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아버지’ 김영오씨가 28일 현재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둘째 딸인 유나의 간절한 부탁과 건강이 악화된 모친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미음을 먹는 김영오씨의 모습은 곡기를 끊었을 때보다 더 비장해 보였다. 그런 김영오씨를 보면 그리운 이가 있다. 다음달 3일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고 이소선 어머니다. 지난 88년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최초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대회’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노동형제들이 혈서를 쓰는 걸 보니까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보고 비겁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절대로 죽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죽을힘을 다하면 군부독재를 끝장낼 수 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1929년 경북 달성에서 1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 13살이던 이소선 어머니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2년 후 공장을 탈출한 이소선 어머니는 토굴에서 지낸 지 6개월 만에 해방을 맞이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47년 대구 출신의 재단사 전상수씨와 결혼했다. 이후 48년 전태일을 낳았고, 뒤이어 태삼·순옥·순덕을 출산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54년 서울로 올라왔으나 전상수씨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판자촌을 떠돌아야 했다. 생활 전선에 뛰어든 전태일은 65년 평화시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2년 후에는 재단사가 됐다. 어린 여공(시다)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안타까워했던 전태일은 그들을 돌보려 애썼다.

이런 가운데 전상수씨가 68년 사업 실패에 따른 건강악화로 타계했다. 전상수씨는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을 가졌던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그런 전태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상수씨가 없는 집안의 가장 몫을 해야 하는데 전태일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이소선 어머니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전태일은 친구들과 바보회를 결성했고,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전태일은 이를 바탕으로 근로조건 개선과 관련한 진정서를 노동청에 냈다. 하지만 봉제노동자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전태일은 70년 11월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전태일은 죽어가면서 "엄마,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내가 헛되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한다고 크게 대답해 주세요"라고 이소선 어머니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당시 이소선 어머니는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고 약속했다. 이소선 어머니의 삶이 바뀌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버텼던 이소선 어머니는 요구사항이 관철되자 전태일이 죽은 후 일주일 만에 장례를 치렀다. 그 결과, 70년 11월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이소선 어머니는 낮에는 무료 식당을 열어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500명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또 오후에는 청계피복노조가 주최하는 노동교실을 지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어머니를 청계피복노조에서 떼어 놓으려 거액의 금액을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때문에 이소선 어머니는 77년·80년·81년 세 차례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소선 어머니는 85년 전태일기념관을 개관한 데 이어 86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당시 유가협은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88년 11월4일부터 422일 동안 국회 앞에서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특별법 제정'을 위해 천막농성을 벌였다. 이소선 어머니는 지난 88년부터 매년 11월마다 열렸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해 연설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연설에서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삽니다.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고 했는데 지금도 노동계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41년 동안 노동자의 곁을 지켜 주셨던 이소선 어머니는 2011년 9월3일 영면했다.

"내가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태일이를 만나려고 했어. 그래야 태일이를 만나도 할 말이 있잖아. 네 죽음이 헛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이제 사람답게 산다고 말이야."

이소선 어머니와 김영오씨의 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가 바랐던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김영오씨가 염원하는 ‘4월16일이 없는 사회’는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돈과 이윤보다 생명과 안전을 더 중히 여기는 세상이다. 물론 그런 세상은 벼락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전태일이 산화한 후 41년간 이소선 어머니는 그런 세상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김영오씨도 단식을 중단하며 장기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힘을 모아 달라”는 유가족들의 간절한 호소에 우리가 화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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