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비정규(기간제) 근로자들이 금전적 보상이라도 받겠다며 노동위원회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요. 노동위에서 사건이 처리되는 사이 고용계약 기간이 종료될 경우 권리를 구제받기가 매우 힘듭니다. 근로관계가 종료되면 구제이익도 소멸한다는 법원의 판례 때문인데요. 법의 형식논리 때문에 근로자들이 피해를 당하더라도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던 거죠. 법을 고쳐서라도 억울함을 줄여야 합니다.”

박길상(62)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박 위원장은 “노동관계 분쟁의 신속·공정한 해결이라는 노동위의 기능에 비춰 보더라도 노동위가 피해를 호소하는 비정규 근로자에 대한 구제명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중노위의 확고한 방침이고, 현재 구체적인 입법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6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노위 위원장실에서 박 위원장을 만났다.

노동부와 한집 살이 9개월 … “공정성 지키면 독립성 저절로”

- 이달 16일로 중노위원장에 취임한 지 1년이 됐는데.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 벌써 1년이 지났다. 그사이 중노위가 서울 마포구에서 세종시로 이전했다. 조직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는 괜찮다. 나도 세종시로 집을 옮겼다. 공기도 맑고 나 같은 사람이 지내기에는 좋다.”

- 지방이전에 따라 업무환경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지난해 12월16일 이전했으니 9개월여가 흘렀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직원이 많은데 장거리 출·퇴근하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 조직을 이전하면서 가장 걱정을 많이 한 부분은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공익위원들이 세종시까지 내려와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위원들은 모두 현업에 종사하는 분들이다. 따로 시간을 내야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아무래도 거리적으로 멀어졌으니 오가는 데 불편함이 있고, 회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서울에 있을 때와 비교해 크게 나빠진 점은 없다.”

- 민원인들은 불편을 호소한다. 세종시까지 오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재심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중노위가 세종시로 이전함에 따라 충남 이남 지역 민원인들의 접근성은 나아졌다. 문제는 수도권에 계시는 분들이다. 이 문제 때문에 서울에 중노위 분원을 설치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취지에 어긋나고, 민원인들이 분원으로 몰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고심한 끝에 분원설립 계획을 취소했다. 이와 별개로 옛 행정소송법에 따르면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할 경우 중노위 소재지 관할법원인 대전지방법원으로 사건이 배정된다. 민원인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조항이다. 그나마 올해 5월 법이 개정돼 서울행정법원에서도 소송을 진행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 수도권에 계시는 민원인들이 겪었을 불편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불편사항을 귀담아듣고 해결책을 찾아 나가겠다.”

- 중노위 사무실이 고용노동부 청사 안에 있다. 노·사·공익으로 이뤄진 3자 협의체인 노동위가 정부에 예속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올해로 중노위가 출범한 지 60주년이 된다. 그동안 노동위의 독립성 문제는 한 해도 빠짐없이 제기돼 왔다. 그런 맥락에서 노동법원이 대안으로 거론되거나, 노동위를 대통령 직속이나 총리 직속으로 교체하자는 의견도 제기됐다. 결과적으로는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노동부 소속이 유지되고 있는데 건물까지 함께 쓰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성 부분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학계 등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9개월 정도 노동부와 한 건물에서 생활하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노동위를 운영하는 데 있어 지리적 여건이나 어떤 건물을 사용하느냐보다 중요한 게 있더라. 조정사건이나 판정사건에서 중립성과 공정성만 제대로 지킬 수 있다면, 노동위가 어디에 있든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거꾸로 노동위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노동부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근무하더라도 국민의 불신을 받게 될 것이다.”

“양대 노총 행사? 불러만 주세요”

- 최근 민주노총 노동위원회사업단 수련회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민주노총 행사에 중노위원장이 참석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던데.

“지난 7월 한국노총 월례강좌에 초대돼 다녀왔다. 최근에는 민주노총으로부터 강사 섭외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민주노총 수련회와 현대중공업 조정회의가 겹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또다시 좋은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참석하겠다. 양대 노총 소속 근로자위원들이 노동위를 위해 애써 주고 계신데 내가 노동계의 부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경영계의 요청에도 응할 것이다.”
 

 


-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노동위가 조정안을 작성해 공표하고, 이를 언론을 통해 보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노동위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노위는 지난 8월 현대자동차 쟁의조정 과정에서 행정지도 결정을 내렸다. 적극적으로 중재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나.

“막상 조정을 해 보면 개별사건도 여러 쟁점이 얽히고설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쟁점에 대해 노사 당사자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위가 중재안을 언론에 공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문제를 꼬이게 할 위험마저 있다. 사건에 따라 노사 당사자에게 노동위가 중재안을 내도 되겠느냐고 의견을 묻기도 한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데 노동위가 법적 근거를 대며 중재안 공표를 고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최근 서울지노위를 비롯한 5개 지노위가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 쟁의행위시 필수유지업무 유지·운영수준과 관련해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다. 노동계는 통신대기업 하청노동자의 파업권을 제약하는 조치라며 반발하는데.

“노조법은 ‘공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업’을 공익사업으로 분류한다. 이를 근거로 사용자측에서 통신업을 공익사업으로 분류해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고, 노동위가 이를 받아들였다. 공익사업으로 분류되면 조정기간이 10일에서 15일로 늘고, 공익적 관점을 우선에 두고 조정을 벌이게 된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필수공익사업에 대한 필수유지업무 유지·운영수준 결정에 관한 것이다. 공익사업장 근로자들의 쟁의행위가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경제를 저해하고 그 업무의 대체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 해당 사업장을 필수공익사업장으로 분류하게 된다. 아울러 쟁의행위시에도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필수유지업무를 지정한다. 현재는 이에 대한 지노위별 현장조사가 진행 중이다. 법적으로만 따지면 지노위별로 각기 다른 판단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안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을 잘 알고 있다. 최대한 공정하게 판단하겠다.”

고 진기승씨 사망 “중노위가 불신 자초했다”

- 올해 7월 기준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 인정률은 지노위 31%, 중노위 35.4%로 매우 낮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 인정률은 30%대로 낮은 수준이다. 다만 여기에 취하와 화해 건수를 포함한 권리구제율은 올해 7월 기준 지노위 81%, 중노위 53.9%로 올라간다. 또 행정소송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전체의 3% 수준이다. 행정소송에서 중노위의 재심판정이 유지되는 비율은 85.3%다. 통계수치를 먼저 밝히는 것은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강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근로자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 인정률이 낮은 이유가 무엇일까 분석해 봤다. 현재는 부당해고 사건과 부당노동행위 사건이 동시에 처리된다. 하지만 인력과 시간의 제약으로 충분한 조사나 심문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분리해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부당해고를 당한 뒤 생활고에 시달리던 전주 신성여객 버스기사 진기승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고인은 지노위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은 뒤 중노위에서 결과가 뒤집혀 법원까지 가야 했다. 고인이 사망한 뒤 법원은 부당해고 판결을 내렸다. 중노위로서는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정말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어째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지, 심판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관련 자료들을 모두 살펴봤다. 그 결과 중노위가 고인으로부터 의혹과 불신을 받을 만한 소지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고인이 제기한 부당해고 사건의 핵심은 신성여객 단체협약 부속합의서의 면책규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다. 지노위는 이 규정을 근거로 부당해고 판정을 했는데, 중노위는 심문과정에서 이 문제를 확인하고도 정작 판정에서는 누락했다. 공교롭게도 사건을 담당했던 중노위 조사관이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노위가 고인으로부터 의혹과 불신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보완에 만전을 기하겠다.”

- 비정규직 차별시정제도가 도입된 지 7년이 넘었다. 이달 19일부터는 비정규직을 차별한 사업주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중노위의 고민은 무엇인가.

“이달 시행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비정규직 차별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기존의 차별시정제도에 따르면 개별 근로자가 당한 차별행위만큼만 금전보상이 이뤄진다. 그런데 새로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차별행위로 발생한 피해의 3배에 달하는 금전보상을 해야 한다. 또 노동위가 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의 시정을 명령할 수 있다. 아울러 노동부 장관은 차별시정을 신청한 개별 노동자뿐 아니라 동일사업장에서 같은 차별을 받아 온 모든 노동자의 권리구제를 명령할 수 있다. 그런데 제도시행 초기다 보니 홍보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건이 아직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노동계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주기 바란다.”

‘교차 배제’ 공익위원 선임방식 “바꿀 때 됐다”

- 노동위 공익위원을 노사의 ‘교차 배제’방식으로 선임한다. 노사 양측의 의견이 극단으로 기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다. 문제는 노사 양측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배제한 결과 ‘할 만한 사람은 다 빠지는’ 모양새가 됐다.


“이전에는 투표로 공익위원을 결정했다. 노사가 각자 선호하는 사람을 뽑은 결과 위원 간 대립과 갈등이 심각했다. 그래서 교차 배제 방식을 도입했는데, 지적한 대로 할 만한 사람은 다 빠지는 문제가 나타났다.

다행스러운 점은 노사 모두 교차배제 방식의 문제점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와 관련해 공익위원 추천은 정부가 하고, 노사는 배제권만 갖도록 하자는 의견이 제안된 바 있다.”

- 공익위원 추천권을 정부가 갖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공정성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어차피 노사에게 배제권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특정 인물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균형이 맞춰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방식이든 노사단체와 노동위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또 공익위원 선임 방식을 바꾸려면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작업은 아니다.”

- 중노위원장 임기가 앞으로 2년 남았다. 역점을 두는 사업이 있다면.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퇴직자로 생활하다가 7년 만에 중노위원장직을 부여받았다. 지금의 자리가 내 생애 마지막 공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노동위에 대한 국민의 의혹과 불신을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많이 고민한다. 의혹과 불신을 신뢰로 바꿀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다. 이를 위한 제도개선에 힘쓸 생각이다.”

- 제도개선이라고 하니 추상적으로 들린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 줄 수 있나.

“비정규직이 크게 증가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부당하게 해고된 뒤 노동위를 찾는 기간제 근로자도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지노위 초심이나 중노위 재심이 진행되는 사이 해당 근로자의 고용계약이 종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 ‘근로관계가 종료되면 구제이익도 소멸한다’는 법원의 판례에 따라 지노위나 중노위도 ‘각하’ 결정을 내려 왔다. 법의 형식논리에 얽매인 결과다. 근로자 입장에선 피해를 당하더라도 억울함을 풀 길이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최근 초심과 재심에서 기간제 근로자의 부당해고를 인정하는 판정을 내렸지만, 대법원에 가서 모두 패소했다. 노동관계 분쟁의 신속·공정한 해결이라는 노동위의 기능에 비춰 보더라도 노동위가 피해를 호소하는 비정규 근로자에 대한 구제명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판례를 바꾸기 어렵다면 법을 바꿔서라도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권리구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중노위의 확고한 방침이다. 현재 구체적인 입법방안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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