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낯설다. 시끄럽던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빨간 영토와 파란 영토의 크기를 두고서 찬탄하던 시간은 지나갔다. 어느 광역시가 파란색으로 물이 들면 안도하고 어느 도가 빨간색으로 물이 들면 안타까워했다. 최선이 아니라도 차선이라고 우리는 투표하고 안도하고 심지어 환호했다. 그리고서 노동 없던 지방선거라고, 진보진영의 참패라고 진단을 쏟아내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붉은 심장은 무엇으로 뛰고 있는가. 우리의 머리는 노동을 붙잡고 있는데 우리의 심장은 제멋대로 노동 없는 거리에서 날뛰고 있는 것인가. 정권심판. 세월호 참사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박근혜 정권 심판이 노동운동의 기치였다. 그러니 솔직해지자. 6·4 지방선거에서 집권 새누리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것이 이 나라 노동운동이, 진보운동이 내건 목표였다. 1인의 지자체장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정권심판은 새누리당을 물리칠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통합진보당·정의당·노동당의 후보에게 투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에게 투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지방선거 선거운동기간 세월호 촛불집회의 광장에서 외친 정권심판의 구호는 노골적으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 투표하자는 말은 아니었어도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새누리당 후보보다 더 반노동의 인사라도 그에게 투표하자는 구호였다. 이 기간 동안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새누리당 후보와 경쟁하는 지역에서는 이 나라 노동운동은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아무개가 어떤 반노동자 정치활동을 하고 살았는지, 어떤 반노동자 정책을 펼치겠다고 하는 것인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철저히 함구했다. 대한민국의 조직된 노동운동,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이 나라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조합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의 반노동정책을 비판하거나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자는 말만 했을 뿐이다. 낯설다. 어째서 선거를 마치자 노동 없는 선거였다고 노동을 대변한 진보진영의 참패였다고 6·4 지방선거를 진단한다는 말인가. 뭐 이런 진단은 이 나라에선 언제나 그래왔던 것이니 익숙한 진단이다. 단지 나는 익숙한 거를 낯설다 하고 있을 뿐이다.

2. 6·4 지방선거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고 한다. 노동자를 대변해야 할 진보정당들이 민주노동당 출범 이후 당선자수와 정당지지율에서 최저를 기록했다고 한다. 통합진보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34명 등 37명을, 정의당은 기초비례 1명을 포함해 기초의원 11명을, 노동당은 광역의원 1명과 6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을 뿐이다. 이들 당은 단 한 명의 지자체 단체장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장 3곳과 광역·기초의원 139명 등 142명을, 노동당의 전신인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기초의원 22명으로 25명을, 개혁정당을 표방하던 국민참여당은 광역의원 5명·기초의원 24명을 각각 당선시켰으니 현재 통합진보당·정의당·노동당으로 귀결된 이 3개 정당의 당선자수는 196명이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들 통합진보당·정의당·노동당은 광역·기초의원 선거에서 55명을 당선시켰으니 이른바 진보정당의 참패라는 진단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정당지지율은 통합진보당은 4.3%, 정의당은 3.6%, 그리고 노동당은 1.2%를 얻는 데 그쳤다. 이렇게 당선자수와 정당지지율이 최저이니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은 정당한 분석이다. 선거에 참여한 정당으로서 처참한 결과를 얻었다. 선거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당으로서 활동해야 할지 누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처지다. 이런 결과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정당이냐를 떠나 노동자를 대변해 활동하고자 하는 정당으로서 존립의 이유조차 의심받아야 할 처지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물론 노동조합의 조합원, 아니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주도했던 민주노총의 조합원조차도 지지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지경이 됐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정당이 노동자가 외면하는 정당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있는 대로 사실대로 진단해 말해 보자.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에게 투표하고 이들 정당을 지지한다고 투표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조합 조합원인 조직노동자는 진보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았고 이들 정당을 지지한다고 투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하고 이들 정당이 그리는 세상을 지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오늘보다 선거로 내일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그런 노동자에게 새누리당 정권을 비판하거나 심판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3. 노동운동이 그리는 세상이 없다.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이 내세우는 세상은 노동·민주·민중을 접두사로 사용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는 반노동 반민주 반민중의 권력을 선거를 통해 심판하는 세상이다. 자신의 세상을 그리는 자는 나머지 세상에 대해 자신의 세상을 내세운다. 세상을 자신의 세상과 명확히 구분 짓는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이 세상과 자신의 세상을 구분하지도 대립해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접두사만 내세울 뿐이다. 기껏해야 노동·민주·민중의 접두사 있는 그들의 세상이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쟁탈전인 선거는 민주니 새정치니 정권심판의 구호 속에서 그들의 권력놀음에 표를 몰아주는 것이 현 정세에 대응하는 현실적인 선거전술이었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기껏해야 그들과의 선거연합으로만 실현할 수 있는 과제였을 뿐이다. 자신의 세상을 그려 내지 못하니 그들이 그려 놓은 세상의 귀퉁이가 노동의 자리다. 노동운동은 이미 그려진 세상의 귀퉁이를 붙잡고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그려 낸 세상에서 노동자를 보호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다. 자신이 그려 내는 세상이 없으니 그 세상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정하지도 못한다. 언제나 그들의 전술을 읽는 것이 자신의 일이다. 선거를 진단하고 정치를 분석해도 자신은 없다. 진단의 방법론이, 분석의 틀이 무엇이라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노동자의 철학이니 정치경제학 비판이니 뭐니 사회과학방법론으로 진단하고 분석하고 있다고 해도 노동운동은 자신은 없다. 세상의 주인을 정하는 선거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자신을 규정짓는다. 그 행동을 어떤 방법론으로 진단하고 분석해서 결정했는지가 노동운동의 성격을 규정짓지 않는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행동을 위한 방법론이 자신을 말한다고 착각했다. 이런 착각의 숲에서는 반노동자의 세상, 노동운동을 외면한 그들의 세상이라도 노동운동의 길이라고 여겨 왔다. 착각의 숲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배신이 노동자를 위한 길인 양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세상을 그려 내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내일도 착각의 숲에서 헤맬 뿐이다.

4. 노동운동은 자신의 세상을 그려 내야 한다. 자본이 그려 낸 세상에 대해 노동의 세상을 자신의 세상으로 그려 내야 한다. 보수·중도·진보 등 세상을 뿌옇게 가리는 개념을 걷어서 노동으로 세상을 분명히 구분지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한 세상과 아닌 세상, 노동의 세상과 자본의 세상, 노동자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세상과 노동자를 노예로 취급하는 세상. 노동운동은 노동으로 세상을 구분지어야 한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뭐니 근대의 자본 세상에서 유럽 등의 노동운동이 내세운 세상은 그 수준이 어떻다 해도 노동으로 세상을 구분 짓기 위한 노동운동의 구분법이었다. 거기서는 노동운동이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그려 냈다. 보수당이니 자유당이니 뭐니 그들이 그려 낸 세상에 맞서 노동운동은 자신의 세상을 놓치지 않았다. 진단의, 분석의 방법론을 변경하더라도 자신의 세상을 위한 행동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자신의 세상을 위해서 노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노동자는 노동운동이 그려 내는 세상의 주인이고 대공장 정규직이든 누구든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으로 그들과 노동운동이 구분됐다. 조직노동자는 노동운동의 주력이고 노동운동은 한순간도 그걸 외면하지 않았다. 조직된 노동자를 붙들지 않고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호소하는 것만 남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열악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세상에 대해 노동운동은 그저 노동자 보호를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노동자권리를 세상의 권리로 세우고자 자신의 세상을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자신의 세상을 그려 내지도 않았다. 정권심판의 기치 속에 노동자를 몰아넣어 그들에게 투표하도록 했다. 심판 후 들어설 권력의 그들에게 노동자권리를 보호해 달라고 호소하는 게 노동운동이 택한 행동이었다. 이것이 이 나라 노동운동의 익숙한 길인데 어째서 노동 없는 선거였다고 진단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그저 노동이슈가 있는 선거여야 한다는 것이라면 앞에서 살펴본 비난의 말 말고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 익숙한 진단인데 나는 낯설다 할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