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우 기자

국내기업 H중공업의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 근무하는 필리핀인 직원 P씨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기숙사를 지원해 준다는 약속에 10년간 일하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3개월 수습기간이 끝난 후 P씨가 서명한 근로계약서는 H중공업이 아닌 하청업체 계약서였다.

계약조건도 달랐다. 필리핀 노동법은 6개월의 수습기간이 지난 후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H중공업은 직접고용을 피하기 위해 100여개의 하청업체를 통해 고용한다. P씨는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조활동을 하다 적발됐다. 그는 현재 화장실 청소와 벌초를 제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18시간 노동에 아동노동까지

해외에 진출한 국내기업의 현지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직접고용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을 하는 등 국내에서 비판받던 ‘꼼수고용’을 해외에서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 인권교육센터에서 개최한 ‘해외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 상황 실태조사 토론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현지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용역을 담당한 김진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상수 서강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김종철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지난해 8월 문헌조사와 방문조사를 통해 필리핀·미얀마·우즈베키스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실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에 진출한 국내기업의 투자금액은 2003년 40억달러에서 2012년 231억달러로 6배 이상 늘었다. 해외진출 국내기업들은 그러나 제조업 등 22개 업종에서 단결권·아동노동·비인간적인 대우 등 17개에 해당하는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미얀마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경우 1일 총 근로시간이 18시간이 넘는 기업도 있었다. 15세 미만 아동이 성인노동자와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기도 했다. 필리핀에서는 여성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에도 휴식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요도염에 시달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수 교수는 “국제기준을 명백히 위반하는 아동노동과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 변호사는 “투자를 담당하는 한국수출입은행·코트라·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이 한국기업의 인권침해 여부를 감시하는 체계가 없다”며 “필리핀 정부와 관계부처가 제공하는 자료에 의존해 독립적 조사와 철저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기업 인권침해, 정기적으로 감시·보고해야”

이날 토론회에서 ‘해외 한국기업의 인권침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 주제발표에 나선 황철규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방문한 재외공관 중에는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를 감독하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생각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며 “기획재정부는 대외관계에 악역향을 미치는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를 정기적으로 감시·보고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외국환관리규정 제9조에 “해외진출 한국기업이 노동관계 법령과 현지국 법규를 위반할시 감독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만큼 인권침해 행위를 감시하고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 변호사는 “정부가 기업에 일관된 메시지를 주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기업과 인권에 관한 행동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황 변호사는 해외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권에 기반한 공적기금 투자지침 마련 △강제노동에 대한 실사와 공시의무 부과 △공기업 투자 및 운영 단계에서 인권을 반영한 평가체계 도입 △관세법 개정을 통해 인권침해와 관련한 물품 수입금지 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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