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냐.”
지난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답답한 국민이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성토한 말이다. 29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실종된 전무후무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인권·안전 현안이 수두룩한데 정작 정치는 없다. 문제 해결을 기다리다 지친 국민이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다. 광화문광장과 거리 그리고 광화문 역사 안까지 농성장이 없는 곳이 없다. 농성장을 떠나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달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광화문광장이 더욱 분주해졌다. “교황님, 주님의 자녀가 거리를 떠나지 못합니다”라는 간절한 호소가 시복미사가 예정된 광화문광장에서 들린다. 갈 곳 없고 정치로부터 버림받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도 희망 … 연대로 소통하는 광장
뙤약볕이 쏟아지던 지난 7일 낮 광화문광장. 아이들은 분수대 물을 맞으며 요란스럽게 뛰어놀았다. 아이들의 젖은 머리칼이 물에 젖어 반짝였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걸음 뒤 광화문광장 농성장에는 표정을 잃은 중년 남자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고 김유민군의 아버지 김영오(47)씨다. 이날로 27일째 단식농성을 벌이던 터라 김씨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야위었다. 소금과 물로 27일을 버틴 그를 시민들은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문정현 신부를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그의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넸다.
광화문광장의 천막농성장은 그야말로 유가족과 시민들이 엉켜 만나고 서로를 위로하는 광장이다. 유가족이 농성을 시작한 뒤로 천막과 텐트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곳에는 노동·종교·시민단체의 지지농성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단식농성을 함께하고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케이블 협력업체 노동자들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노란 리본을 엮어 목걸이를 만든다. 노동자들은 확성기에 대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해 달라”고 외친다. 서명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는 시민도 있다. 한 시민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이 제정돼 유가족의 한을 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광장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시민 30여명은 ‘세월호 진상규명’이라고 적힌 몸벽보를 달고 서울 도심에서 자전거 행진을 했다. “좋은 하늘나라 가세요”라고 적힌 바람개비가 자전거 앞에 걸렸다. 천주교 신부와 수녀 50여명은 고 박예슬양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전시회를 관람한 조수영(34) 수녀는 “예슬이가 잘 컸으면 예쁜 아기를 낳고 행복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아무개(47) 수녀는 “작품을 통해서라도 예슬이를 만나 기쁘다”며 “그림으로라도 만났으니 예슬이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가수 김장훈씨는 이날 나흘간의 1차 단식농성을 마무리하고 공연준비에 들어갔다. 농성장을 잠시 떠나는 아쉬움이 컸는지 김영오씨 옆에 딱 붙어 앉아 쉼 없이 이야기를 건넸다.
특별법 합의 알려지던 시간, 농성장 ‘부글부글’
이날 오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 특별법 처리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막농성장은 순식간에 웅성거렸다. “유가족이 바라던 대로 특별법을 처리하기로 했다더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퇴했다더라”는 뜬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합의 내용이 알려지자 분위기는 돌변했다. 입을 꽉 다문 김영오씨의 눈 밑 그늘이 깊어졌다. 곧이어 유가족들의 대책회의가 시작됐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고, 회의는 세 시간 가량 이어졌다. 회의 뒤 유가족들은 국회로 달려갔다. 기자회견 직후 유가족들은 국회 본청 앞에서 “수사권이 포함된 특별법을 제정한다고 해서 믿었는데 야당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소리쳤다. 희생자들의 어머니는 국회 본청 앞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김형기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은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야당에 신신당부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합의를 했다”며 “정치권이 세월호 참사에 조금의 책임이라도 느낀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성토했다.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며칠 전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이 찾아와서는 길게 싸워야 하지 않겠냐며 단식을 그만 두라고 충고했다”며 “이렇게 야합을 하기 위해 단식을 그치라고 한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물과 소금까지 끊는 금식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8일 오전 박영선 비대위원장이 유가족들을 만나 “합의가 불가피했다”고 설득했지만 유가족들의 배신감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날 오후에는 유가족 80여명이 다시 국회를 항의방문했다.
“정치 없는 대한민국 세월호처럼 침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극한 농성’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방증이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함께하고 있는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온 국민이 함께 슬퍼하고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한국 사회”라고 탄식했다. 노 교수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지 않는 이상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이니 극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진보정치 세력·노동계·시민사회가 역량을 키워 힘의 균형을 바꾸지 않는 한 한국 사회는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다. 송주명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은 “대한민국이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어떻게 해결할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있다”며 “광화문광장에 나오는 시민들에게 정치가 새 희망을 불어넣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혼란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글=구태우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간접고용 노동자·장애인 끝 모를 장기농성 이어 가
구태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