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부지회장님 힘드시지요? 힘내세요.”

고 염호석(35)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은 곽형수(39·사진) 남부부지회장을 뒤에서 껴안았다. 지회의 2박3일 상경투쟁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5월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였다. 지금은 지회장 직무대행인 곽 부지회장이 본 염호석 분회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염 분회장은 강원도 강릉의 한 해안가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고인의 시신이 발견되고 하루가 지난 후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 있던 곽 부지회장은 눈앞에서 경찰에게 동료의 시신을 빼앗겼다. 몸싸움 와중에 맞닥뜨린 경찰은 비웃었다. “악마”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영일(44) 지회장과 라두식(42) 수석부지회장이 구속됐다. 그리고 곽형수 부지회장은 지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억울했어요. 너무 억울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였지요. 호석이가 ‘지회가 승리하는 날 화장해서 정동진에 뿌려 달라’고 했잖아요. 이길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조합원들끼리 독려하면서 끝까지 간 겁니다.”

지회는 지난달 28일 사실상 삼성전자서비스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염 분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 지 39일 만이었다. 노조활동과 기본급을 보장받았다. 비록 삼성전자 자회사의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에 파열구를 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4일 오전 서울 정동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곽형수 직무대행을 만났다. 단협 체결의 의미와 평가, 지회의 과제에 대해 들었다.

- 삼성전자서비스측과 기준 단협을 체결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우린 협력업체 노동자들이지만 삼성이라는 이름을 단 사업장에서 협상을 통해 단협을 맺은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게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76년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넘는 그 시간 동안 지켜 온 무노조 경영이 깨진 것이라고 본다. 지난달 28일 밤 단협을 체결하니까 안면 있는 삼성그룹 직원들이 축하전화를 하더라. 서울 서초동에서 농성할 때 아는 척도 안 하던 삼성 직원들이 먼저 축하인사를 건넸다. 그룹 전체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서초동에 모여 43일간 노숙농성을 하면서 이룬 조직적 성과가 크게 다가온다. 우리는 전국 조직이다. 지역 간 조직력과 조합원수는 물론이고 생각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그게 상향평준화됐다. 만에 하나 단협 체결에 실패했더라도 다시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한 셈이다.”

“원청 없이는 불가능한 합의, 사실상 삼성과의 단협”

-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다.

“굳이 꼽아 보면 적지는 않다. 건당수수료 임금체계를 완전히 바꾸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아쉬운 부분이 단협 군데군데 있다. 이번 교섭에서 열사문제와 폐업센터 해결, 노조 인정, 임금체계 개편 순서대로 중요성을 부여했다.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부분에서 성과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체계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어도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칠 수 있었다. 부족한 임금은 매년 임금교섭을 통해 메워 나갈 것이다.”

- 고 염호석 분회장에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양산센터 관리팀장을 해고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부에서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회사측에서 ‘협력업체의 인사권에 관여할 수 없다’며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종 합의된 것이 ‘해당 회사의 노사협의에 따라 적절한 방안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양산센터 노사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회사측에서 해당 센터 사장한테 전화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만간 결론이 날 것으로 본다.”

- 교섭 도중 비공개 교섭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른바 블라인드 교섭 상대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나.

“한국경총과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법률팀 등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말이 보도되면 저들은 부정할 것이다. 직접 보거나 최종 확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뻔히 보이지 않나. 삼성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단협을 체결하자마자 홈페이지에 공지를 하고 노사합의 환영 의사와 함께 염호석 열사에 대해 애도·유감을 표했다. 임금체계를 새로 만들었고 폐업센터 해결책까지 내놓았다. 지난해 원청이 회수해 간 서비스지역도 다시 돌려주기로 했다. 협력업체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뒤에서 삼성이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원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상 삼성전자 또는 삼성전자서비스와 교섭했다고 볼 수 있다.”

“단협 체결하자 노조가입 증가, 미조직 센터 조직히겠다”

- 지난해 고 최종범 조합원 관련 합의 이후 논란을 보면 합의 이행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는데.


“지난해 최종범 열사 관련 합의서는 그냥 합의서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단체협약이다. 국회의원들을 포함해 여러 군데에서 합의 이행을 보증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이다. 우리의 힘이 합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다.”

- 기준 단협이 만들어지면서 비조합원이나 노조가 없는 센터에 반향이 있을 것 같다.

“일부 협력업체 사장들이 벌써부터 단협을 놓고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자기들 멋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산이다. 노조가 없는 곳의 사장들은 ‘단협보다 더 잘 대우해 주겠다’고 직원들에게 말하기도 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조가 있는데도 가입하지 않고 있는 비조합원들에게는 실상을 알릴 것이다. 이미 단협 체결 소식을 접한 비조합원들이 속속 노조에 가입하고 있다. (인터뷰 전날인) 3일에도 분회 하나가 새로 생겼다. 이제 막 교섭을 시작한 센터라 하더라도 기준 단협을 적용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문제는 노조가 아예 없는 센터다. 단협 체결 소식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노조를 만들어 처음부터 교섭해야 한다. 하지만 노조만 만들어지면 기존 분회들보다는 훨씬 쉽게 단협을 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회 내에 권역별로 미조직 사업팀을 만들어 전문적인 조직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에는 올해 3월 폐업한 곳을 포함해 176개 센터에 108개 협력업체가 들어와 있다. 6천여명의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일한다. 이 중 54개 협력업체에서 1천600여명이 노조에 가입해 있다.

- 단협 체결에 성공했지만 회사에서 강경노선으로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당연히 그럴 것이다. 우리의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그 틈을 파고들 것이다. 염호석 열사 장례식 때 ‘이제 시작’이라고 조합원들에게 강조했다. 조직을 확대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삼성에 보여 준 것이 많이 있다. ‘한 번 (서울에) 올라오면 해결되기 전까지는 안 내려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저들은 여러 가지 협박을 했다. ‘본사 앞 분향소를 철수하면 교섭을 하겠다’, ‘분향소를 수원으로 옮기면 교섭하겠다’, ‘오늘 타결 안 되면 앞으로 한 달간 교섭은 없다’고 압박했다. 굴종을 원하는 요구는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투쟁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줬다.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글=김학태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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