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태 기자

지난 14일 오후 울산 현대중공업 선실생산부 근처. 10년 전 해고에 항거해 분신했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고 박일수씨 추모제가 열렸다. 행사 도중 백발에 꽁지머리를 한 중년남성이 앞으로 나와 군중 앞에 머리를 숙였다.

지난해 10월 당선된 정병모(57·사진)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이었다. 정 위원장은 “현대중노조가 박일수 열사에게 저질렀던 패악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10년 전 박일수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정규직으로 구성된 현대중공업노조는 “열사로 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규직 조합원들이 장례식장을 파손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었던 현대중공업노조가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현 금속노조)으로부터 제명된 계기였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정규직노조 위원장은 영정 앞에 사죄했다.

지난해 12월 정 위원장 취임식에는 처음으로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12년 만에 ‘노조다운 노조’를 강조하는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바뀐 풍경들이다.

<매일노동뉴스>가 현대중공업노조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정 위원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20일 오전 울산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실에서 진행됐다.

- 최근 고 박일수씨 추모제에 참가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직접 연설문을 써서 읽었다. 우리는 박일수 열사의 추모제 한 번 제대로 진행한 적이 없다. 먼저 사죄를 했고,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3만명이라는 얘기도 있고 많을 때는 7만명에 육박한다는 추정도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후생복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할 것이다. 사내하청 조직화도 함께할 생각이다. 이미 사내하청지회와 정책·조직사업을 논의하고 있다.”

-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산재사고·산재은폐가 집중되고 있는데.

"최근에도 산재은폐 건을 적발해 고발조치했다. 원·하청 관리자들이 개입된 죄질이 매우 나쁜 은폐였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보다 위험한 작업에, 숙련도가 낮은 상태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투입된다. 사고가 집중되는 이유다. 주로 단기공사에 투입되다 보니 빨리 끝내기 위해 작업순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다행히 회사도 산재사고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갖고 있다. 사고예방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억눌렸던 민심이 현 집행부 선택”

지난해 10월 정 위원장이 당선된 것을 놓고 이른바 ‘노조다운 노조’를 갈망하는 조합원들의 표심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장에서 억눌린 노동자들이 폭발하면서 이른바 ‘민주노조’를 표방한 집행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또 다른 실리주의의 표출”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장기간 실리·노사협조주의 집행부가 장악했는데도 인근 현대차보다 임금·노동조건이 좋지 않은 데 실망한 조합원들이 강성 집행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 12년 만에 집행부 성향이 바뀐 원인이 뭐라고 보나.

“현장활동을 잘해서 당선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상대편이 잘못해 반사이익을 얻은 점이 있다. 하지만 현장이 워낙 억눌려 있었다. 조합원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87년 대투쟁을 경험한 선배세대가 정년퇴직의 길로 들어서면서 젊은 노동자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들이 처음에는 노조의 순기능을 몰랐다가 현장에서 몸으로 느꼈다고 본다. 선거 때만 되면 불합리한 모순에 직접피해를 당한다. 투표할 때 사측의 온갖 지시와 통제에 모멸감을 느끼면서 ‘이건 아니다’며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선거운동을 하다 보니 당선이 예상됐다. 예전 같으면 조합원들이 우리가 나타나면 도망갔는데, 이번에는 먼저 찾아오더라. 민심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는 지난해 12월27일부터 이달 11일까지 한 달 반 가까이 정기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그럼에도 노조의 핵심부설기관인 노동문화정책연구소 소장도 뽑지 못했다. 집행부가 추천한 소장 후보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었고, 표결에 부친 결과 부결됐다. 후보를 교체한 뒤에야 20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인준됐다.

- 새 집행부가 사업을 힘 있게 추진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동문화정책연구소는 싱크탱크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 집행부가 만든 것이지만 참 잘 만들었다. 그런데도 견제를 받았다.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는 만큼 우려도 있다. 87년부터 한평생 노조 일을 했고, 명예롭게 이런 자리를 맡았으니 소임을 다하려고 한다.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현장의 막힌 언로를 뚫는 것이다. 노조를 건전하게 만들어서 후배들이 노조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다. 현장의 목소리를 막고 있는 규약·규정을 개정하고 조합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 것이다. 노조의 여정에 조합원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겠다. 조합원들이 회사로부터 압력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는 것이 현 집행부와 제가 할 역할이다. 나머지는 조합원들의 여론을 따라 집행만 잘하면 된다고 본다.”

- 임금과 노동조건 향상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대치가 높을 것 같다.

“우리가 중소기업보다는 임금이 높지만 현대자동차와 비교해서는 임금격차가 큰 게 사실이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열심히 실리를 챙길 때 우리는 동결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87년을 경험한 선배세대보다 입사한 지 5~10년 되는 젊은층의 임금이 특히 적다. 7~8년 뒤면 87년 세대가 다 빠져나간다. 그러면 평균임금이 훨씬 낮아진다. 젊은 노동자들이 현 집행부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메울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상급단체 가입, 아직 준비 안 돼 … 조선업종 연대는 활발히”

- 위원장에 당선될 때 상급단체 가입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상급단체에 가입할 경우 예산 문제가 생기고, 조합비도 인상해야 한다. 전 집행부가 조합비를 줄인 상태에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상급단체 가입에 대해) 조합원들의 결의가 모아지더라도 이런 문제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가입은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 대신 업종·계열사 간 연대사업은 활발히 하려고 한다. 금속노조의 조선분과대표자회의에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 그룹 계열사 노동자들로 구성된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현대미포조선노조와도 폭넓게 연대할 계획이다. 계열사 노조들과는 임단협 공동요구안을 마련하기 위해 교류하고 있다. 다음달 6일 대표자회의에서 공동요구안을 확정한다.”

- 통상임금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나.

“최근 회사측에 대법원 판결취지를 반영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회사측은 공문을 보내 2012년 12월 제기한 대표소송 결과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집행부가 선임한 대리인이 기업들과 오히려 더 가까운 쪽이어서 고민이다. 올해 임금·단체교섭에서 다룰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송을 집단소송으로 전환하는 문제도 검토하고 있다.”

- 6월에 지방선거가 있다. 울산은 노동계 전략지역인데.

“진보진영이 단일후보를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노조 정치위원장을 통해 후보군을 조정하고 압축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후보가 있다면 적극 지원할 것이다. 하지만 후보가 난립하고 조정이 안 되면 지원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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