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현 변호사
(민주노총 법률원)

1심을 본인이 직접 진행하다가 패소한 후 찾아와 항소심을 수임해서 진행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수원에 소재한 운송회사에 다니는 운수노동자에 관한 사건이었는데 회사로부터 150만원의 손해배상청구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청구액이 소액이다 보니 1심은 소액사건으로 진행됐고 구체적인 판결 이유도 모른 채 사건을 맡아 진행하게 됐습니다.

원고 회사는 대규모 물류회사로부터 각종 물류의 운송을 위탁받아 이를 수행하는 회사였고 피고는 이 회사의 지시에 따라 위탁받은 물품을 전국 각지 물류센터에 운송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운수노동자였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운전 중 걸려온 원청 관리자의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원청 관리자는 피고에게 왜 빨리 오지 않느냐며 채근했고, 피고는 "너무 졸려 운전을 할 수가 없어 휴게소에서 한 시간 가량 눈을 붙였다"고 솔직히 이야기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원청 관리자는 반말로 피고를 나무라기 시작했고 피고도 순순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원청 관리자는 피고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에 화가 났고 회사 직원을 불러 항의한 후 지연도착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요구했습니다. 회사는 원청이 요구하는 손해액을 배상해 주고 이를 다시 피고에게 청구했습니다.

사건 기록을 검토해 보니 금액도 소액이고 근무 중 수면을 취한 것은 사실이어서 조정을 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의뢰인으로부터 구체적인 사건경위를 들어보니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건은 설연휴를 즈음해 택배물류가 폭증하던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회사는 피고에게 이틀간 총 15시간 이상의 충분한 휴게시간을 주면서 운행을 지시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습니다. 회사는 GPS 기록을 토대로 피고가 운전한 차량이 물류센터를 출발한 시각부터 다른 물류센터에 도착한 시각 외의 모든 시간을 휴게시간이라고 주장했지만 피고는 물류센터를 출발하기 전이나 도착한 후에도 계속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적재하거나 하차하기 위해 차량을 계속 움직였던 것이지요. 이는 피고가 직접 자신의 비용으로 차량에 설치한 CCTV와 블랙박스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사는 원청회사가 피고의 지연도착으로 인해 추가로 10대의 차량을 용차했고 이에 소요된 비용이 150만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증거로 제출된 세금계산서에 기재된 금액은 1천만원이어서 회사가 주장하는 금액과 일치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제 추가로 용차했다는 차량들도 원청이 물류센터 내에 상시 대기해 놓은 차량이어서 피고의 지연도착으로 인해 추가로 발생한 손해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명절의 경우 물류량의 비약적인 증가로 물건의 상·하차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물류센터에 평소보다 많은 차량이 몰리기 때문에 이에 따른 대기시간도 증가하는 사정을 감안해 평소보다 넉넉하게 도착시각을 예정하고 있어 이에 따르면 피고는 지연도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틀 동안 잠도 못자고 운전만 했는데 사고가 나든지 말든지 너무 졸려 눈이 떠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도착시간에 맞추기 위해 운수노동자는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것인지 피고로서는 너무도 억울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제가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회사가 이러한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소액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액사건 항소심 전에 으레 지정되는 조정기일에 출석해 보니 금방 이해가 됐습니다. 조정기일에 출석한 회사 관리자는 원청회사에 시쳇말로 얼마나 까였는지, 직접 자신이 원청 관리자에 불려가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그래서 피고가 얼마나 회사와 소속 직원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인지 구구절절 늘어놓았습니다. 결론은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도 원청의 손해배상 요구가 이른바 ‘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원청의 부당한 손해배상에 항의하거나 배차를 늘려 운전자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것보다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를 손보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 방법이 더 이윤이 남는다고 생각했겠지요.

회사는 조정에 참가했던 관리자에게 원고보조참가를 신청하도록 해 재판을 진행하려는 꼼수를 부리려다 1회 변론기일에 재판장으로부터 재판부를 기망하는 것이라며 호되게 혼이 났습니다. 보조참가는 소송결과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는 제3자가 한쪽 당사자의 승소를 위해 소송에 참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송 당사자는 직접 재판에 출석하거나 대리인을 선임해야 하는데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관리직 직원을 대신 출석시키려 했던 것이지요.

곧 다음 변론기일이 열립니다. 원고회사는 150만원을 위해 수백 만원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할까요 아니면 공사가 다망하신 대표이사께서 직접 법정에 출두하실까요. 원고 회사의 선택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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