로 명명했다. 91년 소련이 붕괴한 뒤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도 3년간 항복하지 않고 기아와 고통을 견디며 맞선 곳이다. 도시의 별칭은 ‘영웅의 도시’다.

“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17년 4월16일 밤, 레닌은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중간에 하차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망명지 스위스를 출발해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러시아는 열차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의 이름을 역명으로 정한다.

레닌은 그해 2월 혁명 소식을 망명지에서 들어야 했다. 러시아 노동자와 민중은 굶주림과 전쟁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케렌스키를 위시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레닌, 그는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쫓기는 몸이었지만 위험하더라도 돌아가야 한다고 여겼다. 핀란드역 광장으로 나온 레닌은 그를 마중한 볼셰비키 당원과 병사·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을 상상했습니다. 과연 레닌은 어떤 심정으로 달려왔을까요. 혁명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뜨거운 열정이 솟구치는 한편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회한이 동시에 밀려오지 않았을까요. 지금 바로 그 현장에 있는 거잖아요.”

이성재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조합원은 핀란드역을 인상 깊은 곳으로 꼽았다. 답사단이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도 핀란드역이었다. 세련된 현대식 역사로 탈바꿈해 있었다. 핀란드역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은 100년 전에도 그랬듯이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행을 맞았다.

“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레닌 동상에 적혀 있는 문구다.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의 첫 일성이었을까.

“몇 년 전 레닌 동상 외투자락 속에서 사제폭탄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 최선도씨에 따르면 당시 사제폭탄이 터져 동상 일부가 훼손됐다고 한다. 지금은 보수를 해서 말끔한 상태다.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는데, 레닌이 탔던 봉인열차가 핀란드역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역사에 이야기하면 역무원이 친절히 안내해 준다. ‘293’이란 번호를 단 봉인열차는 오늘도 레닌을 기억하며 핀란드역을 지키고 있다.

혁명의 신호탄 쏘아 올린 오로라호

“쾅!”

한 방의 함포소리가 10월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발틱함대 소속의 전함 오로라호가 1917년 10월25일 밤 9시40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던 겨울궁전을 향해 함포를 쐈다. 이튿날 새벽 2시께 겨울궁전은 볼셰비키 혁명군에 점령당했다.

100년 전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오로라호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1945년 이후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앞서 러일전쟁에도 참전했던 전함이다.

네바강에 당당히 떠 있는 오로라호는 아직도 과거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답사단은 오로라호에 오를 수 없었다. 수리 중이어서 박물관 문을 닫았단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로라호 주변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가 있다. 표트르대제가 스웨덴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1703년 5월 요새를 건설한 날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탄생의 시초가 됐다. 표트르대제는 171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다. 그곳에서 네바강을 따라 내려가면 1825년 전제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요구하며 청년귀족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난을 기념한 데카브리스트광장, 스웨덴군 뱃머리로 장식한 배코 등대(로스트랄 등대), 표트르대제의 동상인 청동기사상, 러시아 최초의 대학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 나온다. 대학에는 1897년 최초의 한국어 강좌가 개설됐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이 이 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 1905년 1차 혁명과 1917년 2차 혁명의 주력군 푸틸로프 공장. 현재는 키롭스키 공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정러시아 모순과 혁명 유산의 공존

겨울궁전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제정러시아 차르의 거처였던 곳이다. 에메랄드빛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 당초 겨울궁전 옆에 예카테리나대제가 수집한 미술품을 보관하기 위해 ‘은둔자의 오두막’이라는 뜻의 에르미타주를 따로 건설했다. 겨울궁전과 에르미타주가 다리로 연결돼 있다. ‘대옥좌의 방’을 비롯해 곳곳이 화려함의 극치였다. 가이드 최선도씨는 “차르가 궁전에서 자주 잔치를 벌였는데 노동자들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일했다”며 “노동자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설명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힐 정도로 방대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예카테리나대제가 수집한 미술품에다, 10월 혁명 뒤 귀족과 지주로부터 압수한 작품들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유물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까지 전시돼 있다.

겨울궁전은 혁명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1905년 니콜라이 2세 시절 황실군대는 황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러 겨울궁전으로 행진하던 노동자들에게 발포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노동자 500여명이 학살됐고 3천여명이 다쳤다. 1905년 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그럼에도 제정러시아는 달라지지 않았다. 차르의 압제는 여전했고, 민중은 굶주림과 전쟁에 시달렸다. 그로부터 12년 뒤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겨울궁전은 2월 혁명 때 임시정부 청사로 쓰였다. 볼셰비키 혁명군은 겨울궁전을 습격해 점령함으로써 10월 혁명 대서사의 시작을 알렸다.

오로라호 함포소리를 신호로 볼셰비키 혁명군이 겨울궁전 광장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그들은 혁명의 승리를 확신했을까.

겨울궁전에는 10월 혁명 당시 경비를 섰던 임시정부 병사가 연행된 장소가 보존돼 있다. 그곳의 시계는 새벽 2시10분을 가리키고 있다.

혁명의 주력군 ‘푸틸로프 공장’을 찾다

“혁명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상공업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전형적인 상공업 도시였습니다. 현재도 도시 외곽에 공장들이 많이 남아 있지요.”

1905년 1차 혁명과 1917년 2차 혁명의 중심에는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혁명의 주력군으로 자리매김했다.

답사단은 19일 역사적 현장인 푸틸로프 공장으로 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최대 금속공장이다. 푸틸로프 공장은 현재 키롭스키 공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김금수 단장은 “혁명 당시 이곳에서 일한 노동자만 1만2천명에 달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규모”라고 말했다. 혁명 당시에는 기관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는 1905년 혁명을 촉발시킨 파업을 벌였고 도시 전체의 총파업을 이끌어 냈다.

극심한 공황과 실업자 증가, 임금저하에 신음하던 중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를 계기로 노동자들이 폭발했다. 1917년에도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2월 혁명을 촉발시켰고 10월 혁명을 지지했다. 공장 앞 안내도에 따르면 시대별로 공장에서 생산한 생산품이 다르다. 24년 포드자동차 조립, 2차 세계대전 때는 탱크 등 무기, 60년대부터는 트랙터 등 농기계를 만들고 있다. 지금은 민간이 운영한다.

답사단은 푸틸로프 공장을 거쳐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으로 이동했다. 차르의 여름 거처였는데, 규모가 여의도의 4배라고 한다. 도시 중심부에서 1시간 가량 걸리는 외곽에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만들었는데, 정원에는 140개의 분수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 낙차를 이용해 분수를 가동했다. 여름궁전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120만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물을 끌어왔다. 여름궁전은 핀란드만에 접해 있다. 경찰에 쫓기던 레닌은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통해 러시아를 탈출했다고 한다.
 

▲ 제정러시아 차르(황제)의 거처였던 겨울궁전. 현재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연윤정 기자
▲ 10월 혁명의 본부였던 스몰니 학원. 레닌이 이곳에서 혁명을 지휘했다. 연윤정 기자


혁명의 심장부 스몰니 학원을 만나다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날. 답사단이 찾은 곳은 마지막까지 아껴 뒀던 스몰니 학원이었다. 10월 혁명이 발발한 뒤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군은 스몰리 학원을 혁명본부로 삼았다. 당초 귀족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학교였는데, 마침 방학 중이어서 혁명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레닌은 10월25일 겨울궁전으로 향하기 전 이곳에서 연설을 했다.

스몰니 학원은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인 1918년 3월까지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레닌 집무실을 비롯해 당시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등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답사단은 보지 못했다. '공사 중' 펜스가 둘러쳐져 있는 게 아닌가. 펜스 안에 서 있는 레닌의 동상만이 답사단을 환영하는 듯했다.

현재 스몰니 학원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된다. 시청사는 마린스키궁전에 위치해 있다.

답사단은 크론시타트를 제외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21일 귀국길에 올랐다.

수성하지 못한 러시아혁명이 던지는 메시지

 

▲ 1917년 10월26일 새벽 볼셰비키 혁명군이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당시 임시정부 병사들이 연행된 방이다. 방에 있는 시계에는 연행되던 시각인 새벽 2시10분이 고정돼 있다.연윤정 기자

“책상 앞 강의가 아니라 노동자가 처음으로 세상을 자각하고 1917년 혁명을 이뤘는데 그 현장을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것입니다. 선배들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다만 우리는 공성뿐만 아니라 수성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러시아는 피의 희생을 통해 꿈을 이뤘지만 수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박중기 전 추모연대 상임의장은 7박8일간의 답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러시아혁명은 성공했지만 70여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 홍명옥 보건의료노조 인천성모병원지부장은 “지금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이 엄혹하다”며 “러시아 답사에서 당장 답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모습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금수 단장은 “노동운동의 미래와 장기전략 문제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라며 “이번 답사가 한국 사회 변혁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답사 프로그램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나왔다. 이성재 한국지엠지부 조합원은 “러시아 현지인들로부터 러시아혁명 전후의 삶과 고민을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순자 답사단 집행위원장은 “첫 러시아 답사이다 보니 과거와 현재의 러시아를 충분히 모르고 간 것 같다”며 “많은 공부와 준비를 통해 현재 러시아혁명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고찰한다면 더욱 의미 있는 답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사진=연윤정 기자
 

 '인민의 고혈'로 세워진 이삭성당


국민의 다수가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모스크바는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많은 성당이 들어서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성 이삭 대성당이다. 러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세계에서는 세 번째다.

1818년부터 1858년까지 40년간 공사가 이뤄졌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50만명이다. 황금빛 돔을 만드는 데 100킬로그램이 넘는 금이 사용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늪지대이다 보니 성당을 건설할 때 기초를 다지기 위해 밑바닥에 2만4천개의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대규모 궁전과 성당 건축에는 돈 없고 가난한 농노나 민중이 동원됐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인민의 뼈와 고혈이 녹아 있다. 가이드 최선도씨의 말이다.

“이삭성당은 오로지 인력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성한 성당을 건설하는 데 동물이나 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논리였죠. 기둥 1개가 140톤, 문 한 짝이 10톤입니다. 누가 옮겼겠습니까. 인민의 고혈로 만들어진 성당인 셈이죠.”

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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