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의 임금체계를 바꿔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에 오래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 점은 반성한다.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노사 양쪽을 설득해 변화를 유도했어야 했는데…. 아쉬운 대목이다.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을 당위적으로만 얘기했지, 정작 밀도 있게 추진하지 못했다.”

이기권(57·사진) 고용노동부 장관의 말이다. 임금체계 개편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노동시장의 주요 의제였는데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통상임금이나 평균임금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제안에 따라 2008년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정부입법을 추진했지만, 노사 간 입장차가 워낙 첨예해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 이 장관의 설명이다. 임금체계 개편의 ‘잃어버린 10년’은 노·사·정의 합작품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장관이 또다시 임금체계 개편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된 임금체계로 기능해 온 연공급제가 노동자들의 직접고용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다. 한 기업에서 오래 일한 노동자에게 근속연수에 비례해 높은 임금을 지급하는 연공급제하에서 기업들은 더 이상 직접고용에 나서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장관은 “임금이 직접고용을 어렵게 하는 지금의 체계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며 “임금의 총량은 유지하되, 체계만큼은 손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집무실에서 이 장관을 만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청년’과 ‘격차’, 그리고 ‘고용생태계’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장관 취임 직전 한국기술교육대 총장을 지낸 이 장관은 특히 청년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금도 페이스북에서 한기대 학생 1천여명과 친구를 맺고 있다고 귀띔했다.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에게 차별 없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고용생태계를 가꿔 나가겠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다.

- 장관 취임 직후 기업규모나 고용형태에 따른 소득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에 주목한 이유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가족이나 사랑, 건강과 같은 답변이 나올 것이다. 나는 그 범주에 고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시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한 개인은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고용률 70% 달성을 위해 청년과 경력단절 여성의 고용률을 높이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의 행복은 일자리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시장 내부격차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다. 가장 높은 층에 대기업 정규직이 있고, 가장 낮은 층에 다단계 하도급 근로자가 있다. 지금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는 분들은 양극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들의 아들, 딸들이 2·3차 벤더(협력업체)로 취업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자리 격차 해소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됐다.”

- ‘고용생태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무슨 뜻인가.

“어떤 완성품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원청근로자들의 수고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하청근로자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다. 따라서 원청기업의 수익이 2·3차 벤더로 흘러 들어가게끔 해야 한다. 원·하청이 공존하고, 이를 통해 미래세대에게 좋은 일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 기업 간 소득격차 해소를 위해 연공급제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한데 젊은 시절 노동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감내하는 대신 나이가 들어 자녀교육비나 주택구입비 등이 늘어날 때 높은 임금을 받는 구조가 연공급제 아닌가.

“평생 받을 임금의 총량만 보면 그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임금체계가 전국적으로 근로자들에게 득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소득격차가 커지고, 하도급 같은 간접고용이 확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공급 임금체계가 노동시장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미래세대에게 차별 없는 일자리를”

이 장관은 연공급 체계가 우리나라 노동시장을 왜곡하는 데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나이가 들수록 소득이 늘어나는 연공급제가 ‘생애소득주기’에 부합했는지 몰라도, 이제는 연공급의 순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외환위기를 거치며 비정규직이 너무 늘었다. 연공급제는 어느새 대기업 정규직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가 돼 버렸다. 노동계 일각에서도 연공급제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본질일까. 비정규직을 늘려 비용을 줄이려는 기업들의 경영관행이 노동시장을 왜곡한 진짜 주범은 아닐까. 이 장관은 기업들의 이런 관행을 ‘편한 길’이라고 지적했다.

- 연공급제가 노동시장을 왜곡한다고 진단한 근거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임금의 성격은 생활급에 가까웠다. 자녀가 크면 들어가는 돈이 늘어나니까 임금을 더 주자는 식이다. 노동시장에 큰 변동이 없었다면 이 같은 방식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간제나 파견·도급 같은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특히 간접고용이 크게 늘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형병원 노사의 쟁의조정을 맡은 적이 있다. 병원 업무조정 과정에서 기존 원무과 직원들을 다른 부서로 보내고 신규로 원무과 직원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때 병원측은 간접고용 방식의 신규채용을 택했다. 그래서 '기존대로 하지 왜 하도급을 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병원측은 '직접고용을 한 뒤 5~6년이 지나면 하도급을 주고 있는 다른 병원과 임금격차가 너무 커진다'고 했다.

연공급이 직접고용을 어렵게 하고, 결과적으로 그 피해가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임금체계가 직접고용을 가로막는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 연공급의 대안으로 직무급이 언급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가 기업의 임금체계를 바꿔 줄 수는 없다. 물론 노동부에 오래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 점은 반성한다.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노사 양쪽을 설득해 변화를 유도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을 당위적으로만 얘기했지, 정작 밀도 있게 추진하지 못했다.

조만간 노동부 안에 임금체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TF) 4개 팀을 구성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을 모아 기업 규모별·업종별 임금체계 개선 사례를 수집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개별기업 노사에 제시할 생각이다.”

- 지금까지 임금체계 개편 논의는 대부분 흐지부지 끝났다. 향후 논의도 그럴 것 같은데.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 논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고 본다. 정부도 개별 노사에 지도지침을 내려보냈다. 100인 이상 사업장의 40% 정도가 대법원 판결에 기초해 임금협상을 마무리했다. 개별기업 노사가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수용하면서 기업의 사정에 맞게 조정을 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장기적으로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가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영해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결과 다른 내용으로 입법이 이뤄지면 이미 노사합의를 마친 40%의 기업들은 또 다른 혼란에 봉착하게 된다. 혼란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

-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현대자동차 노사의 임금협상과 관련해 “노조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회사는 편한 길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어떤 의미인가.

“원청 대기업의 근로자나 노조가 자기 몫을 다 챙기겠다고 하면, 저쪽(협력업체)으로 돌아갈 몫이 없다.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현대차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그 재원이 협력업체 근로자의 임금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회사측에는 편한 길을 버리라고 당부했다. 현대차는 국민의 사랑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지금도 내수 점유율이 70%에 달한다. 그 사랑을 국민에게 되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해외생산을 늘리거나 하도급을 확대하는 그간의 관행을 자제하고, 직접고용을 늘려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

사실 해외에서 생산하는 것이 비용절감에 유리하다. 따라서 국내생산을 늘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회사가 먼저 국내생산을 늘려야 하지 않겠나. 그런 다음 노조에 '생산성 향상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해야 윈-윈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대기업·공공부문 노조, 국민에게 양보해야”

지난해 12월 경찰의 민주노총 난입사건 이후 중단됐던 노사정 대화가 8개월 만에 복원됐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최근 본위원회를 열고 공공부문발전위원회·산업안전혁신위원회·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 구성을 의결했다.

정부의 관심사는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다. 임금·근로시간에 의제를 국한하지 않고, 노동시장의 구조개혁이라는 큰 틀의 논의를 지향하겠다는 구상이다. 한마디로 패키지 딜(Package Deal)이다.

- 현대차 말고도 통상임금의 범위를 놓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기업 노사가 적지 않은데.

“통상임금의 범위를 넓히는 것만이 근로자에게 유리한가 따져 봐야 한다. 통상임금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와 임금수준을 높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통상임금 외에 성과급도 있고, 임금인상 폭을 늘리는 방식도 있다. 하나의 절대선은 없다. 통상임금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기임금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풀고, 임금수준은 노사가 별도로 정하는 방법이 있다.”

- 통상임금 관련 노사합의 경향을 보면 두 가지 모델로 유형화된다. 하나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넣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삼성 모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임금·근로시간·정년연장 문제를 포괄적으로 합의한 ‘패키지 딜 모델’이다. 어떤 유형이 바람직하다고 보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는 문제나 내년부터 시행되는 정년 60세 법제화 등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정부는 개별기업 노사가 긴 호흡으로 협상하면서 패키지 딜 방식으로 합의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다만 정년연장과 연동된 임금체계를 하루아침에 합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먼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임금항목을 단순화해 정년을 연장하고, 향후 2~3년 동안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기업 사정에 맞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모범답안을 내기는 어렵다.”

- 지난해 12월 민주노총 건물에 경찰력이 난입한 사건 이후 개점휴업 상태였던 노사정위가 최근 재개됐다. 노동계는 공공부문, 정부는 노동시장 개혁에 관심이 쏠려 있다. 최근 한국노총이 공공부문발전위 정부측 위원이 차관급이 아닌 국장급이라며 반발했는데.

“한국노총의 걱정은 기우인 것 같다. 나도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직간접적으로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을 여러 차례 만났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 아니겠나.”

- 박근혜 정부 들어 정부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전교조 문제다. (검찰은 지난 29일 김정훈 위원장 등 전교조 지도부 3명에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어떻게 풀어 갈 생각인가.

“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전교조든, 전공노든, 공기업노조든 할 것 없이 하나의 정부다. 국민이 보기에 이들은 그래도 안정적이고, 그래도 살 만한 사람들이다. 앞서 원청 대기업 노사에게 양보를 강조했는데, 공공부문도 다르지 않다. 공공부문 전체가 국민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어떤 명분에 따른 것이든 간에 법은 지켜야 한다. 교원노조법이 만들어질 때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 당시에도 교원노조의 조합원 자격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결론은 입법적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 행정으로 풀어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간과 공무원 채용 과정의 차이점, 공무원 업무의 중립성과 신분의 특수성을 감안해 현직 교사만 조합원에 포함하기로 노사정이 합의한 것이다. 전교조는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인터뷰 : 박운 편집국장

정리 : 구은회 기자

사진 : 윤성희 기자
 

이기권 장관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광주고와 중앙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중앙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노동부에서 감사관·고용정책본부 고용정책심의관·근로기준국장·차관을 역임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과 대통령 고용노사비서관·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한국기술교육대 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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