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블랙번 로버스 홈페이지
정윤수 축구평론가

'영국' 하면 흔히 '영국 신사', 즉 젠틀맨(gentleman)이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이 단어는 고결한 인품, 폭넓은 교양, 점잖은 행동, 그리고 성공한 산업 자본가 계급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푸른 작업복을 입은 남자에게는 이 말을 쓰지 않는다.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세상의 부와 권력을 움켜쥔 영국의 자본가 계급, 곧 젠틀맨은 ‘근면성실’한 시민, 다시 말해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면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기르기 위해 축구를 도입했다. 학교를 세우고 체육 교과목을 만들고 축구를 도입했다.

이로써 근대 축구 초창기에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첫 번째는 규칙의 제정이다. 학교 간 경기를 할 때 규칙을 통일해야 했다. 여러 학교 관계자들이 규칙을 통일시키려고 모였다. 럭비스쿨이나 이튼스쿨은 발로 차거나 손을 이용하는 방식을 선호했지만 해로스쿨은 이를 금지했다. 슈레스베리·차터하우스·웨스트민스터 등의 학교도 발로 경기가 진행되는 것을 원했다. 결국 럭비스쿨만 손을 고집했고 나머지 학교들은 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제압하거나 공을 들고 뛰는 것을 반칙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럭비’라는 경기 종목은 이렇게 19세기 럭비스쿨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창기 잉글랜드축구협회(the FA) 회장을 25년 동안이나 지낸 해로스쿨 출신의 찰스 윌리엄 올콕은 "축구란 공을 드리블하는 경기"라고 선언했다. 손에 비해 정교함이 떨어지는 발은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선수들은 드리블 실력을 쌓는 데 열중했다. 관중들이 일상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경이로운 기술과 압도적인 스피드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규칙 제정은 사회 축구로까지 전개됐다. 이들 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학교로 진학하고 나중에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거나 출신 지역의 기업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사회 진출 이후에도 축구를 통해 서로 맺어지기를 원했다. 런던·셰필드·맨체스터·뉴캐슬 등지에서 이렇게 자발적으로 사회 축구가 진행되면서 회사 대항전이나 도시 대항전이 벌어지자 1863년 런던에 모인 축구인들이 축구협회를 창설하고 그해 12월8일 축구 규칙을 제정하게 된다. 축구는 하나의 제도가 됐고, 급속히 발전했다. 1882년 통계로 축구협회에 등록한 클럽수가 무려 1천개 이상이었다.

여기까지가 근대 축구의 제도적 의미 변화다. 그렇다면 사회적 의미 변화는 무엇일까. 축구가 산업 자본가들의 의도와 달리 거세게 성장한 노동자 계급의 문화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산업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축구를 통해 규칙을 잘 지키고 시킨 일(포지션)을 열심히 하는 것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가난한 시민과 노동자들은 그 말을 듣지는 않았다. 이미 맨체스터·리버풀·위건 등지에서 노조운동이 견고하게 진행돼 참정권 투쟁으로 번져 가던 때였다.

축구가 시민교육에서 노동자의 문화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경기가 1883년 벌어졌다. 명문 이튼스쿨 출신으로 구성된 올드 이트니언스와 랭커셔 지역의 노동자 팀의 경기. 결과는 2대 1로 랭커셔의 ‘무질서’한 노동자들이 이튼스쿨 출신의 ‘교양’ 있는 신사들을 물리쳤다.

랭커셔 일대는 산업혁명 이후 면방직과 철강으로 발달한 맨체스터를 비롯해 오늘날까지 기계·정유·전자·화학·자동차 등 영국 중화학공업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번리·블랙번 같은 산업도시가 일찌감치 발달했다. 당연히 그들의 주말 여가는 축구였다. 수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특히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은 근무 중에도 축구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급속히 발달한 영국의 산업도시에는 열정과 체력은 왕성하지만 아직 사회로 진입하지 않은 대규모 청소년층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대체로 가난한 형편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치감치 학교 교육을 그만둔 ‘동네 형’들이었다.

그들은 공터에서 공을 찼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기술을 배워 공장에 갔는데, 몇몇 뛰어난 동네 형들은 계속 공을 찰 수 있었다. 도시 대항전이나 기업 대항전에서 제대로 공을 찰 수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러 온 스카우터들이 이 동네 형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특정한 공장에 소속되긴 했지만 일은 하지 않고 축구만 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프로축구가 발전했다.

1883년 명문사립 출신의 자존심 센 올드 이트니언스를 물리친 랭커셔의 노동자 팀에는 섬유공장에 다니는 노동자(4명)와 금속노동자(3명)를 포함해 함석공·펍(영국의 저렴한 술집) 주인·치과 조무사 등이 속해 있었다. 당시 주장 워버턴은 우승컵을 들고 북부의 공업도시로 돌아와서 "이 컵은 두 번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축구의 무게중심이 잉글랜드 북부의 산업도시로 급속히 이행됐다. 그 지역에는 튼튼한 허벅지와 강건한 정신으로 장차 직업선수가 될 자원들이 공장이나 골목마다 우글우글했고 무엇보다 도시마다 수만명의 팬층이 어서 빨리 자기 도시에 팀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블랙번 같은 도시가 대표적이다. 랭커셔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13세기에 발달한 양모 교역을 바탕으로 산업혁명기에는 자동방적기에 의한 직조업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블랙번 인근의 스탠드힐에 살던 방적기술자 하아그리브스가 기계식 다중방적기(일명 제니 방적기)를 고안해 대공장 시스템을 실현했다. 이 때문에 해고의 위험을 느낀 노동자들이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의 2부 순서 테마였던 ‘악마의 맷돌’은 바로 이 시기를 다룬 명장면이다). 하아그리브스는 노팅엄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이때부터 노팅엄은 메리야스·니트웨어·레이스 등 섬유산업의 본산이 됐으며 물론 프로축구의 산실이 됐다.

그가 공장을 이전한 뒤에도 블랙번은 방적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도시로 급속히 변모했다. 1816년에는 리즈와 리버풀까지 잇는 운하가 개통되면서 물류의 중심지가 됐고 더불어 석탄과 석회석이 생산돼 산업도시로 급변했다. 1875년 11월5일 창단된 블랙번 로버스는 바로 이러한 산업혁명기의 북부 도시들을 압축해 보여 준다.

이 축구단의 선수들은 점점 일상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평일 낮에도 체계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회사의 비용 부담으로 일주일 동안 서부 인근의 블랙풀로 가서 해변 전지훈련을 갖기도 했다. 주말의 리그전에서 승리할 경우 별도의 수당이 지급되기도 했다.

‘장미 전쟁’으로 유명한 랭커셔 지역의 대표적인 구단답게 블랙번 로버스의 엠블럼에는 장미가 한가운데 도안돼 있고 그 아래에 ‘Arte et Labore’라는 라틴어가 적혀 있다. 블랙번시의 오랜 문장에도 적혀 있다. 영어로는 ‘by skill & hard work’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기술 그리고 숭고한 노동’이 된다. 혹자는 ‘예술 그리고 열정’이라고도 하는데, 전혀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이는 산업 노동의 도시 블랙번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

‘예술’하면 뭔가 고상하고 ‘기술’이나 ‘노동’은 그보다 조금은 낮은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라틴어에서 ‘arte’는 근대에 이르러 ‘예술’이라는 뜻을 획득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게다가 ‘힘써서 일하는 노동’을 가리키는 영어 ‘labor’는 바로 이 엠블럼의 라틴어 'labore'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블랙번을 포함한 영국 북동부의 많은 산업도시의 노동자들이 축구를 통해 비적대적인 경쟁의 열정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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