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세월호가 침몰한 지 34일이다.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침몰한 세월호다. 지난 17일 서울 청계광장에는 수만의 시민이 세월호 참사 추모 범국민행동 집회에 참석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5·18이 있은 지 34년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제는 국가가 지정한 민주화운동 기념일인데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5·18을 진정으로 기념하고 있지 못하다. 지난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선 5월 광주의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창되지 않았다. 학살도 참사도 저주 같이 시간은 흘러갔다. 아무리 아우성을 쳤어도 아무리 통곡을 했어도 부질없이 세월은 흘러갔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시민의 가슴에는 학살의 흉터가 남았고, 자본이 저지른 범죄에 자식 잃은 부모의 곡소리는 세상을 떠돌고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특별법 제정의 구호도 어제처럼 오늘도 우리는 외치고 있다. 2014년 오늘은 오월 그날이 다시 왔어도 여전히 어제 그날이다. 단지 오늘은 오월 그날이 다시 왔건만 우리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지 않고 있을 뿐이다.

2.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엇이기에 학살에도 참사에도 버텨 내고서 오늘 다시 오월인 것일까. 세월호는 (주)청해진해운이 해상여객운송사업을 하는 배다. 청해진해운은 선장 등 승무원들로 하여금 세월호를 운항해 왔다. 이 세상의 다른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이 노동을 사용해서 사업을 하는 그런 사업장이다. 그런 세월호는 침몰했다. 3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업체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였다”고 지적했다. “이런 일을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 앞으로 기업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탐욕적으로 사익을 추구해 취득한 이익은 모두 환수해서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재원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그런 기업은 문을 닫게 만들겠다”면서 “이를 위해 범죄자 본인의 재산뿐 아니라 가족이나 제3자 앞으로 숨겨 놓은 재산까지 찾아 내어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신속하게 추진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이미 대한민국 검찰은 선장 등 주요 선박직 승무원들을 살인죄까지 적용해서 기소했다. 나머지 선박직 승무원들도 업무상과실치사죄 등으로 기소했다. 세월호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의 문제가 드러났으니 이와 관련된 청해진해운 등 관련자들에 대해서도 민형사상 책임이 따를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직접 관계하지 않았다 해도 배임·횡령 등 각종 비리로 실질소유주 유병언에 대한 처벌 등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담화가 아니라도 이미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은 추궁되고 있다. 세월호의 청해진해운은 해상 운송사업으로 보다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체다.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으로 침몰하지 않았다면 보다 많은 이익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여전히 제주와 인천을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었을 사익 추구의 사업체이다. 그런데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로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했으니 그것도 수많은 인명손실을 입히고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게 침몰했으니 청해진해운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더 이상 사익추구도 할 수 없게 침몰해 버렸다. 사익추구라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도모해 온 대한민국의 한 사업장은 침몰해 버렸다. 돌이켜보면 이 자본의 세상에서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과잉생산으로 인한 급격한 경기침체나 공황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장 안팎에서 생명을 침해하는 수많은 사고를 초래한다. 어찌 보면 불황 내지 공황과 마찬가지로 인명사고도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일부인 세상, 위험을 담보로 한 세상이다.

3. 꿈꾸는 세상은 있다. 아무리 우리의 세상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해도 이 세상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있다. 봉건의 압제를 쓸어버리고서 우리의 세상, 근대를 세웠다. 계약 자유의 세상이었다. 그 자유가 사람과 사람의 계약으로 세상의 질서가 세워지는 시장의 세상이었다. 소유가 노동을 사용해서 주인이 되는 자본의 세상이었다. 계약의 자유가 시장이 작동돼서 비록 사람이 평등하지 않아도 자유일 수는 있는 세상이었다. 인민의 자유가 경제 활동의 장에서 행사됨으로써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근대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계약의 자유가 근대의 지반이므로 인민이 그 자유를 손에 쥐지 않고서는 인민이 그 자유를 잃고서는 근대의 꿈은 이 세상에서 실현될 꿈이 아니었다. 시민의 혁명과 전쟁으로 인권선언과 헌법은 그 근대의 자유를 인민에게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민법은 계약 자유를 근대 사회의 원리로 규정했다. 근대가 꿈꾸는 세상은 인민의 자유로 실현될 것이라고 이 세상의 질서로 세워졌다. 그랬다. 근대의 사람, 인민이 자유일 때 근대의 세상은 자신이 꾸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의 노동하는 인민·노동자는 자유를 행사하지 않았다. 근대의 세상에서 물적 재화를 생산하거나 용역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장에서 자유는 사용자의 것이었다. 노동자의 것은 아니었다. 근로관계를 설정하는 계약의 체결에서 노동자는 원하지 않아도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근로계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그 계약의 수행도 노동자와 고객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려도 시정을 요구하면 해고 등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니 노동자는 자유 없이 복종해야 했다. 법은 분명히 노동자는 자유라고 원하지 않으면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법원은 안전을 위협하는 사용자의 부당한 지시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판결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다. 정규직 근로계약서와 나란히 제공되지 않는 비정규직 근로계약서를 두고서 노동자에게 근로계약 체결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해고 등 불이익처분을 받는 것을 무릅쓰고 사용자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라고 그에 따른 불이익처분은 무효인 거라고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모하다. 이 기만과 무모의 말로 노동자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해 줘 봐야 쓸데없는 짓이다. 그건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는 이 근대의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사용자 앞에서 노동자의 자유는 아니었다. 노동자의 자유를 박탈하고서 자본은 이 세상에서 자유일 수 있었다. 노동자의 자유로는 자본에게 그 재생산을 보장해줄 수 없었으니 자본으로 날마다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사용자 앞에서는 노동자의 자유를 박탈하고서 서 있어야 했다. 근로계약관계는 사용자가 노동자에 대한 사용종속관계를 본질로 한다(대법원 2006. 12. 7 선고 2004다29736 판결 등).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복종하는 걸 실체로 하는 계약관계라는 것이다. 근로계약에서 근로제공하기로 정한 근로시간 동안에는 노동자는 자유를 박탈당하고서 사용자에 복종해야 한다. 시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가진 것이었다. 법이 세상의 제도가 부여해 준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천부의 권리가 있다면 시간에 대한 권리야 말로 그런 것이다. 근로계약은 이 천부의 권리를 노동자에게서 빼앗는 계약이다. 분명히 근대는 계약 자유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고, 지금도 이 근대의 세상은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근대의 자유는 사용자 앞에서 노동자에게 보장하지 않았다. 사용자에 대해 노동자가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특별히 사용자 앞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보장할 별도의 방안을 고안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꿈은 그저 꿈이다. 실현될 수 없는 꿈을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고 거짓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워서는 근대의 세상은 종국에는 침몰한 세월호가 되고 말 것이다.

4. 자본의 세상을 넘어 노동의 세상을 선언하고서도 세상은 다르지 않다. 자본의 소유를 폐지하고서 노동하는 인민의 자유를 선언하고 태어난 세상이라도 권력 앞에서 인민이 자유가 박탈되거나 권력에 대해 인민이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면 노동의 세상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꿈일 뿐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는 폐지했을지라도 권력과 노동하는 인민의 관계는 존재하고 거기서 노동하는 인민의 자유의 존부는 노동하는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냐 노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노동하는 인민의 자유가 사라지는 순간 노동의 세상은 인민 없는 권력의 세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건 이 세상에서 노동자단체에서도 그렇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활동이 사라지는 순간 단체는 권력을 행사하는 그들의 것일 뿐이다. 근대는 인민에게 자유를 선언하고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선언한 자유는 사용자에 대해서 행사할 수 없는 자유였다. 무엇이라도 그 자유가 노동자의 것일 때 근대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이 세상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자유는 노동자에게 거짓의 얼굴을 한 근대의 가면일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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