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한국 재벌들의 핵심 문제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총수 1인 지배체제를 많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제시한다. 한국 최대 기업 삼성에서 차기 총수(회장)의 승계가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재벌개혁론이 뜨거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총수체제를 중심에 둔 재벌 비판은 핵심에서 많이 빗나간 이야기다. 먼저 소유-경영의 분리는 노동자나 시민들의 이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소유주의 이익을 최대로 키워 자신의 몫을 챙기는 전문경영인은 노동자를 때려잡는 데도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역사상 가장 혹독한 구조조정 전문가들은 모두 전문경영인들이었다. 1980년대 GM의 로저 스미스나 GE의 잭 웰치, 2000년대 르노-닛산의 카를로스 곤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전문경영인의 교본으로도 불리는 잭 웰치는 미국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와 인수합병, 그리고 고용관계나 지역경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과감한 자본철수로 이른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모범을 만들었다. 이런 구조조정으로 기업은 성장하지만 시민들은 크게 피해를 입는다.

그렇다고 소유주가 이른바 '책임' 경영을 하는 것이 좀 더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 반노조 기업들은 가문 소유의 기업들이 많다. 월턴 가문이 2대째 경영을 하고 있는 미국의 월마트는 세계적으로 강고한 반노조 기업으로 악명이 높다. 이씨 가문이 3대째 경영세습을 하고 있는 한국의 삼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소유·경영 분리 문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최근 많이 인용되는 스웨덴 발렌베리가(家) 기업들은 스웨덴 경제의 30% 가까이를 차지한다. 가문에서 5대째 세습경영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반노조 정책으로 물의를 일으킨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스웨덴노총은 조직률과 사회적 영향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문이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독일의 베엠베(BMW)는 주주를 위해 일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잭 웰치나 카를로스 곤처럼 구조조정이나 노조탄압을 일삼지는 않는다. 독일 금속노조와 교섭하는 베엠베는 독일에서도 높은 수준의 노동조건과 평의회 활동을 보장한다.

다음으로, 총수체제가 권한의 지나친 집중으로 기업 효율성에 문제를 미친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그다지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1920년대부터 30년간 GM의 최고경영자였던 알프레드 슬론이나, 2천년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삼성 이상의 큰 기업을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이끌었다. 도덕적 문제나 노동자·시민의 이해관계를 잠시 제쳐 두고 평가하면, 반주변부 국가의 기업인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세계적 기업으로 큰 배경 중 하나가 재벌 총수들의 과감한 투자에 있는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지금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가장 첨예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서울 서초동 본사 앞 금속노조 농성장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유권-경영권 관계는 시민들에게 그다지 큰 변수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노조탄압에 항거해도, 700여명이 3주 가까이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어도,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규탄성명을 내도, 그룹의 최고책임자라는 사람이 단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 상황 자체는 시민들에게도 큰 변수일 수밖에 없다. 삼성은 사회로부터 어떤 압력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앞으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세습경영에도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은, 독일의 가족 경영인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 그들이 독특해서가 아니다.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도 노조와 시민들이 적절하게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고서는, 노조와 시민들을 무시하고서는 제대로 된 경영을 할 수 없다. 이른바 말하는 힘 있는 계급의 관용, '톨레랑스'라는 것은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임박했다.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민들은, 이제 삼성이 사회로부터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 아님을 직접 보여 줘야 한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재용 부회장의 왕국이 아님을, 이제 시민과 재벌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봐야 한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삼성 본사 앞 농성장이 바로 그 최전선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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