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미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비젼)

나에게는 정말 아끼는 후배가 한 명 있다. 이 후배는 대학생 시절에 학생회실에서 같이 밤을 새우며 대동제를 준비하기도 했고,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는 친이모보다 더 친근하게 내 아이들을 챙기곤 했다. 그 후배는 정말로 성실하고 착한 후배다. 그런데 나는 최근 후배의 그 ‘성실함’과 ‘착함’이 싫어졌다.

버티컬블라인드를 만드는 작은 사업장에서 경리·인사업무를 했던 후배는 일요일 외에는 별도의 휴가를 쓰지 못했다. “우리 회사는 연차가 없어.” 왜 휴가를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 노무사인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회사 상시근로자수가 5명 넘잖아. 연차가 없기로 서로 계약했어도 근로기준법에 의해 연차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니까.”

그럼 그 후배는 “우리 회사 사정도 모르면서 그런 얘기 하지 마”라고 내 말을 막아 버린다. 압권은 최근 퇴사를 했는데 9년간 일한 퇴직금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자기가 그 사업장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란다. 요샛말로 ‘헐!’이다. 일을 많이 했으니 많이 받는 게 당연한데, 그게 퇴직금을 안 받을 이유가 되느냐는 말이다.

‘성실해서’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자기 임금이 가장 많다고 ‘착하게’ 퇴직금을 포기하는 ‘쿨’한 후배 앞에서 나는 졸지에 현실도 모르고 법만 들이대는 원칙주의자 노무사가 돼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성실하고 착한’ 이들도 알아야 한다. 법대로 100%를 요구해도 결코 욕심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헌법 제32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근로조건의 기준을 법률로 정하도록 했고, 이에 따라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했다. 1953년 입법된 이후 그 ‘최저기준’은 모성보호와 근로시간단축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조금씩 후퇴하고 있다. 노동자를 부당하게 해고한 사용자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도 삭제해 버렸고, 심지어 경영자가 경영을 잘못해서 닥친 위기를 이유로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정리해고가 합법이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데 똑같은 근로기준법을 두고 사용자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노동법이 규제가 많아서 기업하기 어렵다’며 앓는 소리를 하는 반면 우리의 착한 근로자들은 법이 정한 그 최저기준마저 스스로 양보하고 있으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식인가.

이 땅의 노동자여, 최소한 법에서 정한 것만큼이라도 당당히 요구해서 꼭 지켜지도록 만들자. 일주일을 개근하면 하루의 유급휴일을 받고, 4시간 이상 일하면 30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받자. 1년에 80% 이상 출근하면 자기가 쓰고 싶은 시기에 15개의 연차유급휴가를 쓰고, 사용자 귀책사유로 휴업하는 경우에는 무급으로 쉬는 것이 아니라 평균임금의 70%를 휴업수당으로 청구하자. 퇴직 후 14일 이내에 반드시 퇴직금을 받자. 제발.

그래야 겨우 “기본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야 이 땅에서 기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임금을 떼어먹는 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부로 해고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 아니겠는가.

기업소득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데도 가계소득이 급격히 감소하는 2014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노동자여, 이제는 더 이상 착해지지 말자. 내가 누리는 이 권리가 선배 노동자가 피로써 지켜 낸 노동자의 권리이듯이, 지금 내가 포기하는 권리가 단순히 내 돈 몇 푼이 아니라 후손의 권리를 갉아먹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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