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반도체’를 입력하면 ‘백혈병’이 뒤따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반도체와 백혈병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었다.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다 백혈병에 걸렸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런데 피해자가 잇따라 나타났다. 2007년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시작됐고 반도체와 백혈병의 연결고리가 점차 선명해지고 있다. 고 황유미씨와 아버지 황상기씨의 실화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도 연장선일 것이다. 하지만 삼성을 상대로 반올림이 벌이고 있는 힘겨운 싸움은 반도 못 왔다. 삼성은 여전히 진상규명 등 반올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이종란(38·사진) 노무사는 “나쁜 쪽으로 최선을 다하는 삼성과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1일 오전 서울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이 노무사를 만났다. 그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난주(김규리)역의 실제 인물이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몇 번이나 봤나.

“다섯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울었다. 영화에서 이보근 진성전자 실장이 (아버지를 회유하려고) 500만원을 들고 병원에 찾아오는 장면이 유난히 슬펐다. 당시 삼성이 피해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영화를 보면서 그때 일들이 떠올랐다.”

- 반올림 활동의 성과를 꼽는다면.

“이 문제를 덮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반도체산업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예전에는 몸이 안 좋아도 병인지 몰라 병을 키웠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건강이 나빠지면 바로 퇴사한다.”

- 삼성을 상대로 8년 가까이 싸웠는데. 달라진 점이 있나.

“삼성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형식적으로 피해자와 협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대화를 하자고 한다. 삼성은 어떤 상황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반도체 생산공정은 안전해졌나.

“반도체산업은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을 가장 많이 쓰는 위험산업이다. 수백 가지 위험물질의 안전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안전성이 확인된 화학물질로 대체한다면 피해자가 줄어들 수 있겠지만, 비용절감을 위해 값싼 화학물질을 쓰고 있다. 또한 기술발전과 생산속도에 비해 안전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부 차원의 규제가 필요하다.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위험물질을 공개해야 하는데 정부나 삼성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 반올림 활동계획은.

“반올림을 설립할 때 세운 세 가지 목표는 산재인정을 통한 보상과 사과·진상규명·재발방지 대책 마련이었다. 삼성과 교섭을 하면서 세 가지를 요구했다. 칼자루는 삼성이 쥐고 있다. 반도체 생산공장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다. 심각한 범죄행위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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