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노총이 오는 22일부터 24일까지 일본 도쿄와 교토 일대에서 우키시마호 폭침으로 희생된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연다. 1945년 광복 직후 일본 강제징용 노동자와 가족 7천여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의문의 폭발사고로 교토 앞바다에 수장된 지 69년 만이다.

양대 노총은 "22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 강제징용 희생 노동자 합동추모제'를 열고, 24일까지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는다"고 4일 밝혔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고, 고노담화를 재해석해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마련된 행사여서 주목된다. 양대 노총은 "동북아시아 평화 실현에 의지를 보여 주고자 이번 추모제를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추모제에는 양대 노총 관계자 20여명이 참가한다. 일본 강제징용 희생 노동자에 대한 추모제를 한국 노동계가 주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행사 첫날인 22일에는 도쿄에서 열리는 한일평화포럼과 강제징용 조선인노동자 합동추모제가 열린다. 이어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 석좌교수 초청강연회와 단바망간광산 기념관 방문이 뒤를 잇는다.

일본의 최대의 망간산지인 단바망간광산은 1918년부터 한국인 1천여명이 끌려와 강제노동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재일조선인 이정호씨는 지난 89년 조선인 광부의 혼을 달래고 역사를 후세에 전하겠다는 신념으로 개인 재산을 털어 기념관을 건립했다.

조선아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 부장은 "올해는 양대 노총 주최로 일본 강제징용 희생 노동자 추모행사를 기획했지만, 내년에는 북측 조선직총과 함께 남과 북의 노동자가 하나가 돼 재일동포들과 공동으로 추모제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키시마호의 비극

광복 1호 귀국선,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
최소 3천명 이상 사망, 일본 정부 '모르쇠' 일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1945년 8월24일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던 조선인들이 의문의 폭발로 마이즈루만에 수장된 비극적 사건이다.

우키시마호는 태평양 전쟁 때 투입됐던 일본 해군 수송선이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키시마호는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과 그 가족 7천여명(생존자 추정)을 귀국시키기 위한 특별 수송선으로 동원됐다.

그해 8월22일 조선인을 태우고 일본 아오모리현을 떠난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24일 마이즈루항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한 뒤 침몰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군 기뢰가 터져 조선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승선자와 사망자, 사고 원인, 사후처리를 놓고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은 3천735명이 이 배에 타고 있었다고 밝혔지만 생존자들은 승선자가 5천~7천명에 이르고, 사망자도 3천명이 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폭발 원인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은 "미군 기뢰"를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당시 생존자들은 “부산에 도착하면 한국인에게 보복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일본 장교들이 미리 대피한 후 자폭시킨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사고 후 9년 뒤 선체를 인양해 조사한 결과 선박의 바깥쪽을 향해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뢰에 의한 침몰이라면 배의 안쪽으로 구멍이 나야 하는데 우키시마호는 반대였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의문에 침묵하고 있다. 2005년부터 한국 정부 차원의 광범위한 조사가 있었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일본은 자국 사망자들은 전사자로 대우하면서 조선인에겐 일체의 보상도 하지 않았다. 생존자와 유족들이 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2심과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결국 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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