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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34] 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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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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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

김헌정은 ‘시간표’를 갖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갔을 때도, 노동자사랑방을 열 때도, 노동정책연구소를 설립했을 때도, 그는 이 시간표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 시간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시간표였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를 거쳐 경기도노조를 설립하고 전국단일조직 건설을 구상할 때 그에게는 이미 ‘환경미화원을 국회의원으로’ 만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과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약속이자 평생 천대받고 억눌린 환경미화원들과의 약속이었다.

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게 곧바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개념이다. 노동자 국회의원은 그 한 명이 헌법기관이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조직된 노동자의 대표여야 한다. 그래서 김헌정은 전국민주연합노조를 민주노총의 충실한 단위부대로 만들었고 조합원들의 민주노동당 집단입당을 추진했다.

그렇다면 노동자 국회의원은 누가 돼야 하는가. 무엇보다 노동자의식이 투철해야 하며 자신이 노동자 조직의 무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급적이면 정책을 이해할 지력(智力)과 원내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전술적 유연함을 갖춰야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대중의 조직사업에 복무하겠다는 자세다.

한 명의 똑똑한 노동자 국회의원이 열 명의 성실한 노동조합 간부보다 나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열 명의 성실한 노동조합 간부가 백 명의 열성적인 조합원들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한 명의 똑똑한 노동자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기 위해 백 명의 열성적인 조합원들이 노동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게 된다면, 그것을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실은 복잡하다. 노동자 국회의원이 수행해야 할 ‘공중전’이 있는가 하면, 노동조합이 담당해야 할 ‘지상전’도 있다. 경제투쟁만으로는 안 되니까 정치투쟁을 하고, 정치투쟁을 하다 보니까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역할분담의 성과는 최종적으로 노동자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노동자 대중의 처지는 단시간 내에 개선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열 명도 안 되는 노동자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갑을 당장 불려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노동자 국회의원의 임무는 ‘해결사’에 있지 않다. 보수정당의 국회의원들이 정책과 예산을 대행해 주고 유산계급으로부터 품삯을 받을 때, 노동자 국회의원은 노동조합을 엄호하고 투쟁의 선봉에 서서 무산계급을 보위해야 하는 것이다.

김헌정은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2008년 2월 22일 전국민주연합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홍희덕 전 위원장님의 비례대표 전략공천과 관련해서 상세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민주노동당이 지난 2월 19일 중앙위를 개최해 비상대책위를 구성했고 총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비대위는 첫째 총선을 책임지는 지도부이고, 둘째 비례대표 전략공천을 결정하는 지도부입니다.

비례대표 전략공천을 추진할 때 우리의 명분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민주노동당에 상당히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그 이유는 진정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생각하는 의원단이 아니라 최근 탈당하시는 분들처럼 자기중심적인 분들이 향후 비례대표에 많이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 노조처럼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모범을 보인 노동조합에서 추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홍희덕 동지께서 비례대표 후보가 되는 것은 개인의 뛰어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우리 노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정세는 아주 나빴다. 권영길 후보가 대선에 세 번째로 도전했지만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얻은 표의 절반밖에 안 되는 70여만표를 얻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대참사였다.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내 갈등은 대선이 끝나자 폭발했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종북 논란’과 ‘탈당 사태’가 이어졌고 끝내 민주노동당은 쪼개졌다.

김헌정은 분당을 주도한 세력들과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그래도 분당을 막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심상정 의원의 고양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고양지부 조합원들과 함께 참석해 축하한 뒤 뒤풀이 자리까지 가서 심 의원을 설득했다. “인력이고 재정이고 우리가 선거에 도울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며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제발 탈당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으나 김헌정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민주노동당 따로, 진보신당 따로 선거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당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가능한 대로 조합원들을 내보내 싸우기로 했다. 의정부에서 김인수 정책국장, 강릉에서 염우철 조합원, 속초에서 이성국 지부장이 출마했다.

2008년 3월 24일 전국민주연합노조 조합원 2천여명은 국회가 훤히 내다보이는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 집결해 ‘환경미화원 총선 출마 선포식’을 개최했다. 조합원들은 4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기약하며 집단입당식을 가진 바 있었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분당이라니, 조합원들은 어리둥절한 마음 반, 야속한 마음 반이었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씩씩했다.

“홍 위원장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함께 비질을 하던 동료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조합원들은 환경미화원 모자를 쓰고 연두색 빗자루를 하늘로 치켜든 채 낡은 정치 추방과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환경미화원을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일은 노동자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당사자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홍희덕 위원장의 임기만료일은 2008년 1월 31일이었다. 홍 위원장의 소망은 의정부지부의 조합원으로 동료들과 정년퇴직을 맞는 것이었다. 의정부 투쟁 이래 십 년 동안 그는 짬을 낼 틈이 없었다. 전국을 뛰느라 본의 아니게 소홀해진 예전 동료들과 다정하게 어울리고 싶었다.

홍 위원장은 “나는 아니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외려 “동지가 가시오”라며 김헌정의 등을 떠밀었다. 이 말에 동요할 김헌정이 아니었다. “현장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못을 박는 김헌정에게, 홍 위원장은 “현장에는 나보다 더 배운 사람이 많다”며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내가 “당선돼도 손가락질 당한다”고 말리던 게 생각났다.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자, 홍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좀 천천히 하면 안 되겠느냐”고 김헌정에게 사정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김헌정은 “힘들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라며 어렵게 입을 연 뒤 고개를 떨구었다.

김헌정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게 2005년 여름의 일이다. 김헌정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환경미화원을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헌정은 정년퇴직을 바라보는 동지에게 “위원장님, 제가 오래 못 살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전국민주연합노조 사전에 ‘개인’이란 없다. 전 간부들이 나서 홍 위원장을 설득하고 조직의 명령에 따를 것으로 주문하자, 홍 위원장은 결심을 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분당으로 민주노동당이 어려워진 마당에 자기처럼 사심이 없는 사람이 국회로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홍 위원장은 어진 이였다.

비례대표 2번 후보 물망에 최종적으로 오른 인사는 홍희덕 위원장과 이남신 이랜드노동조합 부위원장 두 명이었다. 둘은 1년 전 상암동 홈에버 매장에서 손을 잡고 함께 싸운 사이였다. 두 사람 모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홍 위원장은 환경미화원 출신으로서 밑바닥 노동자를 대표하는 상징성과 함께 전국민주연합노조를 이끌면서 확인된 투철한 노동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이남신 부위원장 또한 이랜드노동조합 투쟁을 주도한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의 적임자라 할 수 있었다.

과연 누구를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해야 하는가.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4년 전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당원들이 판단을 해 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례대표 당선권은 잘해야 4번이라는 사실이 비대위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4년 전에는 비례대표 8번인 노회찬 후보도 당선됐다. 당이 제대로만 했다면 이번에는 최소한 10번까지는 당선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대위의 최종 결론은 홍희덕 위원장이었다. 당이 어려워진 데에는 초심을 잃은 게 가장 컸다. 현장은 붕괴되고 있는데 막상 그 현장을 지키다 잡혀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50년 전 진보정당의 당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0년 후 진보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1명과 탈당으로 비례대표 의원직을 내놓은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히 임기를 마쳤다.

‘청문회 스타’가 되면 뭐하고 ‘토론회 스타’가 되면 뭐하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원내진출 직후 반짝 오르고 난 뒤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에 필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었다.

홍희덕 위원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2번으로 등록하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전국민주연합노조 조합원들은 전국의 어느 지역구든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면 즉각 빗자루를 들고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노조 출신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민주노동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홍희덕 후보가 대구에 갔을 때다. 화물연대 경산지부에 들렀다. 조합원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맞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환경미화원 홍희덕을 국회로 보내고 다음에는 트럭 모는 우리들이 국회로 갑시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이 예정된 늙은 환경미화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런 게 바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아닌가.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의 성적은 미흡했지만 그것은 예고된 인재(人災)였기에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강기갑 후보가 경상도 땅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 냄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2008년 4월 19일 저녁 전국민주연합노조 사무실은 감격의 도가니였다.

“우리가 해냈다!”

함성이 연달아 터졌고 간부와 조합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 동지들과 함께 그 순간을 만끽하는 김헌정의 뇌리에는 지난 십 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김헌정은 약속을 지켰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홍희덕도 약속을 지켰다. 이제까지 전국민주연합노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노동자는 하나’를 실천하는 노동자 국회의원이 됐다. 그가 쓴 《국회의원이 된 청소부, 홍희덕의 지구 여섯 바퀴》에는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해 본다.

“책 제목에 쓰인 ‘지구 여섯 바퀴’는 국회의원으로서 그가 누빈 거리의 총합인 25만km를 의미한다. 이 긴 여정의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열심히 일한 만큼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단호히 저항했던 노동자들을 향했다. 일하는 기타 콜트악기, 다문화사회의 모순 이주노동자노조, 밤에는 잠자며 일하고 싶었던 유성기업, 오랜 정리해고 투쟁 끝에 법정 승리를 일궈 낸 진방스틸, 점심값 300원 착취에 맞서 사회연대의 시발점이 된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 이 순간에도 투쟁 중인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등 투쟁의 현장을 그는 꼼꼼히도 챙겼다.”

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운동권 학생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경찰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므로 혁명이라는 음절을 입 밖에 내는 경우는 없었다. 혁명은 영어로 REVOLUTION이다. 우리는 REVOLUTION의 앞 글자를 따서 혁명을 ‘알(R)’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우리들끼리만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였는데 나중에는 안기부나 경찰 대공과에서도 ‘알’ 하면 혁명인 줄 알게 됐다. 그럴 정도로 운동권들에게 혁명이란 단어는 일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는 ‘알’이 곧 되는 줄 알았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나서야 나는 혁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이뤄지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지금 혁명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6월 항쟁을 거치고 소련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개혁으로 대체됐다. 내게 혁명을 가르쳐 줬던 선배 세대들 가운데 일부는 보수정당의 정치인이 됐는데 그들 역시 지난 추억을 잊지 못했음인지 가끔씩 혁명을 입에 올리기도 한다. ‘공천혁명’이라고 하던가.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혁명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오늘도 혁명을 입에 올린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알’이라는 표현은 안 쓴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여전히 가진 자들의 세상인데 왜 혁명이라는 단어는 사라진 것일까. 노동자와 농민이 집권을 했는가? 통일조국이 건설됐는가?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한데 혁명은 대체 왜 자취를 감췄을까.

언젠가 통일혁명당 재건사건으로 18년간 옥고를 치른 통일광장의 권락기 대표님께서 우리 노조에 강의를 오신 적이 있다. 내가 권락기 대표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처음에는 사양을 하셨다. 자신의 경험을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으로 일하는 조합원들이 받아들이는 게 무리이지 않겠냐는 의견이셨다.

나는 우리 조합원들께서 나이가 많으시고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조합원들께서는 학생들처럼 책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깨닫고 민주노조운동을 하셨기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또 이런 교육은 한 번으로 끝나면 안 되고 지속돼야 했기에 권낙기 대표님 말고도 여러 장기수 선생님들을 강사로 모셨다.

안양의 최봉현 지부장은 ‘왜 빨갱이를 불러서 교육을 시키지?’ 라는 의문을 가졌고 그 뒤에 비전향 장기수로 24년간 감옥에 있었던 이학천 선생님께서 교육을 오시자 ‘18년보다 더 심한 24년’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는데, 그도 노조 활동과 교육을 통해 이제는 장기수 선생님들처럼 결코 놓을 수 없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

1971년생으로 아이가 둘인 최봉현 지부장은 사용자에게 내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조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 노조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돈 벌어서 아이들 학원 보내주는 게 좋은 부모 노릇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조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 조합원들의 호응과 변화에 고무된 권락기 대표님께서는 “인간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닌데 내가 선입견을 가졌다”고 토로하셨다. 이런 인연으로 권락기 대표님으로부터 가끔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권락기 대표님께서 한 번은 “헌정아, 혁명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닌데……”라고 충고하셨다. 진짜 혁명가 앞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나도 좀 경망스럽긴 했다. 그래도 그 이유를 말씀드렸다.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 의식이 부족하면 말 한마디라도 더 해서 의지를 다져야 한다. 물론 치열한 실천을 전제로 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닌다고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하, 요놈 봐라’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권락기 대표님께서는 기분이 좋으셨던지 더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다.

“혁명이라는 건 혁명적 이론이 있고 혁명적 지식이 있다. 이론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휘발유가 없어서 달리지 못하는 차나 마찬가지고, 지식은 있는데 이론이 없으면 과속을 하게 된다. 나는 네가 둘 다 겸비했다고 보는데 가끔 과속을 하는 것 같으니까 관맹상제, 사나움과 너그러움이 잘 조화됐으면 좋겠다.”

관맹상제(寬猛相濟)는 공자가 지은《춘추(春秋)》를 해설한《좌전(左傳)》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초기 정(鄭) 나라에 정자산(鄭子産)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어질었으며 부국강병의 야망 또한 갖고 있었다. 정자산은 대신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려면 먼저 너그러운 정책을 펴고 나서 엄격해야 함을 강조했다. 정자산이 죽고 대신들은 정자산의 가르침 가운데 관대함만 취했다. 결국 사회 혼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례를 들어 공자는 “정치가 너그러우면 백성들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 백성을 되돌리려면 정치가 사나워지게 된다”고 지적한 뒤 “너그러움(寬)과 사나움(猛)이 서로(相) 도와야(濟)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관맹상제의 유래다. 정자산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겨울 날 정자산이 수레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아낙 하나가 치마를 올리고 맨발을 살얼음이 낀 개울에 담그는 것이었다. 성품이 어진 정자산은 자신의 수레에 아낙을 태워줬다. 아낙을 건네주고 나니 반대편에 또 다른 아낙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정자산은 출근을 못하고 말았다.

훗날 이 일화를 맹자(孟子)의 제자가 스승에게 전하고 가르침을 구했다. 맹자는 정자산이 어진 것은 사실이나 정치는 전혀 모르는 위인이라고 평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정자산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했다면 농한기에 백성들로 하여금 다리를 놓게 했을 것이네. 다리를 놓았다면 왜 백성들이 한겨울에 맨발로 개울을 건너겠으며 왜 일국의 재상이 출근을 못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우리 조합원들은 백성이 아니다. 나 또한 재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춘추시대의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적절한 비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무릇 세상일이란 정(情)으로 풀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의(義)만으로 풀 수도 없다. 선생님의 말씀을 그런 뜻으로 새겼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내 눈치를 다 아신다는 듯이 싱긋 웃으시면서 이번에는 “네가 조합원들 잘 모시는 건 아는데 가끔 땡깡도 부리고 독재도 한다면서?”라고 물어보셨다. 내가 미처 대답을 올리기도 전에 선생님께서는 “독재라도 철학이 있는 독재는 때로는 필요하다”고 부드럽게 운을 떼신 뒤 “그러나 빈껍데기뿐인 독재는 안 된다”라고 하시며 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권락기 대표님 말씀처럼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때로는 과속을 하고, 때로는 중앙집중제를 외치며 독재를 했다. 물론 후회하거나 자책하지는 않는다. 우리 조합원들은 나이가 많으시고 많이 못 배우셨다지만, 그렇다고 지혜와 인격이 모자란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조합원들께서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여기셨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홍희덕 의원실 보좌관 사태’라는 게 터졌을 때 민주노동당 게시판에 홍희덕 의원님더러 ‘김헌정의 허수아비’라고 쓴 글이 올라왔다. ‘민주노동당에서 가장 악착같은 정파는 경기동부가 아니라 민주연합노조’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조합원들이나 홍희덕 의원님이나 나는 그런 험담에 상처받지도 않았고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미 사선을 함께 넘었다.

조합원들도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조합원들과 내가 악으로 깡으로 쌓아 올린 결과 우리 노조는 민주노조로서 우뚝 섰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힘써 환경미화원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이 무너져 가는 상황 속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노동자들이 일어나 대기업 금속 노동자들도 꺼리는 치열한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이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우리 노조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전국단일조직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달려야 하고 민간위탁을 막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2012년 총선에서 홍희덕 의원님을 당선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전국단일조직이 완성되고 민간위탁이 저지되면 우리의 일은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온갖 탄압을 뚫고 스스로의 힘으로 조합을 결성했을 때, 그것은 우리 조합원들에게 혁명이었다. 감옥에서 나와 내가 돌아갈 노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나에게 혁명이었다. 이 작은 두 혁명이 만나, 우리는 전국민주연합노조와 환경미화원의 국회 진출이라는 더 큰 혁명을 이뤘다. 꼭꼭 뭉친 눈뭉치가 비탈길을 구르며 눈덩이가 되고 눈사태를 일으키듯 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2009년 10월 우리는 노조 사무실을 의정부로 옮겼다. 의정부에서 처음으로 노조 깃발을 올렸을 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의정부지부에는 젊은 간부들이 있다. ‘역전의 용사들’은 대부분 정년퇴직을 하시고 이제 ‘미래의 용사들’이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전통을 이어받을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2005년 단협을 통해 임명식 반장제도가 없어졌다. 또 환경미화원 공개채용을 따냈다. 의정부지부의 젊은 간부들이 중심이 돼 지역사업을 펼치고 홍희덕 의원님을 재선 시켜야 하는데……. 나는 건강이 좋지 않다. 2009년 11월 노조에 휴직 신청을 했다.

집에서 쉬어야 할 텐데, 아내와 나 사이는 더 심각해졌다. 의원실 문제로 나와 아내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나는 아내에게 국회가 있는 여의도 근처에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술자리를 갖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의원실 보좌관들이 모여서 술을 마셨다는 게다. 어느 보좌관이 그만둔다고 해서 송별식을 해 줬다고 하는데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소한 일도 남의 입방아에 오를 수 있다.

우리 노조나 홍희덕 의원실이 또 공격을 받게 되면 결국은 내가 나서야 한다. 그게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 내 체력이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아니, 이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기면 감정적이 된다. 이전 같으면 그냥 넘길 일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어쩌면 헌도 형이 홍희덕 의원실 보좌관으로 가게 된 것도 내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몸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게 남은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는 짧기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최고의 피해자는 아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내다. 그런데 내가 주문한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면 대체 이 상황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아내에게 온갖 소리들을 퍼부었다. 아내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점,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도 헤집어 놓고 말았다.

내 악담에 지친 아내는 그날 이후 내게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실은 아내는 홍희덕 의원실이든 어디서든 나와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내의 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혼자 편하게 살면 되냐?”고 내가 짜증을 내고 심통을 부려 억지로 밀어 넣었다.

사실관계가 이러함에도 자신이 남편 덕에 보좌관이 된 것처럼 전 국민에게 망신을 당하게 됐으니, 내게 화가 났음은 물론이고 그마나 우리 사이를 이어 주던 실천에서의 신뢰감마저도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아내는 도망이라도 갔을 것이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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