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희 기자

흰 도포를 두른 남자 뒤로 왕이 앉던 자리가 부서진다. 걸음을 옮겨 허공을 응시하자 신기루처럼 흐르던 금빛의 연기가 마을과 성으로 변한다. 남자는 이윽고 화면을 향해 ‘도(道)’라는 각인이 새겨진 인장을 칼처럼 휘두른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의 이야기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의 오프닝이다.

오늘의 모습 역시 그때와 같이 참담하다고 여겨서일까. 난세를 헤쳐 가는 혁명의 이야기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역대 최고의 사극"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한 평론가는 "정도전을 안 보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고까지 추켜세웠다.

현실정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상황설정,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구도, 깊은 울림을 주는 대사는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운다. 대본을 집필한 정현민(44·사진) 작가는 노조간부와 <매일노동뉴스> 기자·국회의원 보좌관 등 드라마 작가로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정 작가는 지난 24일 오전 서울 당산동 한 음식점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작품을 통해 정치적 신념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격정적인 인물들을 그리고 싶었다”며 “오늘날의 정치판에서도 산업화가 먼저냐 민주화가 먼저냐 하는 해묵은 논쟁을 넘어 정도전과 같은 콘텐츠를 가진 기획자가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드라마 인기를 실감하는지.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드라마 <정도전>이 시작하기 전에는 같은 시간에 다큐멘터리를 했다. 시청률이 3~4%였다. 그래서 10회 이전까지는 한 자릿수 시청률을 예상했다. 그런데 첫 회 시청률이 11.6%였다. 이후 시청률이 상승 중이라서 한시름 놓게 됐다. 더 중요한 것은 시청자들의 소감이다. ‘저 정도면 나도 쓰겠다’는 반응이면 부담이 덜할 텐데 너무 칭찬일색이다. 작가로서 영광이지만 지금의 퀄리티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크다.”

"제주서 정도전 읽고, 작품이다 싶었다"

- <정도전>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아침드라마 <사랑아 사랑아>를 지난해 1월4일 끝냈다. 휴식차 제주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침 공동연출을 맡은 강병택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왕도 장수도 아닌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모험적인 작품인지라서 그런지 감독이 노동일간지 기자와 국회의원 보좌관 등 참신한(?) 경험을 가진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나 싶다.(웃음)

감독한테 사극도, 정도전도, 역사도 잘 모른다고 이야기하니 정도전에 관한 책 7권을 줬다. 제주도에서 보름간 낮에는 걷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을 무렵 작품이 되겠다 싶었다.”

- 대본 집필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

“시놉시스를 쓰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지난해 7월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첫 대본을 쓰는 데만 다시 2개월이 걸렸다. 올해 1월 방영이 시작될 때까지 준비된 대본이 8편밖에 없었다. 이후 일주일에 1편을 썼다. 지금은 속도를 높여 한 주에 2편 분량을 쓴다. 2명의 보조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고려사 하나만 알아서는 대사와 이야기가 안 나온다. 여말선초를 다룬 역사서만 작업실에 100여권이 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하고, 창왕 옹립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에는 국회도서관에서 관련 논문을 빌려 온다. 학자들의 관점에서 팩트를 파악하고, 이를 뼈대로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를 입힌다.”

- 1화에서 정도전이 성균관 생도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서경 무일편을 보면 ‘군주는 안이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군자는 노동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각색했다. 사실 내 주의·주장을 작품에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위정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작심하고 넣었다.”

- 드라마 초반은 권문세가의 상징인 이인임이 이끌었다. 정도전과 대립하는 악역인데 묘하게 매력적이다.

“예전 드라마의 경우 악역은 단순하게 나쁜 놈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악역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드라마 전체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해졌다. 이인임에 대해 알아보니 묘한 구석이 많은 인물이었다. 14년 동안 고려 말 최고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부패한 인물이면서도 국가관이 확고하다. 최영 장군과 같은 인물을 상황에 따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정치드라마가 이런 정치력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을 평면적으로 그리면 누가 보겠나.”

"정도전 혁명 결심의 모티브는 양지"

- 주요 인물 중 가상의 인물은 정도전이 거평부곡으로 유배 가서 만난 '양지'가 유일한 것 같다.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들었던 가장 큰 고민은 정도전의 유배를 어떻게 그리느냐는 것이었다. 유배기간은 정도전이 백성의 현실을 소상히 보고 개혁과 혁명을 꿈꾸게 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사료에는 이와 관련해 특별히 극화시킬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정도전의 저작에도 당시 심경이 드러나 있지 않다. 유배기간이 혁명의 모티브가 됐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그리기 위해서는 가상의 인물이 필요했다. 고민을 하다 정도전이 탐독했던 ‘맹자’에서 힌트를 얻었다. ‘양지’는 성선설을 주장했던 맹자가 세운 개념인데,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래의 착한 심성을 뜻한다. 어떤 분들은 로맨스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고 하던데, 양지는 핍박받던 고려 말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 정도전이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보살피지만 이인임의 계략에 의해 무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정도전은 이를 모티브로 역성혁명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 경우가 드문데, 양지의 죽음을 써 내려갈 때는 심할 정도로 감정이 이입되더라. 한 2주 정도 훌쩍인 것 같다.(웃음)”

- ‘이인임 어록’까지 생겼을 정도로 매회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화제다.

“평상시에 말을 할 때 있어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웃음) 사실 특별히 대사를 잘 쓰기 위해 하는 노력은 없다. 너무 쥐어짜면 대사에 힘이 들어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두 달 동안 쓴 1화에서 이인임이 ‘만두 한쪽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만두 접시를 노리지 않는다’는 게 그런 케이스다. 극이 진행되고 캐릭터에 이입이 되다 보면 어느 순간 술술 말이 풀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좋은 대사가 만들어진다. 30대 초반까지 나는 흔히 노동판에서 말하는 골수분자였다. 지금은 솔직히 그런 확신이 사라져 가는 중이다. 사실 현실 세계 자체가 확신을 갖고 살기에는 적절치 않은 공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드라마 안에서는 다르다. 목표와 확신이 없는 인물은 매력이 없다. 더군다나 작중 인물이 모두 선비들이지 않은가. 드라마 속 인물에게 각각의 목표와 세계관이 있다.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부의 양극화·민생 외면, 고려 말과 비슷"

- 이성계의 잦은 눈물과 함경도 사투리가 인상적인데.

“사료를 보면 이성계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가 많다. 이성계뿐 아니라 되도록 극중 인물의 감정 증폭을 크게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학창시절 <영웅본색>류의 80년대 홍콩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는 누아르는 아니지만 정치판에서 펼쳐지는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형제처럼 가까운 두 친구가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라 원수가 돼야 하는 상황, 그런 거 말이다. 선비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이 실제로는 얌전하게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 맨 정신으로 살았을 것 같지 않다. 이성계에게 사투리는 그가 변방 출신으로 고려의 주류 사회에 섞이지 못한 경계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장치다.”

-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가 화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 현재의 대한민국이 고려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려 말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때는 툭하면 왜구가 쳐들어오고, 지주들이 1년에 예닐곱 번씩 나타나 백성들의 수곡을 강탈해 갈 때다. 오죽 살기 힘들었으면 백성들이 자신의 호적을 반납하고,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던 노비가 되려고 했을까.

그런데 당시와 지금이 비슷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부의 양극화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 갖고 있는 땅덩어리는 워낙 넓어 산과 강으로 울타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반면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었다. 오늘날의 ‘1대 99 시위’ 같은 것이 일어난 배경과 유사하다.

국가가 민생을 충분히 보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누군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고려 말과 같은 난세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려 말 목숨 걸고 싸운 정치인들에 큰 감명"

- 왜 이성계가 아니고 정도전인가.

“현 시대가 누구를 더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성계는 왕이 된 사람이지만 정도전은 하나의 나라를 기획한 사람이다. 조선 개국 혁명이 대단한 것은 일단 무너뜨리고 보자는 보통의 혁명과 달리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한 청사진을 미리 만든 후 혁명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조선경국전>을 기반으로 입헌군주제와 거의 유사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현했다. 사병 혁파와 과전법을 중심으로 하는 토지개혁도 큰 성과다.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정도전과 같은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기획자다.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우리나라의 여야는 산업화가 옳으냐 민주화가 옳으냐는 30~40년 전 논쟁을 아직도 반복하고 있다. 마땅한 싸울 거리가 없다 보니 트집 잡고 서로를 물어뜯고 국민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다.

<정도전>을 쓰면서 주위에서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인 중 누가 정도전이냐는 질문이다. 국내에는 없다. 카스트로의 혁명을 돕는 체 게바라가 비슷하지 않나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그런데 체는 혁명을 위해서는 폭력도 동원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정도전은 무혈혁명을 주장했고 성공했다. 한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과정에서 조선처럼 적은 피를 흘린 사례도 드물다.”

- 드라마를 쓰는 일이 본인을 변화시키기도 하나.

“사실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성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조선역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유학이나 동양사상은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막연한 반감도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내세를 강조한 불교지배 국가에서 신진사대부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성리학을 앞세우며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산업혁명 시대에 마르크시즘이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여말에서 선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가들이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은 큰 감명이었다. 드라마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자신이 대표하는 지엽적인 것들을 대변하기 위해 싸우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노조위원장이 주인공인 드라마 나올 때 됐다”

- 경력이 무척 특이하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특히 성룡 영화는 100번 이상 본 것 같다. 글 쓰는 것도 좋았다. 열아홉 살 때 변압기를 만드는 효성 창원공장에서 일하면서 사보에 글을 실었다. 그런데 노조에서 그걸 보고 찾아와 노보를 부탁하는 바람에 노보 편집간부가 됐다. 이후 매일노동뉴스에서 2000년부터 1년 반 동안 기자생활을 하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게 됐다. 10년 동안 여러 국회의원들을 가까이에서 본 경험이 <정도전>을 쓸 때 많은 도움이 됐다. 2008년 보좌관으로 일할 때 한 방송작가가 이쪽 세계를 다룬 드라마를 쓰고 싶다며 취재를 왔다. 지나가는 식으로 드라마를 한번 써 볼 생각이 없냐고 권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듬해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좌관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쉴 때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라.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드라마교육원에 등록했고, 수업을 들으며 KBS가 모집하는 공모전에 <운동권 대 운동권>이라는 원고를 보냈다. 그게 덜컥 당선이 됐다. 2010년 <자유인 이회영>으로 데뷔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은 <정도전>을 잘 마무리하는 게 목표다. 휴식을 좀 취하다 다음에는 좀 가벼운 느낌의 드라마를 쓰고 싶다. 나중에 좀 더 능력 있는 작가가 되면 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 YH사건 같은 것을 배경으로 말이다. 드라마 주인공을 보면 보통 검사나 재벌 2세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건 우리나라에 나 말고도 잘 쓰는 사람이 많다. 한국의 현실을 산업현장과 연계해 보여 주는 작품을 쓰고 싶다. 노조위원장이 주인공인 드라마도 하나쯤은 나와야 하지 않겠나.”

글=양우람 기자
사진=윤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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