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길환영 전 KBS 사장이 나간 이후 구성원들의 분위기와 눈빛이 달라졌어요. KBS를 가리고 있던 장막 하나가 벗겨진 기분입니다.”

권오훈(45·사진) 언론노조 KBS본부장이 보도통제 의혹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길 전 사장 퇴진 이후 KBS 분위기를 전하며 한 말이다. 실제 KBS는 달라졌다. “생활임금”이나 “케이블노동자들의 파업” 등 노동이슈들이 자사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을 채우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게 큰 부담을 안긴 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의 막말 파문도 KBS를 통해 이슈화됐다. 이달 5일 길 전 사장의 해임이 결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뉴스들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 가지다. 청와대가 새 사장을 임명한 뒤에도 지금과 같을까. 이에 대해 권오훈 KBS본부장은 “길 전 사장 퇴진투쟁 승리로 현장의 분위기가 고취돼 있다”며 “어떤 사장이 와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신관 연구동 KBS본부 사무실에서 권 본부장을 만났다.

- 입사 당시와 길 전 사장 해임 직전의 KBS를 비교해 보면 어떤가.

“1995년 10월 시사교양 PD로 입사했다. <취재파일>이나 <시사투나잇>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문민정부 시절이었는데 이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프로그램의 제작에 정치권력이 간섭했다. 예컨대 대통령 해외순방이 예정돼 있다고 하면 KBS 기자들이 사전에 목적지를 찾아 미리 해외순방과 연관된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순방이 끝나면 성과를 정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관련기사를 한 꼭지라도 늘리려고 노력했다. KBS가 정권 바라기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언론통제로 지지율 유지하려는 박근혜 정권”

- KBS는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이름에 걸맞은 시기는 없었나.


“KBS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87년 민주화 투쟁이 전개될 당시다. 한 나라의 언론·방송의 수준은 국민의 정치적 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그 무렵 KBS에도 노조가 생겼다. 90년 4월 서기원 당시 사장의 임명을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됐다. 당시만 해도 정권의 방송개입이 묵과되던 시절이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언론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서 전 사장은 예정대로 임명됐지만 구성원들 사이에서 정권의 방송개입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그때 처음 생긴 것 같다.”

-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부터 정권의 언론장악이 본격화됐다는 의견이 있다. 박근혜 정권은 어떻게 보나.

“이명박 대통령 시절은 언론사에게는 역대 최악이었다. 해고된 언론노동자수와 언론사들의 대대적인 파업만 봐도 알 수 있다. KBS 노동자들 역시 2012년 95일이라는 역대 최장기 파업을 벌였다. 이명박 정권은 언론의 독립성에 대해 드러내 놓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해고된 언론노동자 문제도 해결하고 최소한 이명박 정권의 포악한 언론관보다는 낫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달라진 것이 없다. 박근혜 정권을 평가하자면 지지율에 정말 민감한 정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통제를 통한 지지율 유지, 이것이 현 정권이 KBS에게 바라는 핵심인 것 같다.”

“세월호 참사 보도 보며 KBS 벼랑 끝 직감”

- 세월호 참사로 KBS 내부에서 보도통제 의혹이 불거졌다. 어떤 심정이었나.


“참담했다. 세월호 보도를 보며 직감적으로 KBS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막내 기자들의 반성문이 나올 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여겼다. 싸움이 필요한 때였다. KBS 구성원들 역시 정권의 개입과 보도통제에 대해 국민과 마찬가지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사실 지난달 말 파업투쟁에 돌입할 때만 승리에 대한 생각보다는 우리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길 전 사장의 구체적인 보도통제 사례를 나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 KBS 내부적으로 공영방송을 담보할 만한 시스템이 없다는 비판도 나오는데.

“KBS 노사는 2003년 노사 동수가 참여하는 편성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법원의 2심과 마찬가지로 편성위에서 해결이 안 되면 이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공정방송위원회도 있다. 최선이고 완성된 제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본적인 시스템은 갖추고 있다. 결정사항에 대한 구속력이 없어 별도의 분쟁해결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조금 회의적이다. 제작 책임자나 경영진의 의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영국의 BBC의 경우에도 KBS와 시스템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BBC 트러스트(최고의결기구)가 정부에 추천하면 여왕이 사장을 임명한다. 다른 게 있다면 사회 전반적으로 공영방송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경우 정치권력 스스로가 방송에 개입해서도 안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민중의 오랜 저항의 역사가 결과물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특별다수제 도입해 사장 선임해야”

- KBS 이사회의 여야 추천비율이 7대 4인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는데. 사장 선임시 3분의 2 이상 찬성하는 특별다수제가 대안이라고 보나.


“길 전 사장의 사태를 돌이켜 보면 방송공정성 구축의 핵심은 외부 간섭을 어떻게 배제하느냐다. 지금의 구조는 여권이 중심이 된 이사회가 사장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하고, 그렇게 임명된 사장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방송만 내보내게 된다.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 임명 과정에서부터 최대한 정권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별다수제가 도입되면 지금처럼 정권이 일방적으로 KBS 사장을 낙점하는 방식은 피할 수 있게 된다. 최소한 야당위원 1명 이상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최악의 인물은 피하는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여야 간 의견차로 특별다수제 도입 자체가 어렵고 KBS 사장 인사청문회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과거 사장추천위원회를 한시적으로 가동했듯이 법 개정 이전에 이사회 의결로도 가능하다. 국회의 임명동의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인사청문회는 비용·시간적인 측면에서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KBS 사장 임명이 아예 정치쟁점으로 부상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 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의 막말을 단독 보도한 곳이 KBS였다.

“길환영 사장 전이나 후나 KBS 기자들은 같은 아이템을 취재했고 같은 논조로 뉴스를 작성해 왔다. 다만 길 전 사장의 퇴진 이후 현재의 KBS는 내·외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자기검열이 사라진 상황이다. 사장이 없는 지금이 가장 공영방송답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 새 사장은 현재의 내부 분위기를 통해 향후 어떻게 KBS를 운영해야 할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구성원들 스스로가 제작의 독립성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깊이 깨닫게 됐다. 특히 젊은 기자들에게 큰 자각의 계기가 됐으리라 본다. 어떤 사장이 오더라도 지금 내부적으로 고취돼 있는 분위기에 쉽게 손대기는 어려울 것이다.”

“KBS에 부역사장 오면 또다시 두 노조 공동파업”

- KBS노조와 사상 처음으로 공동파업을 벌였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그동안 KBS본부는 교섭권이 없어 방송공정성 확보와 관련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왔다.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이번 투쟁에서 직역을 떠나 공영방송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손을 잡았다. 함께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청와대 부역사장이 온다면 또다시 손을 잡을 것이다.”

-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길 전 사장 퇴진으로 공영방송으로 가기 위한 1단계 투쟁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앞으로 방송독립을 위한 KBS 지배구조 개혁과 방송공정성 확보를 위한 특별다수제 도입을 목표로 2차 투쟁을 전개할 생각이다.

당장은 조만간 결정되는 KBS 사장에 제대로 된 인물이 임명되도록 지켜볼 것이다. 주요보직 선임방식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보도국장 등 핵심 보직이 사장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를 임명동의제로 바꿔야 한다. 외부 환경과 더불어 구성원들의 자기성찰도 중요하다. 조합원 하나하나가 각자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현장에서 공영방송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조성해 나가겠다.”

글=양우람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