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미 영화평론가

<아버지의 이메일>은 감독의 가족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2008년 12월23일 아침 8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컴맹이었다가 감독에게 이메일 쓰는 법을 배운 아버지는 2008년 한 해 동안 43통의 이메일을 감독에게 보낸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감독은 “메일함에 처박아 둔” 이메일을 읽어 본다.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의 살아온 과거를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몇 자 적어 본다”로 시작되는 이메일은 아버지의 자서전이자 유서였다. 감독은 가족들에게도 이메일을 보여 주지만, 다들 시큰둥하다. 감독은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만 다들 “아무 생각이 없다”고 답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애틋한 존재가 아니었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불편해했다. 삼 남매가 철들면서 봐 온 아버지는 집구석에 틀어박혀 홀로 술을 마시거나 엄마를 때리는 사람이었다. 늙은 아버지가 그나마 바깥 활동을 했던 것은 2000년대 들어 불어닥친 재개발 광풍으로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낡은 집을 잃지 않으려고 재개발반대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에 자주 나간 것이었다.

평생 ‘빨갱이’와 전라도 사람을 증오했으며 매일 술을 마시다 알코올성 우울증으로 생을 마쳤다. 그런 아버지가 왜 하필 사춘기 시절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했으며, 성인이 되자 일찌감치 집을 떠나 '빨갱이'로 살고 있는 딸에게 자기 삶의 기록을 남긴 걸까. 감독은 이 질문을 화두 삼아, 이메일에 쓰인 아버지의 일생을 재연하고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1. 월남한 반공청년, 베트남으로 중동으로

아버지는 1934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8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월남했다. 그는 '인민군이 싫고', '배움이 없을 것 같아서'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 형들이 있는 남한을 향해 ‘죽음의 38선’을 넘는다. 한국전쟁 이후 아버지는 인천의 미군부대에서 폐품을 모아 파는 사업으로 큰돈을 만진다. 서울에서 제빵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아버지는 1965년 어머니와 결혼했고, 대한통운에 입사했다. 젊은 시절 늘 돈 벌 생각이 가득했던 아버지는 북한을 버리고 월남했듯이 남한에서 다시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베트남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리해 베트남에 가고 싶어 했다.

1966년 드디어 크레인 기사로 베트남에 갈 수 있게 되지만, 그의 베트남 생활은 길지 않았다. 큰 기대와 달리 2년 만에 돌아온 그는 의욕을 잃고 간간이 용달차 등을 몰다가 1978년 중동건설 붐이 일자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도 호주 이민을 줄기차게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하릴없이 국내로 되돌아온 아버지는 첫날부터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렸다. 이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집안에 처박히는 신세가 된다.

아버지가 남긴 가방 안에는 가장 자랑스러웠던 시절을 담은 기념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88올림픽 기간 동안 자원봉사를 한 것이었다. 일생 외국에 나가 살고 싶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는 짧은 올림픽 기간 동안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세계인들을 만나는 광휘를 맛봤다.

그러나 그 감격은 지속되지 못했다. 배송회사 운전기사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아파트 경비원 등을 전전하다가 다시 집에 틀어박히게 된다. 아버지가 베트남에 갔을 때 태어난 언니와 사우디에 갔을 때 태어났던 남동생과 달리, 71년생인 감독에게는 그나마 어린 시절 아버지와 공유한 추억이 존재한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금호동 집을 장만하고 둘째 딸을 얻었을 무렵, 아버지에게는 당장 변변한 일자리는 없지만, 어린 딸과 사진을 찍으며 소일하면서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여유는 낙심으로 변해 갔고, 중동에서 돌아온 후로는 더 심한 음주와 가정폭력으로 치달았다. 청소년기에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가장 직접적으로 대면했던 언니는 아버지에 대해 정이 없다. 언니는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해 중산층 가정을 꾸린다. 아버지가 못 이룬 외국생활의 꿈을 이룬 것이다. 언니 집에 왔던 아버지는 한국에서와는 달리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집안일을 돌봤다고 한다. 그의 음주와 가정폭력은 한국이라는 토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2. 연좌제가 옭아맨 청년의 꿈

그렇다. 영화는 그때까지 감독도 알지 못했던 가족사의 비밀을 어머니의 고백을 통해 들려준다.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 교사를 할 정도로 교육받은 여성이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해 혼기를 놓친 노처녀였다. 영화 초반에 어머니는 전쟁 때 오빠들이 실종됐다는 말을 불분명하게 흘린다.

그런데 이것은 무서운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전쟁 후 반공정부는 전쟁 때 실종된 사람들이 월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간주했다. 60년대에는 전쟁 때 월북한 사람들이 간첩이 돼 고향에 나타나는 일도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사망신고가 돼 있지 않은 오빠들의 존재는 위험한 표식이었다. 영화는 후반부에 외가가 보도연맹사건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토록 빨갱이가 싫어 월남한 자신이 ‘빨갱이 집안’에 장가를 든 꼴이었고, 그것은 연좌제가 돼 그가 꿈꾸었던 외국행을 번번이 주저앉히는 힘으로 작용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못한 것이 처가 탓이라는 원망에 사로잡혀 술에 빠져들었고 어머니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행복을 방기한 채 늙어 간 사내를 면죄해 주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 역시 분단과 연좌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보다 더 약자였던 처자식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했으니까. 가족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버지를 용서하거나 화해할 뜻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빨갱이’인 감독만이 아버지의 삶을 한국현대사라는 큰 틀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실제로 아버지의 삶은 분단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중동건설 붐, 88올림픽과 재개발광풍이라는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영화는 진취적이었던 한 청년이 현대사의 질곡을 통해 나쁜 가장으로 늙어 가며 긴 이메일을 통해 가족들에게 화해를 구하는 모습을 처연하게 보여 주면서도, 섣불리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당신을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가해자였던 아버지이자, ‘국가라는 더 큰 아버지’의 피해자였던 아버지를 대하는, 우리 세대의 가장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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