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 어머니의 길 판화. 홍황기

이소선은 1929년(호적에는 1930년으로 돼 있음) 11월19일(양력 12월30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다. 농촌마을로서 광주(廣州) 이씨들이 사는 집성촌, 동족촌락이었다. 조선왕조 중기에 이윤경·이준경·이덕형 등의 명재상을 배출했던 집안이다. 성서면의 이씨들은 그 이후로 이렇다 할 벼슬을 한 이들을 배출하지 못했고, 다만 깨끗한 선비의 기질만 그대로 지켜 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소선이 태어나던 당시에는 만주침략을 앞두고 왜놈들의 수탈이 극심해져 말 그대로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소선의 아버지는 당시 30대의 청년으로 농민운동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고 있던 이성조씨다.

첫딸과 아들에 이어 둘째 딸로 이소선이 태어났다. 집안 어른과 그의 아버지는 갓난아기가 선녀처럼 예쁘고 해맑았던지 이렇게 자랑하시곤 했다.

“저 가시내 참말로 작은 선녀 같으대이”

“저 가시내 참말로 선녀 같으대이, 이름을 뭐라 지을꼬? 작은 선녀 같으니께 작은(小) 선녀(仙)라고 부를까?”

이리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이소선(李小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소선의 나이 세 살 적인가 네 살 적인가 그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붙잡혀 갔다. 소작쟁의 농민운동에, 지하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해 있다는 것을 왜놈들이 탐지해 냈던지 사지를 결박당한 채 산으로 끌려가 처형됐다. 그의 아버지는 왜놈들한테 죽으면서 “네놈들이 내 하고 싶은 말조차 못하게 막는구나, 하지만 이놈들아, 내 죽어서 바위라도 말을 하게 하리라!”라고 했다고 이소선은 전해 들었다.

3남매를 거느린 작은 선녀의 어머니는 남편도 없이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시가 친지들은 모두 자기 코가 석 자인지라 마음은 있어도 도와줄 형편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소선의 큰언니는 이미 열네 살 나이여서 공짜 밥은 먹지 않을 만했던지 어머니는 큰딸을 눈물을 머금고 친정으로 보내 버렸다. 그것이 생이별이었다.

아홉 살의 오빠와 다섯 살인 소선을 데리고 어머니는 개가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입에 풀칠하자면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소선에게는 ‘일본에 사는 외삼촌 찾아 바다 건너간다’고 속삭였다.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성서면에서 신당고개를 넘어 서재동으로 들어섰다. 금호강을 나룻배로 건너 박곡동, 박실마을로 갔다. 다시 장고개를 넘어 동래 정씨들의 동족촌락으로 찾아들었다. 다 왔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어무이야, 여그는 일본 아니다.”

소선은 어머니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정을 부렸다. 오빠는 아무 말도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후살이 어머니를 따라온 어린 이들 남매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다. 구박덩이, 데림추 신세였다.

“어무이야, 와 우리가 이래 살아야 하노? 우리 나가 살자.”

소선은 나이가 들수록 기가 막혔다. 무작정 어머니의 소매를 붙들고 졸라댔다.

어머니가 후살이하게 된 박실마을 정씨네 집안 형편은 논 두 마지기에 소작을 얻어 하는 논 두 마지기, 그리고 약간의 밭뙈기에 목화·고추·팥·상추·부추(정구지) 따위를 심어 먹는 정도였다. 거기에다 전실·후실 자식들이 올망졸망 매달렸으니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원래 박실은 70여호나 되는 제법 큰 동네인 데다 동래 정씨들의 집성촌이어서 지주와 소작, 양반과 상놈의 갈등이나 차별은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더욱이 소선의 가족은 다른 고장에서 껴묻어 온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던가. 소선은 어머니한테 졸랐다.

“어무이, 산에 가면 송기가 있고, 들에 나서면 다래(목화의 덜 익은 열매)가 안 있나? 굶어도 좋으니 이런 구박 받지 말고 나가 살자.”

이들은 겨울에 냉골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소선은 오빠와 함께 구석방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밤이면 이들 방에 와서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많이 울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활이 주는 압박 속에서 개가할 때 마음먹었던 것은 차차 사라지고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소선은 오빠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개똥을 주우러 나가야 했다. 마을 골목에 있는 개똥은 이들 오누이가 다 줍다시피 했다. 이들은 야단을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개똥을 주웠다. 그 개똥으로 거름을 해서인지 이들 집 곡식이 가장 거름기가 많았다. 추운 겨울 오빠는 소선을 깨우지 않고 혼자 개똥을 주우러 나가려고 했다. 소선은 그때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오빠 뒤를 따라나섰다. 개똥을 한참 줍다 보면 손이 깨질 듯이 시리다. 오빠는 소선을 위해 짚단으로 불을 피워 줬다. 오빠는 소선을 불가에 앉혀 놓고 혼자 개똥을 줍기도 했다.

오빠는 서당에 다니는 듯 마는 듯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빠는 일본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실 오빠는 징용에 끌려간다는 것을 소선한테 알리지 않기 위해 거짓으로 둘러댄 것이다. 소선은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무턱대고 반대했다. 오빠하고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소선아, 내가 일본에 가서 돈 많이 벌어서 부쳐 줄게. 그 돈 가지고 너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가거라.”

오빠는 기어코 일본으로 떠났다. 소선은 울며불며 오빠를 못 가게 말렸지만 어린 소선이 잠든 사이에 오빠는 가 버렸다. 새벽녘에 일어나보니 오빠는 없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소선은 오빠가 공부하러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한참 후에서야 알게 됐다.
 

▲ 박곡리 박실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호강을 전태삼씨가 내려다 보고 있다. 민종덕


식민지에서 데려온 자식으로 살아가기

완고한 구습에 봉건주의가 뿌리박혀 있던 고장이었고, 시절 또한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 산천이었다. 어린애 늙은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손이 부르트도록 일에 매달려야 했다. 이 마을은 와룡산을 에두르고 물 맑은 금호강을 끼고 있어 경치는 아름다웠으나 들판이 넓지 않아 소출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소선은 나무를 하러 다녀야 했고, 밤에는 목화찌꺼기로 불을 밝힌 호롱불 밑에서 미영(무명)을 자아야 했다.

이소선은 1930년대 암담한 농촌의 궁핍한 상황 속에서 가장 천대받고 가장 빈궁한 농가에, 그것도 데려온 자식으로 살아가야 했다.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아프게 겪었고, 봉건주의 폐해를 가장 심하게 당했을 뿐만 아니라 데려온 자식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인간차별을 받아 온 그로서는 인간차별을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치를 떨었다.

왜놈들 등쌀은 지긋지긋했다. 날마다 관솔을 따야 했고, 가마니를 짜야 했고, 목화씨 껍데기를 까는 일을 해야 했다. 왜놈들이 타고 다니는 말에게 먹일 꼴도 해다 바쳐야 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몇 번씩 공출을 바쳐야 했다. 송진이 많이 붙지 않은 관솔을 바쳤다고 퇴짜 맞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소선은 어린 마음에도 인간차별을 깨 부셔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소선은 차별 두는 것에 반항하고, 잘못된 것에 따지기를 잘하는 아이가 됐다.

“가시내가 이렇게 억척스러우니 니가 야시(여우)될 끼가, 미구(이무기)될 끼가? 수굿수굿 좀 못난이처럼 살아 볼 줄을 알아야 편할 낀데….”

소선의 어머니는 따지기 잘하는 딸을 두고 이렇게 나무라기 일쑤였다.

다른 애들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갔다. 소선도 어머니한테 학교 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나. 일은 누가 하나.”

어머니는 대뜸 화부터 냈다.

“아침에 나무하고 관솔 따고, 이런 일 다 해 놓고 낮에 학교에 가면 안 되겠나?”

“야, 학교 가면 뭐 하나? 돈도 안 냈는데!”

어머니는 야단을 친다. 그래도 소선은 학교에 가고 싶었다. 아침나절에 할 일을 부지런히 한 다음에 먼 친척인 동인이 오빠를 따라서 학교로 갔다. 그러나 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실에 들어가 공부할 수가 없었다.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기다리다가 애들이 화장실 가려고 들어갈 때 슬쩍 묻어서 따라 들어갔다.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마을 아이들의 학생의자 밑에 숨어 들었다. 그땐 교실 바닥이 흙이었다. 연필 대신 뾰쪽한 돌을 주워 바닥에다 그리면서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구구단을 다 외운 사람에게는 면장 딸도 신어 보기 어려운 고무신에다 연필과 잡기장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소선은 그 상품이 너무도 욕심이 나서 그날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갔다. ‘일 안 할 폭 잡고, 두드려 맞으면 두드려 맞자’하고 단단히 작정을 한 뒤 내내 명밭(목화밭) 고랑에 엎드려서 구구단을 외웠다. 구구단을 외우다가 밤에 집에 갔다.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어머니한테 매를 맞았다. 매를 맞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낮에 외운 구구단을 복습했다.

드디어 구구단을 다 외운 사람한테 상을 준다는 날이 왔다. 선생님이 구구단을 다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다. 소선은 가슴이 설레었다.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고 자청해서 나섰다. 선생님이 소선을 보고 ‘너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니지 않느냐’며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학생은 없느냐고 물어도 손을 드는 학생이 없자 선생님은 소선을 가리키며 그러면 어디 한번 외워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소선은 벌떡 일어나 그동안 열심히 외운 실력을 발휘해서 똑똑하게 다 외웠다.

“너 참 똑똑하구나.”
 

▲ 박곡 박실마을 경로당 경로당 왼쪽집에는 이소선의 성이 다른 남동생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집 뒷쪽에 학우재가 있다. 민종덕
▲ 이소선이 동네 어르신들한테 '사람차별'을 항의하던 학우재. 민종덕


한없이 가난하고, 한없이 차별받았던 소녀

일본인인 그 선생님은 소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고무신·연필·잡기장을 상으로 줬다. 그뿐이 아니었다. 집안 어른 갖다 드리라며 편지를 써 줬다. 그 편지에는 입학금과 공납금을 면제해 주겠으니 소선을 학교에 보내라는 간곡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집안에서는 야단이 났다. 상으로 타온 고무신도 연필도 잡기장도 다 빼앗아 버리면서 왜 학교에 갔느냐며 소선을 야단치는 것이다.

소선은 학교를 정식으로 다니지는 못했지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씨 문중에 언문을 배워서 시집 온 ‘논뱅이댁’이 있었는데, 소선은 그 논뱅이댁을 찾아가서 언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논뱅이댁은 박실 정씨 문중에 시집 온지 얼마 안 돼 남편은 징용에 끌려가고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홀로 시집살이하는 새댁의 일하는 양이 많았다. 온종일 목화를 골라야 하고 명을 자아야 하는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래서 소선은 그 일을 도와 함께 끝내고 밤늦게 다른 사람 몰래 글을 배웠다.

소선은 밤에 논뱅이댁한테 배운 글을 낮에 산에 나무하러 가서도 그 소리만 하고, 밥을 먹는 시간에도 그 소리만 외웠다. 그렇게 열심히 배웠지만 글자를 종이에다 연필로 쓰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입으로 배운 것이라 글을 읽는 것은 아주 쉽게 읽을 수가 있지만 쓰는 것은 매우 서툴다.

소선의 어린 시절은 한없이 가난하고, 한없이 공부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아무 힘도 없는 시절이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꿈 많은 처녀 시절이 그에게는 반항의 시절이었다.

소선의 나이 많은 의붓아버지의 전 부인이 연어동에서 시집 왔다고 해서 연어댁이라고 했다. 그래서 개가한 그의 어머니도 그냥 연어댁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이 소선을 가리켜 연어댁이 시집 올 때 데려 온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식구들을 가리켜 ‘그것들’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까닭 없이 천시를 하기 때문에 소선은 어디를 가도 ‘너 누고?’하며 묻는 말이 무서웠다. 심하면 자기 아이들한테 소선하고는 놀지 말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선의 친구들이 자기 집에 그를 데리고 가면 어른들이 하도 그러니까 소선한테 “우리 어무이 안 보이는 데서 숨어 있어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소선은 커다란 결단을 내렸다. 그한테 정가 촌수를 못 부르게 하는 것이 서러워서 어른들한테 따지기로 했다. 문중의 어른을 만나러 ‘학우재’로 갔다.

“어르신, 우리 어무이가 정씨 집안에 개가를 했어도 내가 정씨가 아니라 이씨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꺼. 하지만 점두리 엄마는 ‘재하고 놀지 마라, 값어치 없는 애다’하고 나를 따돌리고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나를 업신여기니 이래도 되는 긴가요? 정씨네들이 이럴 양이면 내를 ‘이소선’이 아니라 ‘정 작은선’이라고 바꿔 주든가, 아니면 사람차별을 말든가 해야 할 것 아입니꺼?”

소선의 말을 듣는 문중 어른은 어린것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듣고 보니 경우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재실에서 문중회의가 있으니 회의가 끝날 시간에 오너라.”

이튿날 소선은 재실로 갔다.

“어린 니가 그런 말을 하러 왔을 때는 얼마나 혼자 생각을 해가지고 왔겠노. 그러나 성은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문중에서 집집마다 통보를 해서 니들이 오빠나 헝(형)이라고 부르면 잘 대답을 하라고 해 주꾸마.”

문중 어르신은 안쓰러운 눈길로 말씀하셨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에야 동네 일가 오빠나 형들이 다정하게 대해 주고 호칭도 ‘그것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소선은 마침내 자신이 정가가 되는 것처럼 됐다. 이후부터는 구박을 덜 받고 인간대접을 받은 것이다.

소선의 처녀시절은 외로웠다. 하나밖에 없는 친동기인 오빠는 일본으로 징용을 가 버리고, 성이 다른 오빠 동생은 여럿 있었으나 늘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피어나는 봄의 꽃처럼 부풀어 오르는 처녀의 마음을 남녀유별이 엄격한 시절이라고 해도 억누를 수만은 없었다. 소선은 바깥출입이 금지된 관습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감행했다.

어느 해 설 명절날이었다. 명절이라 모처럼 일손을 잠시 쉬고 동네 처녀들이 모여 놀았다. 이때 소선은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별러 왔던 일을 실행했다. 그것은 번갯불처럼 번쩍하고 불이 터지면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박혀 나오는 ‘사진’이라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자신도 언젠가 한번 사진을 꼭 박아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이 기회에 하기로 해 보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의 혼이 박히는 것이라고 해서 무섭다고 하지만 소선은 사진 박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사진 박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했었다.

“애들아, 우리 오늘 대구로 사진 박으러 가자.”

소선은 설날을 이용해 동네 처녀들을 꼬드겼다. 망설이는 친구들을 설득해 여러 명의 처녀들이 소선을 따라서 사진 박으러 눈길을 헤치고 그 먼 대구로 갔다. 처녀들이 대구에 가 사진관에서 신기한 사진을 박고 난 뒤 시내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미 날은 저물어 버렸다.

한편 마을에서는 여러 명의 처녀들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다. 어른들은 밤중에 등불을 켜들고 마을 처녀들을 찾으러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이윽고 한밤중에 처녀들은 등불을 들고 찾아 나선 어른들한테 발견이 됐다. 처녀들은 저마다 집으로 잡혀가서 흠씬 야단을 맞았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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