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축구평론가

먼저, 축구와 노동이라는 막중한 주제를 풀어 가기 전에,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2002년에서 2006년 사이, 그러니까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독일월드컵이 개최되려던 그 무렵에 나는 어느 도시에서 축구 해설을 한 적이 있다. 그 도시는, 우리나라의 굵직한 지역도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거대한 공단을 배경으로 형성된 곳이었다.

그날, 그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 중에는 그 도시의 수많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단체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반전 해설 도중에 “역시 거대한 공장도 많고 해서 오늘 노동자 분들이 많이들 관람을 오셨다”고 했다. 전반전이 끝나자 담당 프로듀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노동자라는 표현은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그냥 시민, 아니면 축구팬으로 해 주세요.” 함께 일하는 처지라서 후반전에는 축구팬으로 통일했지만 조금은 씁쓸한 기억이다.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 있고 그래서 공단이라는 표현도 쓰고, 또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곧 노동자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곳에서 그들이 주말의 한때 프로축구를 보기 위해 나온 것인데,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면 곤란해지는 상황, 이해할 수도 있지만 또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아마도 ‘근로자’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축구 그 자체가 현대의 거대한 산업도시의 산물이다. 축구는 두말할 것 없이 유럽의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의 문화로 발달해 왔다. 물론 오늘날의 축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됐고 민족주의의 경연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온당치 못한 권력자들이 대중의 눈과 귀를 딴 데로 돌리려는 문화통치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 핵심 유전자는 거대한 산업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광범위한 노동자들의 문화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흔히 영국을 ‘축구 종가’라고 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축구가 노동자들의 문화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영국의 지배계층은 이를 두려워했다. 주말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축구장에 모여드는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술이라도 한잔 걸치게 되면 공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숱한 문제들을 이슈로 내걸고 축구장에서 도심지까지 크게 소리치며 활보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서 웃고 떠들고 어깨동무를 하는 것, 비록 그것이 축구 관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모이는 것 자체를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 역사부터 살펴보자.

축구가 ‘현대화’되기 위해서는 현대가 필요했다. ‘현대’(Modern)란 무엇인가. 산업혁명에 따른 도시의 발달이다. 이 흐름은 기존의 마을공동체를 해체시켰다. 19세기 중엽은 그 어느 시기보다 대규모의 자발적 인구이동이 전 지구적으로 감행된 시기다. 봉건 영주의 문장 아래에서 쟁기를 끌던 시대는 끝났다. 봉건의 농촌에서는 가문이나 혈통이나 신분 질서가 엄연했다. 도시는 달랐다. 새로운 산업경제에 따른 연대의식과 교감은 어떤 점에서 옛 마을 공동체의 품앗이보다 훨씬 강렬했다.

영국의 항구 도시 리버풀을 떠올려 보자. 영국 북서부 아이리시해에 면한 이 도시는 8세기부터 머지강을 따라 수세기에 걸쳐 형성됐는데 특히 근대에 이르러 크게 은성했다. 미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신개척지와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함부르크·암스테르담과 더불어 18세기 최고의 무역항으로 발전했으며 인근 맨체스터 등지에 철강·탄광 산업이 크게 발달한 18세기 이후 항만 노동의 중심 도시가 됐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리버풀 특유의 자유롭고 활달하면서도 상당히 거친 에너지에 흡수됐다. 아일랜드 노동운동의 전설로 불리는 짐 라킨이 태어난 곳도 리버풀이며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정부가 영국 전역을 뒤흔든 광산 노동자들의 저항을 괴멸시킬 때조차도 리버풀 항만노조는 굴복하지 않았다.

리버풀과 앙숙인 19세기의 맨체스터도 혼돈 투성이의 도시였다. 사학자이자 노동운동가인 영국의 E.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19세기 초의 맨체스터가 “그 엄청난 크기, 다양한 직업군, 확산돼 가는 빈민지구, 그리고 이주자들의 끊임없는 이동으로 인해 맨체스터는 고지 지방의 도시들에 비해 그 응집적 일체감이 떨어졌다”고 썼다.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상층 계급·방직공장의 사무원들·아일랜드에서 몰려온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해와 긴장과 파벌에 휩싸였다. 이러한 산업도시를 일상적으로 조직한 것은 노동조합이었고 비일상의 문화 영역에서 응집시킨 것은 축구였다.

물론 산업혁명을 주도한 계급에서도 축구가 중요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은 인내력·리더십·성취욕구 등을 요구했으며 이는 청교도적 금욕주의·기존질서 순응주의·남성적 리더십 등으로 이어진다. 이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학교 교과목에 체육시간이 만들어졌고 축구가 도입됐다. 이렇게 ‘근면성실’한 사회인을 기르기 위해 축구가 도입됐지만 이들이 졸업 후 각지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미 맨체스터·뉴캐슬·리버풀 등지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돼 투표권을 핵심으로 한 거센 저항운동이 전개되던 때였으므로 축구는 오히려 이러한 활동을 촉진하는 매개가 됐다. 이를테면 노동조합 활동에 무관심한 사람도 주말이면 축구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끈끈한 정서적 연대를 느끼곤 했다.

시민과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조련하려는 산업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축구를 통해 사원을 하나로 만드는 ‘협동심’ 고취가 중요했다. 반면 공장과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노동자들로서는 축구를 통한 끈끈한 ‘연대의식’이 더 중요했다. 축구에 내장된 어떤 미묘한 힘이 이렇게 상반된 목표를 동시에 충족시켜 줬던 것이다. 축구는 이렇게 해서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해당 도시의 지배계층이나 산업 자본가 입장에서도 축구는 중요한 이벤트가 됐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신흥산업이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거대한 공간에 몰려드는 ‘신종산업’ 말이다. 동시에 고립되고 외로운 개인이 축구장에서 공통의 정서를 나누고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문화가 됐다. 최초의 프로축구 클럽이 탄생한 철강도시 셰필드를 시작으로 블랙번·리버풀·맨체스터·뉴캐슬·선더랜드·위건 등에서 축구는 20세기 최고의 스포츠로 거듭났다.

‘축구 종가’ 영국의 축구문화는 바로 이렇게 거대한 산업도시들과 수많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열광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 양상은 19세기 말, 산업혁명의 피치를 올리던 유럽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됐다. 스페인의 빌바오 광산과 독일의 도르트문트 탄광 지대가 그러했으며 스웨덴의 말뫼,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 이탈리아의 토리노 등이 그러했다. 비록 유럽 강대국에 의해 축구를 전수받긴 했지만 제3세계 여러 나라들도 개항과 산업 발달이 전개되면서 축구가 독자적인 문화로 꽃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한국의 인천이나 원산 같은 곳은 이미 20세기 초에 거대하게 모여든 ‘도시 노동자’에 의해 축구 리그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러니까 내가 축구 해설을 하면서 "노동자 분들이 많이들 오셨다"고 언급한 것은 이 같은 100여년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말한 것이다. 이제 그 뜨거운 역사를 차차 살펴보자.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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