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각
공인노무사
(금융노조 NH농협지부 법규실장)

얼마 전 일요일에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녀석이 엄마의 공부하라는 소리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휴일인데 왜 공부하라고 해요, 나도 쉬고 싶어요”라고 외쳤다.

옆에서 듣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수긍이 간다. 근기법은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학생도 수업이 없는 날에는 쉬어야지, 그럼. 속으로는 아들 녀석 편을 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청소년들의 공부시간(1일 10시간, 1주 50시간)은 물론 노동자의 노동시간(연 2천90시간)도 가장 길다. 정말 열나게 공부해서 직장에 어렵게 취업해 죽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죽어 간다. OECD 산재사망률과 자살률 모두 1위다. 30대까지는 앞만 보고 살 수밖에 없지만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아직 살아 있구나! 잘 버텨 왔다. 내일도 살아야지….”

대다수가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젊은 날의 당당함은 아련해지고 어쩔 수 없음에 길들여진다.

아직 꽃피우지 못한 젊은 넋들이 차디찬 바다에 떠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바뀌지는 않는다. 한바탕 난리가 나고 이러쿵저러쿵해도 한때 바람일 뿐이다. 우린 정말 비겁한 사회에 살고 있다. 슬플 때 함께 눈물을 흘려 주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평생을 눈물로 지새울 그들에게는 결코 한 편의 영화가 아닌데도 말이다.

노동현장도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투쟁이 진행되는 중에 20명이 넘는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삶을 포기하거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언젠가는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

헌법에 근거해 기본적인 노동인권을 보장하고자 규정한 법률 기준들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돼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근기법대로 주 40시간 일하고 휴일에는 쉬고,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직장이 얼마나 될까. 근기법(제3조)은 "이 법에서 정하는 근로조건은 최저기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법 제50조에 의거해 주 40시간은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며, 이를 위반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업장이 법을 위반하고 있는데 왜 처벌하지 않는 것일까.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정년연장법)이 곧 시행된다. 국회를 통해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정년연장제도가 과연 제대로 연착륙할지는 의문이다. 현재 공공기관 복리축소를 진행하며 노동계를 압박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반 기업 역시 임금체계 개편(결국 임금삭감) 없이 정년연장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노동법의 역사를 보면,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법률은 제정부터 시행까지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다. 법이 시행되더라도 통상임금·휴일수당 등 노사정 간 첨예한 해석상 갈등으로 소송이 남발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은커녕 이중고를 거쳐 죽음으로까지 내몰려 왔다.

근대법은 국가의 질서(公法)와 개인의 재산(私法)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시민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권이 형식적으로 구축됐다.

그러나 이 시대 그러한 기본적인 인권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으며 생명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형식적인 법 제정 취지와 목적 그리고 법조문의 해석에 얽매이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 생명보다 소중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사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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