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딸 고 황유미씨를 위해 6년간 법정투쟁 끝에 산업재해 판결을 이끌어 낸 황상기씨의 이야기를 담은 극영화다.

영화는 제작단계부터 순탄치 않았다. 대기업의 투자를 받지 못한 탓에 3만여명의 개인 후원자들이 제작비 10억원을 마련했다. 제작을 마치고도 고난은 이어졌다. 관객들의 호평과 높은 예매율에도 국내 극장의 90%를 점유한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들은 상영관을 쉬이 내주지 않았다. 영화의 배경이 삼성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42·사진) 감독을 만났다.

김태윤 감독은 “삼성이랑 싸울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100% 거짓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을 상대로 이길 수도 없거니와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중간에 그만뒀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김 감독이 “좋은 영화적 소재를 만난 영화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든 것일 뿐”이라며 “만약 삼성이 어떤 해코지를 한다면 그것으로 또 영화를 찍으면 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또 하나의 약속>은 20일 현재 관객수 40만명을 돌파했다.

- 얼마나 더 볼 것 같나.

"100만명이 의미 있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면 전 국민이 삼성 백혈병 문제를 알 수 있는 수준은 될 것이라 본다. 도심지 극장은 안 내주고 교차상영까지 하는데도 이 정도면 많이 봤다."

- 본전은 뽑을 수 있을까. 손익분기점은 얼마로 보나.

"최소한 65만~70만명 정도 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극장이 (영화를) 걸어 주지 않으면 IPTV(인터넷을 기반으로 제공되는 TV서비스)라도 잘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도 방해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9.7점 감독으로 불리다

- 관객수를 떠나 평점으로 보면 최고다.

"보시는 분들 반응이 굉장히 좋다. 평점은 양대 포털사이트에서 최고로 높다. 그것도 역대 영화 중에서…. 그것으로 자위하고 있다."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약속> 마케팅 관계자가 "별명이 9.7 감독"이라고 귀띔했다. 포털사이트에서 <또 하나의 약속>이 9.7점으로 최고 평점을 갱신하면서 영화계에서 김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 극장에서 보면 영화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더라. 그만큼 몰입해서 본다는 것인데. 이런 관객 반응은 예상했나.

"<또 하나의 약속>은 다른 세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시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래서 관객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김 감독은 "관객 대다수는 삼성 백혈병 문제를 전혀 모른 채 극장에 온다"고 말했다. 영화의 뼈대가 되는 고 황유미씨 이야기는 그가 숨진 2007년 세상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영화로 삼성 백혈병 사건을 접한다. 삼성전자라는 거대기업의 이면을 처음으로 마주한 관객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 일각에서는 영화의 수위가 낮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화를 잘 아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름 잘 다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영화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건을 더 세게 파헤쳐서 보다 비판적으로 그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 현실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수위를 낮췄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니다. 영화가 삼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주인공을 변호사로 했을 것이다. 그 사건을 직접 파헤치는 과정을 보여 주면 되니까. 그런데 주인공은 아버지다. 속초 택시운전사에 불과하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영화가 전개되는데 전문적인 용어를 쓰고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는 없었다. 영화의 수위가 낮다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다큐멘터리나 시사프로를 권하고 싶다. 이건 극영화다."

- 아버지가 주인공인 이유는.

"처음 소재를 접하고 주인공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변호사? 노무사? 아님 아버지? 인터뷰를 많이 해 보니 알겠더라. 이 사건에 직접 뛰어들어 '해결하는 힘'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고 황유미씨 사건은 복잡하다. 삼성이라는 체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변호인>처럼 국가권력이 순진한 대학생에게 간첩혐의를 덮어씌우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확인된 팩트만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절대악으로 그려 낼 수 없었다. (삼성측에서)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포섭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을 상상으로 그려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장 쉬운 방법은 고문이나 폭력인데, 아버지 황상기씨에게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영화는 거의 실화 그대로다."

- 난주 역의 김규리씨가 돋보였다. 검사나 형사, 혹은 변호사가 주인공인 영화는 많은데 '공인노무사'가 전면에 부각된 영화는 <또 하나의 약속>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알기로도 그렇다. 반올림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노무사 난주의 모델인 이종란 노무사가 가장 힘들어 보였다. 유족은 싸울 이유가 명확하지만 노무사는 타인이다. 그런데도 '왜 소송이 안 되나', '이길 수는 있나' 하며 애태우는 유족을 다독여야 하고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버텨야 한다."

- 당사자인 유족과 타인인 노무사의 관계처럼 영화에서도 일정한 거리 두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기를 바랐다. 어떤 관객은 영화에서 심판을 기대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슬프다. 여기서 더 감정이입이 들어가면 피로감이 커진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남의 슬픔으로 장사한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봤으면 좋겠다. 다큐멘터리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건 연출자의 선택이다."

-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제작진은 '국내 최초의 산업재해 블록버스터'라고도 하고, '딸을 잃은 아버지의 휴먼드라마'라고도 했다. 어디에 초점을 맞췄나.

"2011년 6월23일 법원에서 황상기씨가 승소했다. 예상 못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와 노무사를 만나 인터뷰하면서 어떤 주제로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했다. 삼성이 가진 가장 큰 힘은 무엇일까. 그 사람들이 가진 것은 돈이다. 폭력을 쓰는 집단은 아니니까. 그래서 돈에 대한 유혹을 이겨 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일반 관객들에게도 이 점이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들 역시 고문이나 폭력보다는 돈의 유혹, 자본으로 인한 고통에 더 가까이 있으니까."

실제로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극중에서 진성)을 절대악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악마보다 훨씬 촘촘하게 우리를 옭아매는 모습을 뒤쫓는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기 뇌를 소화시켜 버린 채 식물처럼 사는 멍게가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믿고 끝까지 싸우는 길밖에 없다.

김 감독은 "영화를 만든 목적 하나는 이미 달성했다"고 말했다. 요즘 감독인 그보다 인터뷰 섭외요청이 더 많이 쏟아지는 실제 주인공 황상기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립된 싸움을 하는 이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하는 것. 김 감독은 "이런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며 "그게 이번 영화를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고 강조했다.

"극장들의 횡포, 이게 더 영화 같다"

-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00% 크라우드펀딩으로 만든 영화인데. 기존 영화제작 시스템과 어떻게 다른가.

"제작비로 총 10억원을 썼다. 제작두레로 3억원, 개인투자자들이 나머지를 책임졌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제작구조다. 너무 힘들다. 장점은…. 뭐 엔딩크레디트가 감동적이라는 점이랄까. 수많은 지지자를 업고 가는 것이라 힘이 된다. 문제는 개봉 이후다. 정당하게 많은 관객들을 만나야 하는데 극장 횡포 때문에 3분의 1 정도밖에 만날 수가 없다."

- 상영을 가로막는 극장들을 제재할 방법은 없나.

"영화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국내 상영관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영화계에서도 제도개선 이야기가 나오지만 힘든 싸움이다. 영화인 대부분 재벌회사에서 돈을 받아 만든다. 쉽게 나서기 어려운 처지다. 바보 같다. 이런 현실이 더 영화처럼 느껴진다."

- <또 하나의 약속> 제작 과정을 보니 노동계의 투자도 인색한 편이더라. 원진레이온 산재 피해자 할아버지들이 1천만원을 내놨는데 다른 노조들은 조용했다.

“다들 생활이 팍팍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은 영화도 잘 못 본다. 최근에 노조에서 단체상영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긍정적이다.”

"약자들의 연대를 보여 주고 싶었다"

- 원래 노동 분야에 관심이 있었나.

"학교 다닐 때 열심히 놀기만 했다. 얼마 전 선배가 카카오톡에 <또 하나의 가족> 포스터를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길래 '형, 이거 내가 찍었어요' 했더니 '너 같은 양아치가?' 하면서 깜짝 놀라더라."

- 왜 비주류인 '노동'을 영화 소재로 삼았나.

"우리들 대부분은 노동자다. 극중에서 진성전자의 이 실장도 노동자다. 악의 축이 될 수 없었다. 사실 <또 하나의 약속>도 '법원 승소'라는 엔딩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단지 고통 받고 있다고 영화가 될 수는 없다. 극적인 흐름이 있어야 한다. 재능교육이나 밀양 송전탑 문제도 있지만 영화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지 답이 안 보인다."

김 감독은 "특정기업을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들의 연대를 보여 주고 싶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쩌면 삼성반도체의 백혈병을 통해 산재에 무감각한 우리 사회를 흔들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약속>은 왜 산재로 안타까운 목숨이 희생되는지, 산재로 인정받는 게 왜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어떤 기자가 영화를 보고 이런 말을 하더군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쳤는데 사장이 산재 신청하면 자른다고 협박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그 기자를 협박했던 사장이나 황상기 아버님을 회유했던 삼성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르죠?”

이제 우리 사회가 <또 하나의 약속>에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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