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렘린 궁전·성 바실리성당·레닌의 묘·국립역사박물관·굼 백화점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붉은 광장 주변을 감싸고 있다. 연윤정 기자
▲ 붉은 광장에 위치한 레닌의 묘. 피라미드 형태다. 묘지 뒤편에는 아내를 비롯한 혁명동지들과 10월 혁명 당시 순국한 병사들이 묻혀 있다. 연윤정 기자
▲ 크렘린 내부 대회궁전. 소련 공산당 대회나 중앙위원회 총회장으로 이용됐다. 연윤정 기자
▲ 모스크바대학. 전형적인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 연윤정 기자
▲ 옛 중앙혁명박물관에서 근현대사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러시아혁명사 자료가 전시돼 있다. 연윤정 기자

러시아. 시베리아를 포함한 광활한 땅 덩어리, 수도 모스크바, 푸틴 대통령, 그리고 옛 이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아마 이 정도일 것이다. 그만큼 러시아는 멀고도 막연한 느낌을 준다. 국내에서는 변변한 러시아 여행책자 하나 구하기 힘들다. 그런 러시아를 ‘러시아혁명 유적지 답사’라는 이름을 걸고 여행에 나선 이들이 있다.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회장 김정근)가 지난 14일부터 21일까지 7박8일간 러시아 대장정에 나섰다.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이 2007년부터 노조활동가를 대상으로 시작한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모임에 뿌리를 둔 연구회는 지난해 6월 출범했다. 지난 8년간 학습모임을 거쳐 간 이들만 100명이 넘는다.

러시아 답사단은 24명으로 구성됐다. 김금수 명예이사장이 단장, 나순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비롯한 노동·사회운동 원로들과 민주노총·보건의료노조·금속노조 소속 현장 활동가들이 답사단에 합류했다.

국영항공사에서 본 낫과 망치

2014년 9월14일. 답사단은 러시아항공 아에로플로트에 올랐다. 국영항공사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상징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는 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런 러시아에서 소련의 상징이 23년이 지난 지금도 쓰이고 있었다.

8시간의 비행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우랄산맥이 정말 웅장하더군.”

창가에 앉았 있던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감탄이다. 유라시아로 불리는 러시아는 우랄산맥 서쪽을 유럽, 동쪽을 아시아로 분류한다.

모스크바 일정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교통체증이 매우 심각한 편이죠.”

일행을 맞은 가이드 권다빈씨는 보험을 들듯 한마디 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30분 거리라는데 2시간 넘게 걸렸다.

모스크바의 공식 인구는 1천400만명이다. 러시아에서는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도시 간 이동시 거주자등록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거주자등록증을 갖고 있지 않은 비공식 인구까지 합치면 모스크바 인구는 1천900만명에 육박한다. 비공식 인구 500만명은 주로 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 등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한 사람들이다.

늦은 시간 도착한 일행은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으로 향했다. 김금수 단장의 고향후배이기도 한 지호천 모스크바한인회 회장이 답사단을 맞았다. 지 회장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현재도 모스크바 체류 한인이 1천200명에 불과한데, 아마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러시아 물가가 한국의 3배 정도 됩니다. 빡빡하죠. 치안은 안전한 편이고요.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가 시끄러운데요. 유럽기업의 러시아 진출이 막히는 바람에 한국기업 입장에서는 유리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이러니하죠."

그러고 보니 한국과 러시아는 최근 밀접한 사이가 됐다. 올해부터 양국 간 무비자 협정이 시행됐으니까. 덕분에 답사단은 비자 없이도 편안히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붉은 광장의 슬픔과 영광

“크렘린에서 적기가 내려진다.”(동아일보 1991년 12월21일자)

91년 12월31일 크렘린에서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선명한 적기가 내려졌다. 소련이 안녕을 고한 날이다. 23년이 지난 지금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된 15일 답사단은 붉은 광장과 크렘린, 볼쇼이 극장을 중심으로 시내투어에 나섰다. 모스크바에서 첫 방문지, 붉은 광장은 크렘린 궁전 북동쪽으로 길이 700미터, 폭 100미터 가량 펼쳐져 있다. 이름 때문에 소련과 사회주의의 유산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어원이 러시아어 ‘크라스나야’(붉은)와 ‘크라스느이’(아름다운)라고 한다. 붉은 색을 아름다운 색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애초 붉은 광장은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크렘린 궁전·성 바실리성당·레닌의 묘·국립역사박물관·굼 백화점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붉은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전율을 느꼈어요. 1671년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스테판 라진이 이곳에서 처형됐습니다. 지주와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 간 곳이죠. 1917년 10월 혁명 당시에는 백군과 적군이 일주일간 광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적군이 승리했지만 병사 수백명이 이곳에 매장돼야 했지요.”

붉은 광장은 레닌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성공적인 연설을 한 곳이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승기념 축하 퍼레이드를 한 곳이기도 하다. 최승회 금속노조 현대제철지회 조합원이 러시아 답사의 백미로 붉은 광장을 꼽은 이유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와 빈농이 중심이 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 이를 바탕으로 세계혁명을 꿈꿨던 나라. 그 나라의 심장이 붉은 광장이었다.

성 바실리성당은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힌다. 양파 모양의 알록달록 화려한 쿠폴(둥근 지붕)로 장식된 이곳은 테트리스 게임에 등장해 유명해졌다. 공교롭게도 성당 앞에는 1534년 설치된 공개처형장 로브노예 메스토가 보존돼 있다. 스테판 라진도 이곳에서 그렇게 죽어 갔다고 한다.

크렘린은 건재했다

드디어 크렘린(Kremlin) 내부에 들어섰다. 러시아어로는 크레믈이라고 불린다. 크렘린은 러시아어로 성채나 성벽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대부분의 도시에 존재한다. 다만 대문자를 쓰는 경우만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의미한다. 시초는 12세기 모스크바 공국을 세운 유리 돌고루키가 목책으로 세운 요새였다.

현재는 궁전과 사원·탑 등 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제정러시아 시절 차르(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정교회의 중심지였고, 러시아혁명 뒤에는 소련의 정부청사로 쓰였다. 지금은 푸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다.

그래서인가 경비가 삼엄했다. 예약을 하고 현지 안내인이 동행하는 방식으로 투어가 이뤄졌다. 횡단보도 외에는 도로에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경비원들의 호루라기가 바빴다.

크렘린 입구인 트로이츠카야 탑을 지나니, 소련 시절 대회궁전으로 쓰인 하얀색 건물이 일행을 맞았다. 공산당대회나 중앙위원회 총회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지정 유산인 크렘린 내부에서 유일하게 혁명 뒤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1961년 완성됐다.

하지만 지금은 낫과 망치가 아닌 러시아 국장인 쌍두독수리가 건물 정면을 장식하고 있다. 쌍두독수리는 제정러시아의 상징이다.

반면 성채 모서리에 우뚝 선 탑 5개의 꼭대기에는 각각 붉은 별이 빛나고 있다. 1937년 스탈린 시대에 만들어진 루비별은 직경 3.75미터, 무게 1.5톤에 달한다. 밤에는 조명 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인다. 유럽·아시아 등 5대륙 공산화를 의미한다.

크렘린 내부에는 5개의 성당이 있다. 차르의 대관식이 치러진 곳이자 러시아 국보 1호라는 우스펜스키성당(성모승천성당)이 특히 유명하다. 이 밖에 일부가 깨어져 나간 이반대제의 종루, 나폴레옹 전쟁 당시 빼앗은 프랑스 무기가 진열된 병기고가 눈에 띄었다.

노란색 대통령 관저는 레닌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3층 3개의 작은 방에서 소박하게 살았다고 한다.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도 이곳을 이용했다. 푸틴 대통령은 시 외곽에 관저를 따로 두고 이곳은 집무실로만 사용한다고 한다. 주변 경비가 삼엄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마르크스와 레닌

크렘린 바깥은 어떨까. 오늘의 러시아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을까. 붉은 광장에서 옛 모스크바대학이었던 고풍스러운 국립역사박물관을 지난 뒤 왼편에 위치한 마네지광장과 크렘린 성벽 사이의 알렉산드로프스키공원에 위치한 무명용사의 묘에 다다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용사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 사망자의 절반이 러시아 병사와 국민이라고 한다. 그만큼 치열했던 전쟁이었고 최대 피해국이자 전승국인 러시아는 산화해 간 용사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결혼식을 한 신랑신부는 반드시 이곳에 들른다. 신부는 부케를 바친다. 결혼도 못해 보고 죽은 젊은 병사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내 중심가인 볼쇼이 극장 맞은편에는 마르크스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83년 사망한 카를 마르크스는 10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렇게 외치고 있다.

“마르크스 동상 근처에서 러시아공산당이 자주 집회를 여는데요. 최근에는 러시아 정부가 붉은 광장에서 레닌의 묘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해 공산당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이드 정소영씨의 설명이다.

레닌의 묘는 아직 붉은 광장에 건재하다. 15일 방문 당시에는 행사 때문에 레닌의 묘 주변이 펜스로 둘러쳐져 있었다.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고, 입장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잠들어 있는 레닌을 직접 만나 보고 싶었던 답사단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16일 밤 야경을 보러 다시 붉은 광장을 찾았을 때 펜스가 철거돼 있었다. 레닌의 묘가 오롯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만은 밤이 깊어도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레닌의 묘 뒤편에는 아내이자 혁명동지인 크루프스카야를 비롯해 10월 혁명에서 순국한 노동자·병사들이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러시아는 혁명을 잊었는가

모스크바에는 혁명의 흔적이 많지 않았다. 혁명의 심장부는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16일 방문한 옛 중앙혁명박물관인 근현대사박물관만큼은 1880년대 제정러시아부터 러시아혁명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러시아인 담당자가 해설을 했는데, 그의 말 속에서 러시아혁명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 근현대사에서 한때 지나간 바람 정도로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행 중 한 명은 “사실 박물관과 해설사 모두 실망스러웠다”며 “러시아혁명관이 기대보다 초라했고 해설사도 설명을 건너뛰는 등 초점을 맞추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1917년 2월 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당시 발간된 신문들, 망명지에서 귀국하는 레닌 사진, 레닌이 군중에게 연설할 때 쓰던 확성기를 단 차, 10월 혁명의 신호탄을 올린 오로라호 모형, 10월 혁명 뒤 내전, 적군이 사용하던 총포와 전차, 크론시타트 반란, 1924년 레닌 사망과 초기 묘지 등의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러시아혁명 자료들이다.

하지만 이후로 예정했던 톨스토이박물관·고리키박물관·코민테른 건물·아르한겔스코예(영주의 집) 방문은 무산됐다. 기술적 문제로 휴관하거나 거리상 문제, 교통체증, 여행사 준비 부족이 겹쳐 발생한 일이었다.<상자기사 참조>

우문숙 민주노총 비정규전략본부 비전국장은 “러시아는 혁명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코민테른 건물을 비롯해 혁명을 기억하는 곳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혁명은 지하철에 있었다?

뜻밖의 발견이었다. 가이드 정소영씨는 실망감에 축 처져 있던 답사단을 지하철 역사로 이끌었다. 러시아 지하철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고 한다. 1935년 개통된 지하철은 현재 모스크바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다. 답사단이 간 곳은 키예프역이었다. 지하철 플랫폼이 있는 곳까지 한참을 내려갔다.

“우와, 어떻게 여기가 지하철역이죠?”

답사단은 동시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러시아 지하철역은 하나의 예술 세계다. 상하행선 플랫폼을 사이에 둔 복도는 하나의 궁전처럼 넓고 호화롭다. 각종 예술작품들이 넘쳐난다.

키예프역에는 러시아혁명 당시 연설하는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동지, 병사·민중의 모습이 모자이크 작품으로 곳곳에 전시돼 있었다. 레닌의 초상도 걸려 있었다. 답사단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스크바 지하철역은 전쟁시에는 병원·학교·식량창고 등 다양한 시설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어요. 키예프역은 병원으로 바뀝니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스탈린 양식의 건물 7개가 있다. 이른바 ‘세븐 시스터즈’라고 부른단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대학이다.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은 하늘로 뾰족이 치솟는 고딕양식을 닮았지만 사방이 같은 비율로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거대하고 웅장하다.

모스크바대학 본관에 두 개의 조각상이 하늘 높이 서 있다. 한쪽은 볏단과 낫을 들고 있고 한쪽은 망치와 태엽을 안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주역, 노동자와 빈농을 표현한 것이다. 본관 상판에는 소련을 의미하는 CCCP가 새겨져 있다.

국회에 해당하는 두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얀색 바탕의 규모가 큰 두마 건물 위쪽에는 낫과 망치 상징물이 그대로 쓰인 반면 정문 위쪽에는 쌍두독수리가 자리하고 있다.

혁명의 유산과 자본주의 공존하는 나라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를 채택한 나라다. 하지만 사회주의 유산은 건축물과 공공재, 삶의 모습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러시아 물가는 비싼 편이지만 공공재는 무상이거나 저렴해요. 주거·도로·수도·가스 등은 무상으로 공급받습니다. 상대적으로 국가 통제가 유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지하철 요금은 지난 5년간 2배 가량 올랐어요. 소련 시대에 제공받은 아파트·별장은 소유권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반대로 새로 짓는 아파트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모스크바에서 5년간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정소영씨가 전하는 러시아의 현실이다. 사회주의 유산은 주 5일제·하루 8시간 노동·무상교육·무상의료로 나타난다. 여성은 50세부터, 남성은 60세부터 55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는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커진 관계로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유산을 지우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강한 러시아’를 내걸고 집권한 푸틴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김금수 단장은 “당장 민중의 반발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유산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레닌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은 푸틴의 자기 입지 강화를 위해서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미경 민주연합노조 사무차장은 “TV에서만 보던 모스크바는 어둡고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전혀 딴판이었다”며 “절제된 여유로움을 즐기는 러시아 시민과 아름다운 풍경의 모스크바를 본 것은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는 답사단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 줬다. 러시아혁명의 흔적을 지우려는 가운데 혁명의 장점을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 다음 여행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답사단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 답사단은 17일 혁명의 도시로 떠났다.

글·사진=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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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기사] “코민테른이 누구야?”

43년 해체된 코민테른 본부 정보 ‘깜깜’ … 국립 사회대 들어서

옛 코민테른 본부를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은 레닌의 발기에 의해 1919년 3월 창설돼 43년 5월 해체됐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는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도모했다. 코민테른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조선공산당은 1923년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인정받았다. 코민테른은 또 반제국주의투쟁노선을 제시하면서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 등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제국주의 횡포에 신음하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코민테른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코민테른 본부를 찾아가는 길은 답사단에게 설렘을 안기는 과정이었다.

“코민테른이 누구야?”

정소영씨에 따르면 처음 답사일정을 의뢰받은 여행사의 첫 반응이었다고 한다. 사실 본인도 그 존재를 몰랐고, 러시아 유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국내에도 잘못 알려져 있다. 코민테른 건물로 알려진 곳은 알고 보니 두마 건물이었다. 이미 해체된 지 오래고 어떤 책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정보가 전무한 코민테른 건물.

결국 정소영씨가 근현대사박물관에 의뢰해 찾아냈다. 코민테른 건물은 시내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러시아 국립 사회대학교(에르게세우)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답사단은 그곳을 방문할 수가 없었다. 대학측은 “7일 전 방문단체와 방문자 명단, 방문취지 등을 담은 공문을 접수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라며 “당일 방문은 어렵다”는 대답을 내놨다. 답사단 입장에서는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일생에 단 한 번 러시아를 여행하는 것일 텐데요. 결국 보지 못하고 가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다음에 오게 되는 답사단은 착실히 준비해서 꼭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답사단 참가자들은 한목소리로 기원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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