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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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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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2007년 여름 노동계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이랜드노동조합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는 이미 400만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8개월 전인 2006년 11월 30일 국회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제정안,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개정안, 노동위원회법 개정안 등 이른바 비정규직 관련 3개 법안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합의로 통과시켰다.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개정안을 냈으며 법안이 시행되면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말이 괘씸했다. 150년 전 링컨도 ‘노예를 해방시킨다’고 했지 ‘노예를 보호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정규 노동자를 줄이겠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보호하겠다니, 한마디로 비정규 노동을 강화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법안의 내용은 더 한심했다. 기간제법 제정안은 사유제한 원칙을 배제하고 2년 기간 이내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기간제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사용자들은 마음 놓고 비정규직을 쓸 수 있게 됐다.

열린우리당은 기간제근로자가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설명했지만 이것 역시 무책임한 주장이었다. 기존의 법 테두리에서도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간주됐다. 그럼에도 사용자가 고용의무를 진다는 식으로 굳이 바꿈으로써 기간제 노동자의 신분보장을 사용자에게 맡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법안 제정시 250만명에 달하던 기간제 노동자 가운데 2년 뒤 계속 근무하고 있던 노동자는 20만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2년을 채우기 전에 해고당하거나 외주용역으로 돌려졌다. 이랜드의 경우 기간제노동자들은 2007년 7월 법안이 시행되자마자 대량해고에 직면했다.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의 싸움은 이래서 벌어진 것이다.

차별금지와 관련해서도 개정안은 ‘임금 등 근로조건에서 불합리한 차별 금지’라는 애매한 규정으로 생색만 냈을 뿐이다. 이와 함께 파견법 개정안은 파견업무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탄핵사태에 힘입어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으면서도 국가보안법은 손도 대지 못한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한 일이 대개 이랬다. 열린우리당은 대기업 편이었다.

제조원가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껏해야 10% 정도다. 임금이 10% 오른다고 해도 제조원가 상승은 1%에 그친다. 1%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겠는가. 그건 아니다. 시장에서 가격은 기업경쟁력의 하나에 불과하다. 기업들은 임금이 높다고 아우성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기업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 마케팅 아이디어도 없다. 임금이 높아서 문제인 게 아니라 어쩌다 대박을 내지 않는 한 정상적인 영업활동으로는 임금을 지불할 능력 자체가 없는 게 문제다. 반면 대기업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없는 건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사면 된다. 이런 식으로 수십 년이 지났다. 해마다 기업부문에 수십조원씩 투·융자를 해 줬는데 바뀐 게 없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비정규직은 대기업에 직간접으로 고용돼 있다. 대기업에 직접고용된 기간제노동자, 간접고용된 파견노동자, 대기업의 하청업체에 직접고용된 기간제노동자, 간접고용된 파견노동자의 순으로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보장해 주는 먹이사슬이 형성된다. 따라서 비정규·불안정 노동의 뒤에는 대기업이 있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은 비정규직을 없애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소리만 한다. 경제의 선순환이 막힌 지가 언젠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차라리 이대로 그냥 가자고 말하면 밉지나 않지.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이나 납품단가 후려치기, 오너 비리 등을 근절할 생각은 않은 채 중소기업과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니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격이다.

열린우리당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지를 걱정한 게 아니라 재벌들의 이윤을 올리는 먹이사슬이 흔들릴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이윤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재벌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비정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모은 것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재벌들 편이었다.

2007년 8월 30일 전국민주연합노조는 파업에 돌입해 전국의 조합원이 서울 원정투쟁 길에 올랐다. 악덕 청소업체들의 횡포와 탄압을 막고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할 자치단체들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외주용역화를 노골화하면서 노조를 벼랑으로 몰고 있는 상황이었다. 재벌들의 먹이사슬과 똑같은 맥락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전국민주연합노조와 이랜드노동조합의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을 선포했다.

내가 기초한 공동성명서는 “악질 이랜드자본이 비정규직법 시행과 더불어 비정규직을 대량해고하고 노동권의 사각지대인 외주용역화를 해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지금 지방자치단체 역시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해 해고와 외주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비정규 노동자의 생존권 박탈 정책이고 확대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고 규탄했다.

민주연합노조와 서비스연맹은 △예산낭비 부패온상 임금갈취 민간위탁 중단 △총액인건비제 개선 △자치단체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 △청소대행제 직영화를 요구했다. 또 △자치단체는 부족한 인원을 충원해 실업 문제를 해소하고 △이랜드와 청소업체는 해고한 비정규직을 즉시 복직시키라고 촉구했다

8월 31일 오후 3시 ‘자치단체 비정규 확산 저지대회’를 마친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상암동 홈에버 매장 타격투쟁에 참가했다. 경찰은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던 홈에버 매장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연대투쟁에 나선 노동자에게 물대포를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조합원들은 열심히 싸웠다. 이 싸움은 단순한 연대투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기도 했다. 홈에버 매장 바깥에서 싸우던 조합원들 일부가 매장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농성장에 합류한 조합원들은 이랜드 조합원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졌다.

이윽고 경찰병력이 농성장으로 진입했다. 경찰은 강제해산에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단을 한쪽으로 격리시키고는, 작전을 개시했다. 조합원들은 이랜드 여성조합원들을 보호하며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조합원 6명이 연행됐다.

홈에버 매장 바깥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사전에 결정된 투쟁계획에 따라 조합원들은 지부별로 이동을 서둘렀다. 이 순간만 해도 간부들은 조합원들이 연행된 줄 모르고 있었다. 조합원 6명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알게 된 나는 펄펄 뛰었다. 간부들도 격분했다. 우리는 투쟁계획을 바꿔 전 조합원에게 광화문에 집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거리가 멀어 일찍 지역으로 출발한 지부 조합원들도 다시 올라오도록 했다.

이날 조합원들은 밤을 꼬박 새웠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밤새 농성을 하던 조합원들은 새벽녘에 인근 지하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마친 뒤 오전 8시부터 ‘연행 조합원 석방과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조합원들이 갇혀 있는 강동경찰서와 수서경찰서로 쳐들어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조합원들은 항의집회를 전개하고 연행된 조합원들을 면회했다. 내가 가장 못 참는 게 조합원들이 잡혀가는 것이었다. 조합 일에 관한 한 나는 화를 내더라도 계산을 하고 화를 낸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잡혀가면 나는 도저히 분을 참지 못했다. 조합원들은 곧 풀려났다.

이와는 별도로 노조는 8월 30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행자부와 만났다. 노조 대표자 5명은 행자부 팀장급 공무원 6명과의 면담에서 민간위탁이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치단체 노사관계 악화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날 면담에서는 자치단체의 청소대행업체 사이의 계약 형식, 예산수립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방안도 협의했다. 노조는 전국 자치단체들에서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의 임금을 갈취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국가예산의 낭비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행자부에게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면담 결과 행자부는 정책 수렴을 위해 노조와 지속적으로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2007년 11월 셋째 주, 26개 광역 및 지부, 사업장 단위에서 단체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양주지부는 4개 청소업체와 퇴직금누진제 도입 행자부 기준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충북지역 지부들이 집단교섭을 시작했으며 동해·삼척 등 신규지부들이 단체협약을 쟁취했다. 특히 평택지부는 5년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해고 조합원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나를 기쁘게 했다.

평택지부의 마지막 해고자 배홍국 해복투 위원장이 2007년 1월 2일자로 복직함으로써 해고 조합원 35명이 모두 복직했다. 평택시는 복수노조 운운하며 교섭을 회피해 왔으나 우리는 집중투쟁을 중단하지 않았고, 행정법원마저 조정에 나서자 결국 교섭장에 끌려나왔다. 평택지부는 2007년 11월 16일 단협에 서명을 했다.

다른 지부들의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서울·경기·충청·경북지역의 신규사업장에서 노조탄압 사태가 다수 발생했다. 경기지역 집단교섭도 임금인상 부분만 잠정합의했을 뿐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안양지부는 2004년 연말에 단협을 맺은 뒤로 한 번도 단협을 갱신하지 못한 채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7년 4월 안양 청소업체 적환장에서 일하던 조합원 3명이 문자메시지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지노위에서는 패소했지만 중노위에서 승소해 2008년 2월 김시광·유용희 조합원 등은 복직을 했다.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08년 1월 31일자로 홍희덕 위원장의 임기가 만료됐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문공달 사무처장을 제2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부위원장은 강병월·김헌정·이미숙·이봉주·한상학·회계감사는 이경미·이상영·추윤호 조합원이 맡게 됐다.

문공달 위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강원도 영월로 떠나 그곳에서 두 달 넘게 머물렀다. 문 위원장의 첫 사업은 피켓시위였다. 속초와 강릉에 지부가 결성된 이래 전국민주연합노조는 강원도에서 급속도로 조직을 확대했다. 영월에 지부가 설립되자 영월군수는 노인회·부녀회·청년회 등 지역의 사조직을 총동원해 노조를 와해시키려 들었다. 작은 동네라 인간관계가 복잡하지 않았기에 인맥을 통한 노조 탄압이 먹히는 분위기였다.

문공달 위원장은 군민들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1인 피켓시위를 하고 조합원들이 퇴근을 하면 집회를 진행했다. 영월군에는 축제가 많다. 단종문화제·동강축제·김삿갓문화제 등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축제가 열린다. 문 위원장은 축제 때면 조합원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얼굴 팔러 나온 군수를 공략했다. 군수는 붉으락푸르락 군청 직원들에게 핏대를 올렸지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축제기간이라 문 위원장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영월지부는 단협을 쟁취하고 본격적인 노조활동에 나섰다.

그게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방식이었다. 일부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혼자서 1인 시위를 하면 노조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투덜댔지만 문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조의 위엄은 조합원들을 지켜 내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전국민주연합노조 간부들은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문공달 위원장은 위원장이 되고 나서 김헌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열정을 갖고 있는 조직이 잘되기만 한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겠다. 조직이 살 수 있다면 나는 허수아비가 돼도 좋다. 아니, 허수아비가 되겠다. 동지들이 끌어 달라. 내가 앞장서겠다.”

문 위원장뿐 아니라 모든 간부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신임 집행부가 취임하기 1년 전, 부산에서 이봉주 전 부산일반노조 공동위원장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봉주 부위원장은 부산일반노조를 탈퇴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전국민주연합노조에 합류했는데, 서울지역의 조직사업을 맡아 종로의 한 청소업체에 취업했다. 일반노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이봉주 부위원장에게 노조가 거는 기대는 컸다. 이것은 김헌정이 전국단일노조 건설을 도모할 때부터 목말라했던 일이었다.

이봉주 부위원장은 슬하에 무남독녀 외딸을 두고 있었다. 이 부위원장의 딸, 유진이는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유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아빠는 노동조합에 빠져들었다.

아빠는 집회에 나갈 때면 유진이에게도 같이 가자고 꾀었다. 유진이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데도 아빠는 약속 취소하고 같이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유진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빠가 노동조합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집회까지 같이 가자고 할 줄이야. 유진이는 아빠만 나타나면 딴청을 피웠다.

그러던 유진이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총무가 됐다. 어느 날 아빠랑 같이 집에 찾아온 험상궂은(?) 아저씨가 노조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유진이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느끼게 된 뒤였다. 노동조합 한다고 툭하면 집을 비우는 아빠가 미웠지만 유진이도 노동자가 돼 보니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알 것 같았다.

유진이는 호텔경영학과를 나왔는데, 직장에서는 대학에서 배운 게 하등 쓸모가 없었다. 이럴 바에야 왜 대학을 나왔나 싶었다. 괜히 엄마 아빠만 고생시킨 것 아닌지 죄송한 마음마저 들었다. 게다가 직장상사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너 하나는 언제든 자를 수 있다’고 내뱉으며 유진이를 상처 주는 것이었다. 유진이는 참다 참다 1년 만에 회사를 뛰쳐나왔다.

유진이는 2008년 1월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총무가 됐다. 총무라고 사무실만 지키면 되는 게 아니었다. 유진이도 투쟁조끼를 입고 집회에 나갔다. 결국 아빠가 이겼다. 이봉주 부위원장과 이유진 총무, 두 부녀는 이렇게 해서 동지가 됐다. 노조를 둘러싼 객관적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지만 출범 2년째를 맞는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전국조직으로서 위상을 확립하고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나 김헌정의 심경은 복잡했다.

2006년 11월 30일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공공연맹이 공공서비스노조로 산별 전환을 단행했다. 공공연맹이 먼저 공공서비스노조로 전환하고 2006년 말까지 화물·택시·버스노조 등이 운수노조로 통합을 완료하기로 했다. 이어 2007년 말까지 운수노조와 공공서비스노조를 합쳐 (가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공공연맹 소속 모든 노동조합은 공공서비스노조 또는 운수노조로 들어가기로 했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12월 22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김헌정은 “지난 7년 동안 소산별 형태로 활동해 온 모범적인 활동과 역사를 공공산별로 전파하고 확산시켜 산별시대를 적극적으로 맞이하자”고 산별 전환 안건 제안설명을 했다. 이 안건은 재석 97명 가운데 찬성 75명, 반대 4명으로 통과됐다.

그런데 임시대의원대회가 끝나고 산별 전환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체계는 ‘노조 중앙-지역·업종본부-지부’로 구성돼 있었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지역본부와 업종본부가 서로 교차되는 것으로 공공연맹 내에서는 ‘매트릭스 구성’으로 불렸다. 매트릭스는 수학의 개념으로 행렬(行列)을 말하는데, 가로줄(行)과 세로줄(列)이 교차해서 배열된 질서를 가리킨다.

산별 전환을 어렵게 만든 문제 가운데 하나가 조직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산별은 지역체계가 골간조직이 돼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조의 역사가 워낙 짧고 업종별로 조합 규모의 편차가 심하기에 지역체계만을 고집할 경우 산별 전환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을 가로줄, 업종을 세로줄로 삼아 교차시키자는 ‘매트릭스 구성’이란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마침 영화 〈매트릭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는 전국민주연합노조 입장에서는 말만 그럴 듯 했을 뿐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 노동자들은 지역체계·업종체계 어느 쪽에도 확실한 소속감을 갖기 힘들었다. 그들은 사회보험 노동자들처럼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역으로 나뉠 경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도 어려웠다.

산별 전환이 되면 교섭력이 높아져 본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다지만 교섭은 어디까지나 투쟁으로 뒷받침될 때 힘을 얻는다. 이제까지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집중지원투쟁으로 단체교섭을 이끌어 내고 현안을 돌파해 왔다. 이것은 김헌정이 노조의 역량을 분산시키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그런데 매트릭스 구성에 따라 노조의 힘이 열십자로 쪼개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김헌정이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먼저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실은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김헌정은 항상 통합적 관점에서 공공연맹과의 관계를 설정해 왔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공공연맹 내에서 소수였지만 꿀릴 게 없었다.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의 투쟁지침을 가장 잘 따르는 노조가 바로 전국민주연합노조였다. 그러나 막상 산별 전환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조합원들은 불안해했고 간부들의 걱정은 더 컸다. 2007년 2월 15일 전국민주연합노조 조합원총회는 산별 전환 안건을 부결시켰다. 공공서비스노조에서는 난리가 났다. 3월 27일 공공서비스노조는 전국민주연합노조를 탈퇴 처리했다.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안건이 통과된 것으로 산별 전환이 끝났고 그것으로 효력이 발생했다고 공문까지 여러 차례 보냈는데 또다시 조합원총회를 열어 이를 부결시켰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전국민주연합노조는 “규약에 근거해 노조의 합병·분할·해산을 하는 경우 반드시 조합원총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규약과 규정에도 없는 제명에 준하는 탈퇴처리를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을 한 것에 대해 우리 노조는 그간 상급단체로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공공연맹 등과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하고 민주노총 규약 제5조 규정에 의해 직가입을 결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직가입도 벽에 부딪혔다. 민주노총은 산별 전환을 추진하면서 직가입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자칫하면 전국민주연합노조는 민주노총에 적을 두지 못할 수도 있는 황당한 국면을 맞았다. 민주노총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너희는 민주노총 아니라며?”라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시설연맹에 전국민주연합노조가 가입하는 길을 열어줬다. 2008년 1월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사실상 휴면 노조였던 시설연맹을 전국민주환경시설일반노동조합연맹(약칭 전국민주일반연맹)으로 바꾸고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전국단일조직 건설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당초 조합 간부들은 산별 전환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말이 좋아 산별이지 내용적으로는 대기업·대공장 노동조합 중심의 기존 질서에서 변한 게 없다고 봤다. 김헌정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별 전환의 대의에 충실하려 했기에 그가 받은 상처는 컸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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