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그룹 계열사들이 임금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가 통상임금 확대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한 데 이어 LG전자·디스플레이·이노텍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생명·화재·카드 등 금융 계열사, 삼성BP화학·석유화학·토탈 등 화학 계열사가 임금협상을 마무리했다. 단, 삼성 계열사 가운데 노조(삼성정밀화학)가 있거나, 노조처럼 운영되는 노동자협의회(삼성중공업)가 있는 사업장은 협상 중이다.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는 현재 사측을 대상으로 통상임금 소송을 벌이고 있다.

통상임금 협상은 삼성·LG그룹의 전자·전기 계열사들이 선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LG전자는 통상임금 협상에 앞서 상호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두 기업의 통상임금 합의안은 매우 유사하다. 무노조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노사협의회를 통해 임금체계 개편에 합의했다.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되 기본급의 1.9%로 임금인상률을 결정했다. 유노조 기업인 LG전자 노사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 LG그룹에 따르면 이번 합의로 임금이 약 4% 정도 인상될 것으로 보인다. 두 그룹의 차이점은 삼성전자가 정년연장을 고려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부분이다.

두 그룹 전자 계열사들이 임금개편 합의를 선도한 것은 전자·전기 업종의 특수한 여건 때문이다. 두 기업 모두 통상임금 확대를 고려해야 하는 비연봉제 직원보다 연봉제 직원이 많다. 성과연봉제를 적용받는 임직원이 다수를 이룬다는 얘기다. 또 자동차·조선업종에 비해 전자·전기업종은 고령의 비연봉제 직원도 적은 편이다. 통상임금 확대에 따라 두 기업의 임금비용 추가부담이 자동차·조선업종에 비해 적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무노조이거나 유노조라도 협조적 노사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호재로 작용했다. 이런 여건은 통상임금 소급분을 포기하는 합의에 영향을 주거나, 낮은 임금인상률로 교섭을 타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번 합의가 타 업종에도 영향을 미칠까.

자동차업종의 대표주자인 현대자동차는 임금협상을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다. 현대차는 최근 “상여금시행세칙을 보면 일정근무일수를 채워야만 상여금이 지급된다"며 “고정성을 충족하지 않아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임금개편 관련 협상을 하더라도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현대차 노사는 통상임금 소급분 관련 소송과 임금체계 개편을 둘러싼 단체교섭을 병행하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교섭에서 15만9천614원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한편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차지부는 “상여금시행세칙에는 ‘퇴직한 자에 대해 실근무실일수에 해당하는 지급률로 상여금을 산정해 퇴직금 지급 시 지급한다’는 규정도 있다”며 사측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을 고려할 때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자동차업종은 비연봉제인 호봉제 생산직 직원이 주류이며 고령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게다가 초과근로가 많은 장시간 근로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통상임금 확대에 따라 임금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재계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현대차측이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불가를 외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현재로선 유력한 모델로서 삼성·LG전자의 통상임금 합의가 확산될지 미지수다. 업종 또는 기업마다 여건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임금협상 초반전이기에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2월 통상임금에 대해 소정근로의 대가로 지급되는 금품으로서,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런 취지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못 박았다. 대법원은 신의성실 원칙에 위배할 경우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더라도 가산임금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근로기준법은 강행규정임에도 대법원이 신의칙이라는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일반화되고 있다. 비록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했더라도 삼성·LG전자의 경우 통상임금 소급분을 포기하는 합의를 했다. 신의칙은 과거의 노사합의를 용인한다는 의미인데 현재의 노사합의에도 적용되는 것처럼 확장된 것이다. 노사합의의 효력은 이제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모양새다. 대법원 판결의 역기능이 나타난 셈이다.

통상임금의 순기능마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통상임금은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임금 기준이다. 시간외근로에 대한 가산임금 지급은 장시간 노동을 막고, 노동자의 생활보장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통상임금 확대는 노동시간단축이라는 순기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삼성·LG전자의 통상임금 합의를 보면 임금문제로 국한돼 있다. 장시간 노동체제를 해소하기 위한 임금체계 개편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남은 임금교섭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 적어도 통상임금은 장시간 노동을 해결할 수단으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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