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검정 수사복을 입은 남자가 설교대 위에 섰다. 격앙된 모습으로 술렁이던 사람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마침내 그는 눈을 번쩍이며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허영을 불태워 버리시오. 권력을 탐하는 세속적 욕심이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타락한 자는 하느님의 분노를 사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예루살렘인 피렌체의 시민들은 회개하려는 의지만 갖고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약속하겠소!”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1497년 2월7일, 마침 사육제 기간이었다. 고깔 달린 옷을 입은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시내 곳곳에서 ‘헛된 것'이나 '저주받은 것'들을 찾아냈다. 도박 기구며 주사위·카드·음탕한 스타일의 의상·가면은 물론 '점잖지 못한' 그림이나 책들까지 전부 수거됐다. 마침내 이탈리아 피렌체 정부청사가 위치한 시뇨리아광장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수거해 온 물건들이 7층 높이로 겹겹이 쌓였다. 신호가 있자 18미터 높이의 피라미드 형태로 쌓은 물건들에 횃불이 댕겨졌다. 동시에 정부청사의 종들이 일제히 울렸다.

 

▲ 보티첼리, <신비의 탄생>, 캔버스에 템페라, 1501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상기된 얼굴로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본, 설교대 위의 사내 이름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사이자,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장을 지낸 그는 이렇게 예언가적인 설교를 통해 세속적 쾌락이 초래하는 타락의 위험함을 고발해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거장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도 이때 ‘허영의 화형식’ 장소에 있었다. 아마 그는 두 손을 모아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봤을 것이다. 보티첼리가 그린 대표작들은 바로 사보나롤라가 비난하는 ‘이교도적인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사보나롤라가 출현할 당시 보티첼리는 피렌체에서 제일 성공한 화가 중 하나였다.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었던 메디치가(家)의 두터운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메디치가의 문화는 사보나롤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철학’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피렌체는 그 유명한 ‘르네상스 운동’의 요람이자 중심이었는데, 메디치가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에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신 중심, 교회 위주의 체제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적인 것들을 되살리고, 유럽문명의 근본이 되는 고전시대에서 규범을 찾아 중세 기독교 전통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던 ‘르네상스 문화’의 부상. 정신적인 쾌락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업가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메디치가가 권력을 잡는 순간, 사실 이는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메디치가는 아예 그리스의 고전학문과 철학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모임을 만들었고, 보티첼리는 파악하기 힘들 수도 있었을 철학적 개념을 그림으로 구체화시켰다. ‘르네상스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도 바로 메디치가의 그리스 고전문학과 철학연구의 세례 안에서 탄생한 걸작이다.

그런데 그의 ‘평안한 생활’은 앞서 등장했던 사보나롤라 때문에 균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침 15세기가 끝나가는 세기말이었다. 세기말 특유의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교회의 눈으로 보자면’ 악의 도시였던 피렌체를 휩쓸었다. 이때 사보나롤라가 홀연히 등장한 것이다. 그는 <요한 계시록>의 예언을 내세워 메디치가를 "도둑이자 타락한 가문"이라고 언급했고, 교회의 혁신은 이탈리아 전체의 끔찍한 시련과 함께 일어날 것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동요했고 화가들도 본격적으로 종교화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보나롤라의 영향은 앞서 봤듯이, 1497년 피렌체 시민들이 모든 '헛된 것들'을 거대한 장작더미의 불길 속으로 던져 넣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렇지만 사보나롤라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교회의 교만’을 꾸짖던 사보나롤라는 필연적으로 교황청의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고발돼 1498년 5월23일, 이전에 '허영의 소각'을 행한 바로 그 자리 시뇨리아광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최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사보나롤라의 화형 이후 한동안 그림조차 그리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가 ‘순교’한 뒤 2년 후에야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이교적인 주제하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려 냈던, 그 대단한 ‘르네상스의 화가’ 보티첼리가 그린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치 전형적인 종교화, 바로 1501년작 <신비의 탄생>이 그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작품 중앙에 자리한 성모마리아와 이제 막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아기예수다. 그들이 있는 구유의 지붕 위에는 세 천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적인 미덕, 즉 믿음·희망·사랑을 상징하는 흰색·빨간색·녹색 옷을 입고 있다. 그림 윗부분을 보면 황금빛으로 열린 하늘 한가운데에서 열두 천사가 원무를 추고 있고 그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기쁨의 표시로 세 명의 천사들을 부둥켜안고 있다. 이들은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성경 속 루카복음(제2장14절)의 한 구절이 적힌 띠로 장식한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다. 그동안 이들의 발밑에 있는 여섯 명의 작은 악마는 땅의 틈새로 숨고 있다. 정말 ‘노골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드러내는 그림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이 작품은 또한 보티첼리가 직접 날짜를 적고 서명을 한 유일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림 상단에 위치한 그리스어로 된 세 줄의 명문을 보자.

"나 산드로는 1500년 말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 그림을 그린다. 이 혼란기의 초반은 요한묵시록 제11장의 두 번째 재앙에 따라 악마가 삼 년 반 동안 해방돼 날뛴다. 이후 악마는 제12장의 말씀대로 묶일 것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제압된 악마를) 보게 될 것이다."

보티첼리는 이러한 쇄신이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추종했던 사보나롤라와 보티첼리의 계산에 따르면 이날은 1503년에 시작될 것이었다. 하지만 1503년이 지나도 심판의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전해 오는 자료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말년에 질병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으며, 등이 심하게 굽어 지팡이 두 개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고 한다. 당장 종말이 오는데 돈이 대수였겠는가. 그는 재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고 그 결과 파산해 무일푼 신세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윽고 1510년 5월, 그토록 바라던 ‘묵시록의 재현’을 보지 못한 채 보티첼리는 65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만약 사보나롤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년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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